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9화 (59/235)

59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5)>

쿠르르르!

장난감 성이 천장부터 천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쏟아지는 건물의 잔해를 뿔뿔이 흩어진다. 도처에서 비명이 쏟아지며,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 여왕님.

―여왕님. 어째서. 대체 어째서……?

그리고 남겨진 장난감 병사들.

그들은 망연히 그들의 여왕의 시신만 쳐다봤다. 성이 무너지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여왕님…….

이내 그들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진짜 장난감처럼, 그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바깥에서 시민들을 포획하고, 학살하던 병정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저것들은 에티가 죽으면 늘 저랬으니까.

이것 또한 기믹 보스 던전의 장점 중 하나다.

“끝…났다.”

붕괴가 끝났다.

끝나버렸다. 수많은 의문을 잔뜩 떠넘긴 채.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간다.

스륵.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훌쩍. 크흥!”

이브가 보인다.

이브는 내 품에 안겨 옷깃을 꽉 붙들고 있었다.

“우에엥. 무, 무서웠어. 아빠아… 안아줘어!”

눈물과 콧물을 내 셔츠에 잔뜩 묻히며, 슬슬 울음을 그쳐가는 중이었다.

미간이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좁혀졌다.

‘이브를 본 다음부터였지. 분명히.’

그래.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이브를 본 에티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눈을 부릅뜨고 뭔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싶더니.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를 했다.

―아저씨. 전에도… 나 본 적 있지?

나를 본 적 있냐고. 똑똑히 들었다.

에티는 내 영원회귀를 인식하는 개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했다.

―나 본 적 있지? 엄청 많이.

그냥 한 번 떠보는 것도 아니었다. 뚜렷한 확신에 찬 어조와 표정이었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나 동요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이브가 문제였어.’

뭔가가 변해가고 있다.

고요하고 정적이었던 반복의 한 달. 지긋지긋한 1천 번의 영원회귀.

내가 아무리 돌을 던져도, 이 거대한 호수엔 제대로 물결조차 만들지 못했는데.

지금. 잔잔했던 수면에 거대한 파란이 몰아치고 있다.

‘뭔가가… 바뀌기 시작한다.’

바위다.

작은 조약돌이 아니다. 운석에 가까운 거대한 바위가 수면을 때린 거다.

그 바위의 이름은, 이브.

“귀머거리 토끼. 길을 잃은 까마귀. 목 잘린 붉은 용…….”

나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던전 마스터 에티가 자살하기 직전. 뭔가에 쓰인 얼굴로 지껄였던 문장들이다.

“하트 여왕의 눈물. 주저앉은 광대.”

일견 미치광이의 헛소리도 같고, 어떤 암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놀랍게도. 이 의미 불명의 문장 나열들에서… 어떤, 강렬한 위화감을 받았다.

“죽어버린… 왕의 옥좌?”

기시감.

혹은 그리움.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뭐라 표현해도 이 기분은 제대로 담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아득하고 아련한 감정이, 심장에 직접 사무쳐온다.

[던전 마스터 ‘심심한 에티’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 입술을 비집고 탄성이 흐른다.

나는 재촉하듯 떠오르는 패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보상… 그래. 보상은, 받아야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내가 에티와 태평하게 게임하는 몇 시간 사이. 밖에선 수십만 서울시민들이 다진 육편이 되어 죽어나갔다.

대가가 비싼 보상이다. 챙길 건 챙겨야 인지상정이다.

‘보자.’

겹쳐서 떠오른 패널을 넓게 퍼뜨렸다.

가장 중요한 보상 품목 패널을 눈앞에 가져왔다.

던전 폐쇄자 알림은 뜨자마자 지웠다.

어차피 내 소문 퍼뜨려줄 매스컴이 진작에 터져버렸다. 이번 생에선 이미 히어로 영업 마감했다.

[아이템 ‘토끼발’을 획득하셨습니다.]

쉬리릭!

패널의 등장과 함께, 내 손엔 작고 하얀 털 뭉치 같은 것이 쥐어졌다.

나는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세히 살펴봤다.

“…토끼발?”

웬걸.

모형이 아니라 진짜 토끼의 발이었다.

“이건 또 뭐야.”

뭉툭한 생김새. 복슬거리는 털의 감촉. 발목 부근에서 예리하게 잘린 단면.

그리고, 꿈틀꿈틀. 지금도 계속해서 경련하는… 발가락과 발톱들.

‘살아있는데. 이거.’

잘려있음에도 그 작은 살덩어리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이런 크리피한 아이템은 전생 다 뒤져도 본 기억이 없다. 황급히 현자의 눈을 발동시킨다.

[아이템 정보]

[명칭: 토끼발(The Rabbitfoot) (S급)]

[타입: ???/보조]

[효과: 지금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효력범위: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상세: 제41던전의 메인 보스 ‘심심한 에티’를 자살시켰을 때만 얻는 특수 보상. 귀머거리 토끼의 토막 난 3개 부위 중 하나다. 그녀가 가진 나머지 파츠를 모으면, 진정한 모습을 현현한다.]

“…귀머거리 토끼.”

상세창의 설명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에티를 자살시켰을 때만 얻는 보상. 귀머거리 토끼의 3개 부위 중 하나.

나머지 파츠를 모으면, 진정한 모습을 현현한다.

그 세 가지 문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머지 파츠들도 전부. 에티가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 최소 2회.

이 던전, 이 던전 마스터를 2번 더 만나야 ‘귀머거리 토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

‘자살시킨다고 반드시 이 아이템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으니… 더 많아질 수도 있고.’

어쨌든 지금 같은 페이스로는 까마득한 얘기가 되겠다.

이거, 오랜만에 ‘그거’를 할 때가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 생부터… 잠깐 땡겨봐야 하나.”

리셋 자살런.

그 생의 2차 붕괴가 어떤 던전인지 확인하고, 내가 원하던 던전이면 클리어해서 파밍. 그리고 아니면 칼자살.

그것을 반복하는 것.

‘이번에 하게 되면, 이게 세 번째던가.’

목적은 당연히 원하는 스킬, 혹은 원하는 아이템을 빠르게 얻기 위해서다.

2차 붕괴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내 공격 한 방이면 터져나간다. 그래서 회전율도 빠르고 몸도 편하다.

‘자살할 때 느끼는 고통과 공포만 제하면.’

뭐,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할 만하다. 그러니까 전에도 두 번이나 해본 전적이 있는 거고.

그게 생각보다 X같은 경험이라, 아직 두 번밖에 없는 거기도 하다만.

“일단 여기까지인가.”

더는 나 혼자 고민해서 나올 만한 단서가 없었다. 탈출을 서둘러야 한다.

지금은 이브와 함께 있으니 텔레포트도 불가능한 상태. 에티의 장난감 성이 더 붕괴하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

이브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고. 가만히 좌우로 쓰다듬었다.

“이브. 끝났다.”

“으응. 아빠, 빨리 가자아. 여기, 싫어. 기분 나빠아… 히잉.”

“…그래.”

착잡한 마음으로 대답해 준 뒤. 이브를 번쩍 안아 들었다.

푸쉬익! 신형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친다. 일대를 잡아먹을 듯한 폭우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연신 후려친다. 마치 나를 힐책하는 듯하다.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집으로 가자. 이브.”

“으응…….”

그사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중랑구와, 인근 피해 지역구을 빠르게 벗어났다.

겸사겸사 이번 붕괴의 인명 피해를 대충 추산해 봤다.

‘현자의 눈.’

죄다 무너지고 불타는 빌딩과 아파트.

불이 붙고 빗물과 섞여,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여기저기에 쓰레기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는 사람의 사체. 피와 육편. 그리고 움직임을 멈춘 거대 장난감들까지.

그 사이를 날아다니며, 폐허 전체를 꼼꼼하게 스캔했다.

[최근 2시간 내 사멸한 생명 반응: 446,988 개체]

스캔한 생물의 조건은 정확히 인간의 규격에 맞춰놨다. 그러니 패널에 뜬 이 수치들은 모두 빼도 박도 못하게 인간.

던전 붕괴로 사라진 사람의 목숨을 의미한다.

“45만 정도라.”

선방했다. 예상보다 적네.

귀환하는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 * *

이세라의 칵테일 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단숨에 이변을 직감했다.

“…헤에, 엄청 조용해. 아빠아.”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브가 먼저 위화감을 입 밖으로 냈다.

술집 안은, 지나치게 적막했다.

‘현자의 눈.’

스르릉.

눈동자가 마력에 둘러싸인다. 시야가 창백한 푸른빛에 휩싸인다.

“…흐음.”

점포 바닥 전체를 유심히 살폈다.

스르륵.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겹치고 겹쳐, 바닥 위로 뭉게뭉게 떠오른다.

‘누군가 다녀갔군.’

나와 이브, 수아와 이세라가 아닌 누군가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현자의 눈 스캔 범위를 좁힌다. 지금 상관없는 족적을 지우고, 가장 마력의 잔향이 짙게 밴 것들만 남긴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이세라가, 찾아온 누군가와 같이 나갔다.’

그러나 보폭이 일정하다.

저항흔도 없다. 끌려간 것은 아니다.

최면. 세뇌. 혹은, 제 발로 방문자를 따라나섰다.

“역시.”

나는 가만히 중얼거린다.

어제 자기 전. 이상한 낌새를 보였던 이세라가 뇌리를 스친다.

“하.”

후회해도 어쩔 수 없지만, 후회가 드는 걸 어쩔 도리는 없다.

다만 안일했던 나 자신을 뒤늦게 비웃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거짓말이었냐. 이세라.”

이세라는 어제 끝까지 미래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자기가 죽는 미래를 벗어나서, 다시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일 것이다.

‘대충 예상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찾아온 무리들의 정체도 짐작된다.

레드 스컬이다. 그놈들이 결국 내 예상대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세라를 강제로든 자발적으로든, 데려가 버렸다.

“목적은, 이세라뿐인가?”

그래. 수아.

수아는 지금 어디에 있지.

‘현자의 눈……!’

황급히 발자국 스캔의 조건을 교체했다. 수아의 작은 족적만이, 시퍼런 바닥에 그림자처럼 눌어붙었다.

경로를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여기.”

술과 각종 음료가 잔뜩 꽂혀있는, 카운터 너머의 커다란 선반. 그 앞에서 발자국이 부자연스럽게 끊겨있었다.

드르륵. 나는 꽂혀있던 술 중 몇 개를 뽑았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였나.”

순서가 중요하다.

진. 토닉 워터. 그리고 럼.

그녀가 항상 내게 대접했던 칵테일들. 진토닉과 라임 모히토의 재료들이다.

‘뽑아내고… 여기. 바닥을 한 번 밟으면.’

쿠르르르! 선반이 회전한다.

그리고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를 드러냈다.

“…….”

비스듬한 계단이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통로는 굉장히 어둡다. 하지만 익숙하기에 별 지장은 없다.

“헤에. 아빠, 이거 뭐야! 멋있어!”

문득 이브가 옆에서 흥미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원래 애들은 이런 비밀기지에 환장하는 법이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스킬 발동: 라이트 볼]

피이잉!

나는 발광 마법을 사용해 가볍게 빛의 구체를 하나 띄우고, 이브의 손을 잡아주며 통로로 내려갔다.

“다음 생에. 혹시나, 저를 찾아오게… 되면요. 이 비밀 방을 안다고, 꼭 이 말을 전해주세요.”

치지직.

어둠 속을 걷는 와중. 라디오 노이즈 같은 것이 상념을 어지럽힌다.

기분 나쁜 노이즈가, 죽어가는 이세라의 목소리를 드문드문 귀로 흘려 넣는다.

“그러면. 저는… 아마, 단박에 당신을 믿을 거예요. 제가 진짜진짜, 제일 좋아하는 친구한테도, 말 안 한… 비밀이거든요.”

통로 끝.

육중한 철문 하나가 통로를 가로막고 있다.

보안장치가 있다. 비밀번호 입력판이다. 나는 손이 기억하는 대로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아주아주 좋아했었다는 걸, 다음 생의 나도 곧바로 알 거예요.”

“499826.”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의 나열이다.

그렇기에 이세라 주변에선 아무런 힌트도 찾을 수 없다.

오직 이세라 본인과, 전생의 이세라에게 직접 들은 나.

세상에서 둘만이 이 번호를 안다.

“… 꼭, 이 방을 안다고. 다음 생의 저한테 꼭, 말해줘야 해요……?”

그 생의 이세라가 남긴 유언이었다.

이게 벌써 몇 백 회차 전 일이었지. 결국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지킨 적 없다.

그건 이번 회차만 해도 그렇다.

나는 이번 회차 내내, 이 방의 존재를 아는 척조차 안 했다.

“싫다.”

나는 그때 분명히 거부했다.

유언을 남기는 이세라 앞에서. 그 생의 이세라에게 내 의사를 똑똑히 밝혔다.

“다음 생의 너는 지금 네가 아니야. 나한테는 그냥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해둘 거다.

남의 감정과 인생을 네 맘대로 조종하려 들지 마라.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자 이세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죽었다.

“… 당신이 그렇게 말해줄 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했던 말이 왜 그녀를 웃게 했는지.

뭐, 나 따위가 깊게 생각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 어쨌든 결과가 좋다면 그만인 법이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다. 이세라.’

수아의 목숨 앞에선 어떤 맹세도 무의미하지.

전에도 몇 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 약속을 깨도록 하겠다. 용서해라, 전생의 이세라.

그사이 잠금이 해제된 철문을 열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으읍! 읍!”

10평 정도 되는 철제 골방.

그 중앙에서 수아를 발견했다.

“우으으읍!!”

쇠사슬로 의자에 손발이 묶이고, 입은 재갈로 틀어막혔다.

그녀가 나와 이브를 보며, 절박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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