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8화 (118/235)

118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

나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어 고민들을 털어냈다.

무념무상. 심기일전. 심두멸각이다.

“일단, 빨리 가자. 이브.”

“으, 응.”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해 봐야 늦었다.

우선은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수아에게 할 변명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

결심을 다잡고 현관을 나서는 순간.

“저… 아빠.”

문득 이브가 심각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가라앉은 이브의 목소리. 대답하는 나도 덩달아 숨을 삼켰다.

“왜 그러냐. 이브.”

귀를 활짝 열고, 이브의 목소리에 한껏 집중했다.

그리고 그녀가 묻는다.

“그래서, 딸기우유 다섯 개. 줄 거야?”

이마를 짝, 소리 나도록 후려쳤다.

한숨을 슬쩍 내쉬었고.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줘야지.”

“앗싸!!”

이브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방 뛰었다.

지금의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일면. 혼자 심각해졌던 내가 병신같이 느껴질 정도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럼! 약속은 중요한 거야, 아빠!”

이브에게 일단 딸기우유 하나를 쥐여주고, 사이좋게 그 자리에서 한 팩씩 빨아 마셨다.

그 순간, 부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자였다.

“뭐냐. 이른 아침부터.”

한 손으론 딸기우유를 먹으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 액정을 슬쩍 살폈다.

뿌드득. 그대로 우유 팩이 우그러졌다.

[발신인: 오원태]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연락 가능하십니까.]

무심결에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다.

벌떡!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이브.”

“엉? 갑자기?”

“급하게 들러야 할 곳이 생겼다. 빨리.”

“어… 어어! 잠깐만! 당기지 마!”

성큼성큼 걷는 내 뒤로.

도도도도, 이브가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 * *

여기는 헌터 협회.

연구동의 생물과. 3―F 연구실.

“…한정용 헌터님. 듣고 있습니까?”

탁탁.

오원태가 눈앞에서 손가락을 연신 튕겼다. 그제야 퍼뜩, 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저었다.

“아. 예. 다 들었습니다.”

“정말로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

오원태가 미심쩍게 물어봤고.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못 들어서 얼타는 건 아니다. 진짜로 전부 들었다.

오히려… 들었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이브가 신체 구조상으론… 평범한 인간 그 자체다. 이 소리잖아요.”

“아, 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오원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의 신체는 평범한 인간이다’라는 말에 긍정한 것이다.

“검사 지표가 지나칠 정도로 특이점이 없어요. 그냥 평범한 사람을 검사했을 때와 똑같은 결과입니다. 몬스터한테만 반응하는 시약들은 아예 반응 자체를 안 했구요.”

“…그렇습니까.”

“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벼락에 맞고도 멀쩡히 살아있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어요.”

오원태가 친절하게 부연 설명까지 곁들였다.

이로써 내가 잘못 들었을 가능성은 0이 되었다.

나는 흘깃,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으응? 아빠. 왜?”

내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이브가 눈을 끔벅거린다.

자기 얘기로 초상집 분위기가 된 상황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어려운 대화를 나눈다 싶으니, 애초에 일말의 관심조차 안 둔 것이다.

“아니다. 아무것도.”

나는 고개를 휘휘 저은 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시선을 오원태에게 돌렸다.

“질문 좀 괜찮습니까.”

“아 예. 얼마든지요.”

오원태는 흔쾌히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은 멍한 목소리로, 나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검사 기계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0퍼센트…라곤 못 하겠습니다. 아무리 정밀한 기계도 가끔은 오류가 나니까요.”

오원태는 노련한 연구자답게 호언장담은 피했다. 전생에서도 그랬듯이.

하지만 다음 한마디는, 확실히 못을 박았다.

“하지만 확률이 현저히 낮죠. 이건 확실합니다.”

“그쪽 생각은 어때요. 이 결과가 오류처럼 보입니까?”

“글쎄요. 여러 검사를 병행했으니, 오류가 났으면 한 곳에서만 지표가 이상하거나 그래야 하는데. 이게 그렇지가 않아서요.”

“그렇지 않다 함은?”

“모든 검사가 일관성 있게… 똑같은 결론을 도출했다는 소리죠.”

똑같은 결과.

이브는 적어도 육체만큼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게 없다. 그런 결과를 말하는 것이리라.

오원태는 확인 사살하듯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오류라고 느껴지는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그… 검사로 어떤 정보를 얻고 싶으셨던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특이한 점이 하나도 없어서야,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습니까.”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간신히 납득했다.

받은 충격에 비해, 생각보다 정신이 멀쩡했다. 그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내게 의문을 느끼고 있다.

‘왜지.’

대답도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어쩌면 나는 가슴 한편에선. 이미 이런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짐작은 또 왜 했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모르겠군. 거기까지는.’

의미 없는 잡념을 떨쳐버렸다.

드르륵. 나는 곧장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끊임없이 딴짓하던 이브를 보챘다.

“가자. 이브.”

“으응? 벌써? 일 다 끝났어?”

이브는 물론이고, 오원태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개의 동그란 시선이 내게 동시에 향했다.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단계에서 막혔으니, 더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냥 가면 된다.”

“으응. 아빠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뭐.”

“오원태 씨. 그동안 휘둘리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슬쩍, 오원태를 향해서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타깃이 된 오원태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난 괜찮습니다! 거, 저야 금융 치료 덕분에 괜찮긴 한데…….”

거기서 한참 동안 입을 우물거리는 오원태.

고백하기 직전의 17세 소녀 새끼마냥 우물쭈물하는 행색이 심히 답답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긴 한데. 뭐요.”

“저는 괜찮은데. 그쪽은 괜찮으십니까?”

“저 말입니까.”

“눈치도 못 채고 있죠? 아까부터 표정이 겁나게 살벌하십니다.”

“…….”

정말 눈치 못 채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잔뜩 구겨졌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오원태가 약간 안심한 기색으로 첨언했다.

“헌터님께선 이 애가 던전의 비밀을 푸는 열쇠다… 뭐 이렇게 호언장담까지 하셨잖아요. 아주 자신만만하게요.”

굳이 흑역사를 들춰내서 쪽을 주는 오원태.

하지만 뭐, 나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랬었죠. 헛소리를 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 아뇨. 저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만. 그쪽이 저 이상으로 엄청나게 실망한 것 같아서요.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 하고…….”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그, 그러시다면야. 저야 다행이지만.”

오원태는 내가 빈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기색이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건… 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브의 육체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실 오원태의 말은 중간부터 거의 허물어졌고.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어떤 존재에 대해 생각하느라 바빴다.

‘이브의 스킬 면역 기능은 그럼……?’

노스페라드의 배후에서 나타났던 그 존재.

놈은 그때. 이브에게 스킬 면역 기능을 부여해 준 게 자신이라고 했다.

적어도 그 말은 사실이었을 확률이 부쩍 올라갔다.

‘그렇다는 말은. 즉.’

스킬 면역은, 육체적으로 특별한 존재에게만 허락된 능력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도 견딜 수 있는 무언가다.

다만 그 능력의 입수 경로가 밝혀진 게 없고. 그래서 이브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스킬 면역은 역시, 스킬의 일종인 건가?’

스킬을 막는 스킬? 디스펠처럼?

그러면. ‘스킬을 막는 스킬을 막는 스킬’ 같은 것도 있을까?

그 가정은 떠올린 즉시 스스로 부정했다.

‘X발 무슨. 슈퍼 방장이랑 슈퍼 강퇴도 아니고.’

애초에 스킬 면역은 디스펠 계열 스킬과는 근본부터 다른 느낌이다.

기존 디스펠 스킬은 ‘맞고 나서 대미지가 사라진다’라는 느낌이라면. 스킬 면역 대상에게 스킬을 쐈을 땐, ‘공격 커맨드 자체가 캔슬됐다’라는 느낌이었다.

‘좀 복잡하군. 이건.’

사실 조금 정도가 아니다.

이브의 육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 결과 덕분에 상황이 복잡하기 그지없다.

‘혈천갑으로 변신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리고 인간의 육체라면. 한 달 만에 청소년기까지 자란 급속 성장은 또 뭐고.

그쯤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또다시 원점이구나.

딴에는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보다.

어쨌든 복잡하게 꼬여있는 이브의 가정사(?)와 비밀을 풀려면. 아무래도 직접조사 말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듯싶다.

“뭐, 어쨌든.”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나는 약속대로 오원태의 계좌로 10억을 송금해 준 뒤. 헤벌쭉한 오원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신청. 오원태도 얼떨떨하게 붙잡았다.

“기왕 나한테서 살아남은 거. 오래 살아남길 바랍니다. 오원태 씨.”

“…인사 참 재수 좋게 하네요. 거.”

“그럼.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쇼. 한정용 씨.”

오원태는 뜨뜻미지근하게, 하지만 전보단 확실히 살갑게 나를 배웅했다.

하루 만에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인가. 나름 시원섭섭한 느낌이다.

그렇게 이브와 나란히 복도를 걷는 찰나.

“뭘 알고 싶은 건진 몰라도! 그 애의 비밀… 밝혀내시길 바랍니다.”

문득 등 뒤에서 오원태가 소리쳤다.

시선을 흘깃 돌렸다. 연구실 문을 빼꼼 연 오원태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운 정이 든 게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손을 슬쩍 들어 휘적여 줬다.

“…오냐.”

그렇게 헌터 협회의 용건은 완전히 끝났다.

이브와 함께 헌터 협회를 나왔고. 멀거니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해가 붉게 기울고 있었다.

* * *

하늘을 유성처럼 꿰뚫으며 비행하길 약 30분가량.

나와 이브는 해운대구 송정동에 도착했고. 문제의 CCTV가 촬영하던 장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는 금방 찾아냈다.

“찾았다.”

거리의 특징이 뚜렷해 몰라볼 수가 없었다.

투명화 스킬을 두른 채, 딱 CCTV 시점 정도의 높이에서 수색했는데. 심각하게 익숙한 구도의 풍경이 포착된 것이다.

“분명 이 주변인데.”

인적이 뜸한 골목 어귀.

스르륵. 투명화 스킬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나는 침음을 흘리며 일대를 스윽 훑어봤다.

가장 먼저 든 감상은 이것이었다.

‘해운대라고, 전부 바닷가인 건 아니었네.’

난 이번이 인생 첫 해운대 방문이었다.

영원회귀 전엔 먹고살기 바빠서 못 가봤고. 영원회귀 이후엔 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 상식선에선 ‘해운대=부산 쪽 바다 언저리’라는 애매한 이미지였는데. 이번 기회에 그것이 완전히 박살 났다.

“괜히 바닷가 쪽만 샅샅이 뒤져서… X발.”

덕분에 시간 낭비를 오지게 했다.

잘못된 상식과 선입견이 이래서 위험하다.

혼자 꿍얼거리던 것도 잠시. 이내 두 눈에 마력을 불어넣어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현자의 눈]

스릉.

서늘한 푸른 빛무리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마력의 잔향을 쫓는 시선이다.

전에 이세라의 주점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이곳에 남아있는 모든 인간들의 생체 마력 잔향을 재구성했다.

‘너무 많긴 한데….’

문제는 포착되는 잔향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

결정적으로 이 수많은 잔향들 중에서, 애덤 크로스와 로즈 휴스턴을 특정할 만한 단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지표가 없는 게 제일 문제네.’

이게 지나가던 김 서방의 마력인지, 조선소 외노자 스미스 씨인지.

내가 어떻게 분간하냐, 이 소리다.

‘전에 직접 본 사람이면 모를까.’

이세라 때와는 경우가 많이 다르다.

이세라는 내가 직접 본 적이 숱하게 많다. 그래서 그녀가 내뿜는 특유의 잔향을 잘 안다.

진짜 농담 하나도 안 섞고.

이렇게 수많은 잔향의 홍수 속에서도, 그녀의 마력을 보면 단박에 눈치챌 정도다.

“으음?”

그래. 바로 지금처럼.

지나치게 익숙한 마력 잔향을 발견한 나머지, 당황의 탄성을 터뜨렸다.

“…이세라?”

왜지.

대체 왜인지 나도 모르겠는데.

이 일대에서, 뜬금없이 이세라의 마력 잔향이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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