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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2화 (62/235)

62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8)>

폐건물 최상층인 6층까지 단박에 올라갔다.

끼이익. 비상계단 출입구를 열고 플로어로 진입했다. 그러자 초입부터 웬 떡대 아저씨들이 우리를 반겼다.

“…….”

다만, 놈들에게선 이렇다 할 살기나 투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먼저 살기를 드러내거나 하진 않았다.

“이 새낀갑네. 레드 저거너트를 자처하는 미친 새끼가 쳐들어왔다더니.”

놈들은 그런 말을 하며 알은체를 해왔다.

아무래도 1층의 소란을 목격한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미리 상부로 전달한 듯하다.

‘김강현이 했을지도 모르고.’

여기는 헌터 소굴인 레드 스컬.

텔레파시 비슷한 전음(傳音) 스킬? 개나 소나 갖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동네다.

“그래. 그게 나다.”

나는 숨길 거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도 내 정체를 다 알고 있는 마당이다. 힘숨찐 놀이를 할 생각은 없다.

“허. 새끼.”

그 당돌함에 놀랐음인가.

떡대들 중 대표로 보이는 놈이 피식 웃었다.

“우리 보스를 만나러 왔다던가?”

“오냐.”

“하핫. 미친 새끼. 우리 보스가 누군지나 알고 그러냐?”

“전 헌터 협회 소속 오버랭커. 서열 5위. 박상아.”

“…….”

잠깐 떡대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찮은 질문들을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마라. 귀찮으니까 안 알려준다.”

놈들이 일제히 몸을 굳혔다. 진짜 물어볼 셈이었나 보다.

입구컷 박아놓길 잘했네.

“…….”

“…크흠.”

떡대들이 잠깐 제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는가 싶더니. 이내 대표 떡대(?)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놈이 내 앞으로 한 발짝 나온다.

“…그 보스가 너를 보자신다. 흥미가 생겼다더군.”

“그러냐. 성은이 망극하다.”

“이제 날 따라와라. 김강현 그 새끼는… 대충 거기 냅둬.”

“그러지.”

툭툭.

뻘쭘하게 서있던 김강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줬다. 눈치를 불나게 보던 김강현이 화들짝,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쌍따봉을 척, 치켜들었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고맙다.”

“아… 하, 하하. 아, 아닙… 니다. 제,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그래. 알긴 아네.

실제로 한 거 없지. 딱히 도움도 안 됐고.

하지만 지금은 내 억지 칭찬에 놀아나 줘야겠다. 김강현.

“아니. 네가 최고야. 이것도 인연이지. 마지막으로 찐하게 포옹이나 한 번 하자.”

“…예?”

“이리 와. 안아줄게.”

“어, 아, 아니! 갑자기 무, 무슨! 징그럽게……!”

어, 딜도, 망가.

나는 질색하는 김강현의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놈을 단단한 흉갑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꾸드득. 붉은 갑옷의 품 안에서 연신 캑캑대는 김강현.

“자, 잠깐… 쿨럭! 이, 이거! 갑옷! 아픕니다! 진짜로! 크학!”

아프다는 게 빈말은 아닌지 눈물까지 찔끔 맺혀있다. 발버둥이 필사적이다.

그러든 말든. 나는 놈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갔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움찔. 김강현이 발악을 일순 멈춘다.

놈은 연신 얼빠진 탄성을 내다가, 이내 흠칫거리며 목소리를 잔뜩 죽였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내 1차적인 목표는 너희들 보스를 만나는 거. 그 다음 목표는, 너희들의 몰살이다.”

“!!!”

“보스… 박상아랑 대화하는데 넉넉잡아 20분 걸릴 거다. 살고 싶으면 그동안 이 건물에서 최대한 멀어져라.”

포옹을 풀었다.

바짝 얼어있던 김강현을 놔줬다.

툭툭. 김강현의 어깨를 재촉하듯 두들겼다. 놈의 부릅뜬 두 눈이 내게 향한다.

[왜?]

김강현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런 계획을 왜 나한테 말해버리는 거냐. 그리고 왜 나를 살려주는 거냐. 뭐 그 외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의문이 담겨있다.

“이제부터 착하게 살라고 안 한다. 쫄지 마라.”

나는 피식,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이러는 이유는 좀 복잡한데. 쉽게 말하면 도박 같은 거다.

지금부터 나는 보스와 용건을 마친 뒤. 레드 스컬이라는 조직을 이 세상, 이 회차에서 완전히 삭제해 버릴 거다.

그러나 그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 사항이 아니다.

게임으로 치면 메인 퀘스트가 아니라, 서브 퀘스트 같은 거지.

“오늘 하루 고생한 보상으로 생각해. 대단한 이유는 없다.”

레드 스컬을 박멸해 놓으면, 수아의 생존성이 모기 눈물만치 올라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반복한 전생의 통계로 미루어볼 때. 의외로 레드 스컬이 수아의 생존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게 미미한 편이다.

그래서 레드 스컬 몰살은 어디까지나,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일종의 취미. 자원봉사. 혹은 레저 활동 같은 거다.

‘한 놈쯤 살려도… 크게 변할 건 없어.’

물론 가능성은 무서운 거다.

말하자면 상처 입은 맹수 같은 놈이지.

지금 당장 약해 보인다고 무시하고 비웃었다간. 어느새 배후를 덮쳐온 번득이는 이빨에, 뒷목을 물려버리곤 한다.

내가 지금 살려주기로 결심한 이놈.

레드 스컬의 말단 잡배. 이름은 김강현.

이후로 갖가지 우연이 꼬이고 꼬여, 김강현의 공격스킬이 강수아의 배때기에 박힐 가능성? 분명히 희박하게나마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숙지하고 있다.

‘상관없어.’

전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려주는 선택을 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도박인데.’

도박은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재밌는 법.

나는 잠깐이나마 인연이 있었던 김강현에게 일종의 베팅을 했다.

실패의 리스크가 적은 만큼, 성공율도 지극히 낮은… 말하자면 로또 같은 도박.

‘혹시 또 아냐고.’

이 선택이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보장이 없다고.

김강현을 살린 이 선택이 나중에 구르고 굴러, 게임 체인저가 될 만한 기가 막힌 역할을 해줄지. 또 모르는 거잖아.

‘나는 이세라처럼 예언자도 아니다.’

하물며 신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봐야지. 진짜, 뭐라도.’

그 후에 초래된 결과를 직접 겪는다. 내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진다.

그렇게 몸으로, 하나씩 깨달아가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론, 그냥 앞으로 만날 일 없길 바란다. 김강현.”

나쁜 일로든, 좋은 일로든.

김강현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뒤통수에 따갑다. 그러나 일절 무시했다.

대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떡대들에게 다가갔다.

“가지.”

“…그래.”

놈들과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를 얼마나 걸었을까. 곧 우리는 낡아빠진 거대한 철문 앞에 도달했다.

똑똑. 떡대 중 하나가 정중한 행색으로 노크를 했다.

“누님. 데려왔습니다.”

안에 있는 누군가. 아마도 보스 박상아를 향한 말일 테다.

그리고 대답은 금세 들려왔다.

“아, 그래?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바로 들여보내!”

들떠있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는 여전하군. 나는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세라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듣기 싫은 목소리 중 하나다.

“네. 그럼.”

고개를 끄덕인 떡대들이 문손잡이를 힘차게 당긴다.

끄그그긍. 녹슨 철문이 육중한 염을 토하며 천천히 열렸다.

툭툭. 떡대들이 내 등을 밀치며 재촉했다.

“들어가라. 빨리.”

거 성질도 급하시지. 나는 피식 웃어준 다음, 열린 문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내부는 거대한 강당. 스포츠센터 같은 곳이었다.

나는 천천히 강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성한 게 거의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강당 한곳에 잔뜩 쌓여있었고, 부서진 스포츠용품과 폐선반이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천장의 조명이 드문드문 켜져있어, 실내는 밝은 편이었다.

‘여기도 지금쯤이면 전기는 무조건 나갔을 텐데. 그렇다는 건…….’

어디서 발전기라도 주워다 돌렸거나.

아니면 전기계열 스킬을 정교하게 다루는 헌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머. 정말이네?”

그리고 목소리.

고대하던 박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뉴스에서 본 거랑 거의 똑같아.”

강당 중앙. 거기 박상아가 있었다.

나름 보스 티를 내고 싶은 건지, 어디서 고급진 붉은 소파를 주워 와 거기에 앉아있었다.

“흐흐. 좀 신기한데?”

박상아의 시선은 아까부터 나를 끈적하게 훑고 있다.

이내 그녀가 특유의 고양이 같은 얼굴로 싱긋 웃었고. 다리를 꼬며 흥미 어린 목소리를 냈다.

“당신, 진짜로… 레드 저거너트인가요?”

나는 빠르게 사위를 탐색한다.

박상아가 앉아있는 소파 주변. 호위 병력으로 보이는 헌터들이 10명 정도 포진해 있었다.

죄다 A급인 건 물론이고. 한 명은 무려 S급 헌터였다.

“저기요. 귀 먹었어요?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은가?”

문득 박상아가 눈썹을 틀어 올렸다.

푸화악! 직후 강당의 공기가 급변한다.

박상아가 언짢아하니, 호위 병력들이 살기를 뿜어내 압박해온 것이다.

“…….”

“…….”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뿌리고 있다. 허튼짓 했다간 즉시 내 모가지를 꺾어버릴 기세.

일반인이었다면, 그 압박감만으로도 방광에 힘 풀릴 수준이었다.

“그래. 그렇게 불렸던 적이 있다.”

결국 나는 침묵 끝에 긍정했다.

박상아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타이밍이 타이밍이라, 부하들의 살기에 내가 쫄았다고 생각한 듯하다.

“푸흐흐. 역시. 그년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네. 진짜로 왔잖아? 레드 저거너트.”

그리고 혼자 깔깔대며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조차 없다. 마치 진짜 레드 저거너트가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저건 예상이 아니다.’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는 어조다.

아니. 확신을 했겠지.

‘방금. 그 말.’

저 새끼 뭐라고 했냐.

그년의 말?

‘그럼 그렇지.’

앞뒤가 머릿속에서 척척 들어맞아 간다.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서늘하게 식어서 흘러나왔다.

“이세라가 그러던가. 내가 올 거라고.”

그 이름이 나오자 흠칫. 박상아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씨익, 날카로운 미소가 박상아의 입가에 머물렀다.

“세상에. 세라를 아시네? 당신, 헌터 협회 있을 땐 고위 간부였나 봐?”

“마음대로 생각해라.”

“맞아요. 세라한테 다 들었어요. 당신이… 세간을 한 때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의문의 영웅, 레드 저거너트라면서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푸흐흐! 뭔 대답이 그래? 그 기지배가 재밌는 사람이라더니, 그것도 진짜였네!”

박상아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강당을 메아리쳤다.

이내 우뚝, 웃음이 멈춘다. 놀라울 정도의 적막이 강당 전역에 휩싸였다.

“있잖아요. 레드 저거너트.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숨죽인 고요 속에서. 박상아는 요염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봐라.”

“당신, 엄청 강하죠? 나보다도 훨씬.”

“그래.”

단박에 긍정했다.

나는 명실상부 지구 최강이 맞으니까.

반박은 불가하다. 실력 그래프… 아니, 던전 시스템은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다.

쏘리, 아이 엠 스트롱.

“왜 붕괴한 게이트들을 닫고 다녔나요?”

이어진 질문은 그것이었다.

저의를 알 수 없는 질문. 그러나 이 대화 패턴 자체는 지극히 익숙했다.

똑같진 않지만, 박상아와 비슷한 문답을 많이 해봤다.

“무슨 의미냐.”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 누구한테도, 아무런 보수도 요구하지 않고. 당신은 붕괴한 게이트를 차례차례 닫아나갔죠.”

“그게 뭐.”

“가장 최근… 바로 어젯밤이죠? 중랑구에서 붕괴한 던전이요. 그것도 당신이 닫아버렸죠?”

“맞다.”

내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상아의 호위 병력 쪽에서 약간의 술렁임이 있었다.

박상아가 손을 슬쩍 들어 소란을 제지한다. 단숨에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도 피해가 엄청났다고 들었는데. 그 끔찍했던 경복궁 사태 때보다 어려웠나요?”

“비슷했다.”

정말로 내 입장에선 난이도는 비슷했다.

어차피 12차 붕괴 전까진 무르무르가 아닌 이상. 어떤 던전 마스터가 나와도 내 몸에 손톱만 한 기스도 못 낸다.

‘뉴스 같은 정보매체가 다 죽었으니… 저쪽도 답답하긴 하겠군.’

놈들은 중랑구 던전 붕괴의 규모를 정확히 모른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사망자. 궤를 달리하는 피해 영역. 그런 자세한 정보를 모르니까 저렇게 ‘경복궁 사태’ 따위와 비교를 하는 거다.

놈들이 제대로 알았으면. 애초에 나한테 함부로 말도 못 붙였다.

“처음엔 어그로에 미친 관종 새낀가 했더니. 방송국 죄다 망해버린 지금도 이러는 걸 보면, 또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 목숨 지키는 데엔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고……?”

박상아는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진득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시종일관 투구 속의 내 시선과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 대체 행동하는 목적이 뭔가요? 전부터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노코멘트 한다.”

“…네? 뭐야 또. 언제는 물어보라더니?”

“물어보라 그랬지. 대답해 준다 그러진 않았다.”

하, 하하.

박상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웃기냐? 나는 나름 심각한데. 이래도 웃을 수 있는지 한 번 시험이나 해보자.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다.”

대화의 주도권을 가로챘다.

단도직입. 용건부터 바로 들이밀었다.

“이세라는 이미 죽였냐.”

예상대로다.

박상아는, 더 이상 여유롭게 웃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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