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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1화 (81/235)
  • 81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머리가 전에 없이 팽팽 돌아갔다.

    여러 가지 가정과 시뮬레이션이 머릿속에 맴돈다.

    ‘아예 지금 영원회귀를 밝혀버리는 건……?’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내 금방 기각됐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아직 1차 붕괴도 안 일어났는데 밝히긴 뭘 밝히냐.

    개소리 작작하라고 싸대기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그러면 현 상황에서, 제일 그럴싸한 시나리오는…….’

    몰라.

    모른다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임기응변? 장난하냐.’

    그게 잘 되는 새끼였으면 영원회귀도 1천 번이나 반복 안 했겠지.

    그래, 뭘 나답지 않게 깊게 고민하고 있냐. 나는 옛날부터 대가리가 나빠서 몸이 고생하는 인간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X발.’

    우선 마음 가는 대로 부딪쳐 본다.

    후회는 싸질러 놓고 하자. 이런 건 기세와 속도가 중요하다.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우선 하나씩 차근차근 말해주자면.”

    “네.”

    “이름은 이브, 지인이 맡겨 놓은 마케도니아 혼혈아다.”

    “…네?”

    마케도니아 혼혈아 컨셉을 밀어보기로 했다.

    저번 생엔 입구컷 당하다시피 했지. 이번에야말로 성공해 보겠다.

    나의 성장과 발전을 이번 세계에 각인시키겠다.

    “오빠. 마케도니아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수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같잖다는 듯이 피식거리며 말한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지.”

    “근데 갑자기 마케도니아 혼혈? 좀 앞뒤가 맞는 소릴 하셔야죠. 오빠!”

    “마케도니아를 내가 알아야 하냐?”

    나는 오히려 수아에게 반문했다.

    내가 너무 당당해서인가, 수아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 네……?”

    “내 애가 아니야, 지인의 애다. 내가 마케도니아가 어디인지 알 게 뭐냐, 수아야.”

    “어… 그, 그야, 그렇긴 하죠……?”

    수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먹힌다. 내 변명이 오랜만에 수아한테 먹히고 있다. 조금씩 수아가 설득당하는 분위기다.

    역시 우기기 싸움은 기세와 속도지, 이대로 밀어붙여 버리겠다.

    “그래, 사실 네 말대로야.”

    “또, 또 뭐가요?”

    “사실은 마케도니아 혼혈이 아닐지도 몰라. 한국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머나먼 이국의 어딘가일지도 모르지.”

    “예? 뭐가 어쩌고 저쨌다고요?”

    “이 넓은 지구 어디선가, 내 지인이 뒷일 생각 않고 교미해서 싸지른 애새끼를 내가 맡았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다, 수아야.”

    “오, 오빠! 말을 해도, 그렇게 상스럽게 해요! 애 듣잖아요!!”

    수아가 얼굴을 확 붉혔고, 이내 덥석. 황급히 이브의 귀를 틀어막았다.

    이브는 갑자기 귀가 막히자 퍼뜩 몸을 떨었다.

    “으응? 엄마아, 갑자기 왜 그래?”

    이브가 의아한 듯이 눈을 굴려 수아를 올려다봤다.

    빠져들 것처럼 순진무구하고 영롱한 붉은 눈동자. 수아가 그것을 빤히 주시한다.

    “허윽!”

    순간 수아의 얼굴이 무장 해제 돼버린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이브의 귀여운 외모 때문이겠지.

    이브의 정체를 아는 나조차도 저 외모에 깜빡 속을 때가 있다. 일반인인 수아는 오죽할까.

    “아, 아니. 잠깐만, 이브!”

    수아는 뒤늦게 정신 차리고 이브를 불렀다.

    그러자 이브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응! 엄마!”

    “아니, 그러니까! 나 네 엄마 아냐! 왜 내가 네 엄마야?!”

    수아가 가슴을 두들기며 하소연했다.

    일견 황당한 걸 넘어서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직 그 나이에 애 딸린 아줌마 취급받기는 많이 싫은 모양.

    하지만 이브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으응? 엄마는, 그냥 엄마야! 원래 내 엄마라구!”

    아무렴.

    60년 전통 우기기 원조 맛집은, 내가 아니라 이브다.

    “아니,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수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연신 헛숨을 들이켰다.

    이쯤에서 내가 이 무의미한 언쟁에 종지부를 찍어줄 때다. 나는 은근슬쩍 수아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갔다.

    “호칭은 어쩔 수 없어. 네가 이해해라, 수아야.”

    “엄마야, 깜짝아!!”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귀를 마구 비볐다.

    파바박! 그녀가 침대를 기어가 최대한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뭐, 뭐… 가, 갑자기 뭘 속삭이시는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니, 네가 이유를 알려달라며. 네가 엄마인 이유.”

    “…아.”

    “이브의 진짜 엄마랑 네가 닮아서 그렇다고. 별 대단한 이유는 아냐.”

    그 말에 수아의 시선이 다시 이브에게 향했다.

    배시시. 이브는 수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천진난만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허윽!”

    수아의 얼굴이 속절없이 2차 함락.

    결국, 수아는 무안한 듯이 입맛을 다셨고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말, 진짜예요?”

    “믿고 싶으면 믿고, 말려면 말아라.”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로선, 지금 상황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보다 거짓이 더 적합한 상황이 있다는 것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웬만하면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고. 나도.’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금 내가 아는 모든 비밀을 실토한다? 수아의 상식관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이후로도 수아는 자잘한 질문들을 몇 개 더 해왔다.

    “마케도니아 혼혈이라면서요. 근데 엄마가 어떻게 저를 닮아요?”

    “아빠가 외국인이다. 원래 딸내미는 아빠 닮는 법이지.”

    “…마케도니아인지 뭐시기에선, 백발에 빨간 눈도 유전돼요?”

    “모른다. 알비노인가 그거겠지.”

    급조한 것치곤 청산유수처럼 변명했다.

    전생의 경험이 굉장히 유용하게 작용했다. 그녀의 관심사가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상황 대처가 비교적 쉬웠다.

    알비노라는 대답도 전생의 수아가 말했던 걸 참고한 거다.

    ‘…이게 맞나, 진짜로.’

    가슴 한편에선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전생의 수아를 참고해서, 그녀가 믿을 만한 거짓말은 만들어냈다. 이번에야말로 내 거짓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통할지 안 통할지, 그쪽으론 확실히 문제가 없었다.

    ‘이게 잘 될까. 진짜로……?’

    이 불안감은 거짓말의 통용 여부 때문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거짓말을 해서, 뒤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

    거기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아니,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잖아.’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기 합리화를 해서 얼버무렸다.

    이제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거다.

    “흐응…….”

    수아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

    솔직히 반쯤은 아직 안 믿는 듯했다. 그래도 반은 믿게 만든 게,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슬슬 심적인 긴장을 풀어가던 그 순간.

    “…근데 이름이 이브라니. 크리스마스이브 할 때 그 이브죠?”

    수아가 별안간 그런 말을 했다.

    어느새 이브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가엔, 푸근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되게 예쁜 이름이네요. 하얀 머리칼이랑 잘 어울려요. 이브!”

    전생과 완전히 똑같은 말을 내뱉는 수아.

    아찔한 기시감이 뒤통수를 후려친다. 대비도 못할 정도로 기습적이다.

    “…….”

    한동안 숨도 못 쉬고 허공을 멍하니 주시했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삼 눈앞의 여자가 내가 알던 ‘강수아’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또한.

    “그렇구나… 정말로.”

    내가 버리고 온 전생.

    나중에 천천히 대화하자고 약속했던 1001번째 수아. 그녀는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그 사실을 선명하게, 내 뇌간에 박아 넣었다.

    * * *

    전생에서도 그런 기색은 있었다만.

    의외로 수아는 금세 이브와 친해져 죽이 잘 맞았다.

    “아르르, 까꿍! 나 없다!”

    수아가 얼굴을 가렸다 펼치는 등, 갖가지 재롱(?)을 부리며 이브의 관심을 유도했다.

    이브는 그런 수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엄마……? 뭐 해?”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하는 수아,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무안하게 손을 내렸다.

    “으, 응?”

    “손으로 얼굴 가려도 엄마는 안 사라져, 엄마 이상해! 히히.”

    “아… 그, 그야 그런데.”

    “숨바꼭질하고 싶은 거야? 응? 내가 놀아줄까?”

    “아, 아냐. 미안해. 무시해서 미안해, 이브…….”

    죽은 잘 맞았는데. 수아가 생각보다 이브만 한 애와 놀아주는 법을 잘 몰랐다.

    그래도 저만한 애한테 ‘아르르 까꿍’은 선 넘었지.

    ‘전생에도 둘은 이런 느낌이었나?’

    가끔 둘이 달라붙어 있는 건 봤다.

    하지만 노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은 없어서, 실제로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이자 미래다. 내가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거다.

    ‘어쨌든 두 사람은 생각보다 곧잘 어울린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몇 번째 전생이든. 다행인 건 그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관계가 일단락되자, 나는 수아에게 곧장 부탁했다.

    “수아야, 네 언니 좀 이쪽으로 불러줘라.”

    수아는 잠깐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이내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요? 언니는 왜요?”

    “네 언니랑 상담할 게 좀 있어.”

    “그, 근데 언니는 맨날 바빠서요. 제가 부른다고 올 수나 있을지…….”

    “바로 오게 하는 법을 안다.”

    “……?”

    “핸드폰 잠깐 빌릴 수 있을까.”

    수아는 미심쩍어하면서도 핸드폰을 넘겨준다.

    나는 메신저 상단에서 강서윤의 이름을 찾아냈고, 이내 그녀에게 짤막한 문자 하나를 작성해 보내버렸다.

    “됐다.”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리고 훌쩍, 다시 수아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이제 3분 내로 여기에 나타날 거다.”

    “예에? 대, 대체 무슨 말을 하셨길래……?”

    “궁금하면 한 번 보든가.”

    수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핸드폰을 조작한다.

    그녀가 강서윤과의 대화창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이내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간다.

    “오, 오빠! 이건……!”

    수아가 엄청나게 당황하며 하소연하려는 그 찰나.

    쉬쉭! 별안간 눈앞에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섬광의 중심에서 사람의 신형 하나가 튀어나왔다.

    “야이 개새끼야아아아!!”

    나타난 것은 강서윤이었다.

    순간이동으로 깜짝 등장한 그녀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포효한다.

    “이거, X발! 대체 무, 무슨 소리야!!”

    성큼성큼 달려든 강서윤이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수아 번호로 온 메시지가 몇 개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보낸 그것이다.

    눈알을 굴려 훌쩍 읽어봤다.

    [나랑 수아 사이에 애가 생겼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얘기해 준다. 우리 집 와라.]

    계획대로 강서윤은 나타났다.

    저 문자를 어떻게 참냐. 나라도 절대 못 참지.

    하물며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강서윤이다. 구라핑이라는 걸 알아도 올 수밖에 없다.

    ‘그럼… 시작해 볼까.’

    씩씩대는 강서윤을 보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결심과 각오를 굳힌다. 머릿속이 전에 없이 싸늘하게 식는다.

    나는 사뭇 진중한 어조로 강서윤에게 말했다.

    “시간 좀 있냐.”

    “…뭐, 뭐?”

    “시간 좀 있냐고.”

    “허? 갑자기 웬 시간?”

    이번 생에서 내가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들.

    가장 첫 번째 단추를 끼울 시간이다.

    “잠깐, 나랑 대화 좀 하자.”

    내가 1002번째 회귀자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이번 생의 강서윤, 넌 이제부터… 내 든든한 조수 1호가 돼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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