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6)>
이브가 먼저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엄마아!”
이브는 포박된 수아를 향해 아장아장 달려갔다. 그녀의 다리에 철썩 붙어, 안쓰러운 듯이 올려다본다.
꾸드득. 나는 손을 수아 쪽으로 내뻗고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스킬 발동: 피직스 그랩]
파가각!
수아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 재갈, 그리고 의자까지. 일거에 산산조각 났다.
마치 거대한 거인이 찌부러뜨리듯이. 수아를 피해서, 정확히 구속구들만 박살 낸 것이다.
“푸하아! 하아, 오, 오빠……!”
재갈이 풀린 수아는 가장 먼저 격해진 숨을 가다듬었고. 이내 나를 불렀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수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가 파들파들 떨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어, 언니가… 세라 언니, 그년이, 저희를 배신했어요!”
나는 수아의 팔을 부축해 주는 한편. 비밀방을 빠져나가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수아는 내 품에 기대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그, 그 나쁜 여자가!”
수아 입장에서의 증언은 대충 이랬다.
내가 던전 붕괴를 막으러 나간 뒤 얼마 후. 평소처럼 불안 속에서 나의 귀환을 기다리던 도중.
일련의 사람들이 주점 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쾅쾅쾅!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 같은 문밖의 무리들을 보며. 이세라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별안간, 수아를 그 비밀방에 처넣고 포박해 버렸단다.
“미안. 사실 너랑 정용 씨를 좀 속였어.”
우리는 속은 거였다.
이세라. 그녀의 정체는 무려 빠밤. 인신매매단과 거래하며 사람을 팔아먹는 사특한 씨X년이었던 것이다.
“사람을 비싸게 사준다는 놈들이 있어서.”
갑자기 밖에서 찾아온 무리들은?
바로 이세라가 거래를 터놓은 인신매매단이다.
“나, 눈도 안 보이잖아. 먹고는 살아야지. 응?”
이세라는 안대를 쓰다듬고, 잔인하게 미소를 지은 채.
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세상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나쁘게는 보지 말아줘.”
그 말은 나도 부정하진 못하겠다.
9차 붕괴까지 진행되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요즘 세상이다. 충격적이긴 해도 이상할 건 없는 반전이다.
“잠깐 저 사람들이랑 흥정 좀 하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어야 돼?”
끼이익, 쿵.
이세라는 비밀방의 문을 닫고, 다시 칵테일 바로 돌아갔다고 한다.
“으읍! 으으으읍!!”
수아는 재갈을 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소리를 지르려 해봤지만. 방음 처리가 워낙 잘 돼서인지, 밖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에티와 게임 한 따까리 하고 돌아온 내가, 이곳에 찾아왔다.
“오, 오빠가 없어지는 틈을, 노린 거예요.”
수아는 나를 거의 부둥켜안다시피 한 채 울먹거렸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저를, 나, 나쁜 놈들한테 파, 팔아넘기려고……! 흐흐흑!”
수아는 인신매매단에게 팔려 갈 뻔하다가 가까스로 구조된 입장이다. 막대한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공포와 안도감이 일거에 몰려온 상태지.
반쯤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단 좀 진정하자. 수아야.”
“흑, 흐흑. 네에. 네……!”
“자. 물 좀 마시고. 여기 앉아라.”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오빠…….”
나는 수아를 테이블에 앉히고, 모포를 어깨에 씌워줬다.
그리고 그녀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등과 어깨를 토닥여줬다.
“…쯧.”
수아가 못 듣게끔, 낮게 혀를 찼다.
이세라를 떠올리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거짓말로 범벅됐던 그 여자의 면상을 말이다.
‘굳이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고 그러냐. 이세라.’
당연히 인신매매고 지랄이고, 다 개소리다.
물론 안다. 이세라의 의중은 알겠다.
‘딴에는 수아를 위해서 한 행동이겠지.’
마음을 허락했던 착한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니면 그 착한 언니의 갑작스러운 배신.
이세라는 둘 중에 후자가 충격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거나. 적어도 지금의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글쎄. 그게 맞는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이세라.’
거짓말을 싫어하는 내 입장으론 그렇다.
하지만 이세라는 예언자다. 어련히 더 나은 미래를 봤으니 그런 선택을 했던 거겠지.
존중하고, 겸허히 수용하겠다.
‘아무튼 현재로서 확실한 건…….’
이곳을 찾아온 무리들이 있다.
발자국을 봤을 때, 놈들이 술집을 수색한 기색이 없다. 이세라만 확보한 순간 미련 없이 나갔다.
놈들의 목적은 이세라. 하나뿐이다.
‘무리들의 정체는 불명.’
하지만 이세라는 그들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급한 대로 수아부터 비밀방에 피신시켰다.
그리고 이세라 본인은, 그 무리들과 함께 떠났다.
‘이런 일. 전에도 있었나?’
아니. 없었다.
있었으면 당연히 대비를 했겠지.
어젯밤 이세라와의 문답에서도, 뭔가 더 조리 있게 대답을 했겠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이번 회차.’
이브와 함께한 이후로, 여기저기서 변수가 펑펑 터지고 모르는 일이 산더미로 일어난다.
심장이 아까부터 술렁거린다. 공포인가, 불안인가? 아니면 약간은 기대감이 섞여있을지 모른다.
“…후우.”
수아는 결국 울다 지쳐 잠들었다.
나는 잠든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변수의 발생…….”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누군가의 다양한 선택들은 정말 다양한 변수를 창출해 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이건 나를 제외한 수많은 주연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조연들도 모두 포함되는 말이다.
‘전생에서 강서윤의 선택이, 본의 아니게 강수아를 죽였듯이.’
이번 생의 강서윤은 전생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강서윤은 4차 붕괴 때 집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 당한 게 있어서, 강서윤의 생체마력을 감지하는 마법을 쫙 깔아놨으니 확실하다.
‘강서윤의 접근을 원천 통제 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강서윤은 자발적으로 전생과 다른 선택을 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녀의 선택이 그녀의 의지로 변한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상황. 내가 뭔가 다른 행동을 해서 벌어진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나로선 짐작도 못할, 외부적인 환경 변화 탓일 수도 있다.
거기까지 다다르는 변수는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일일이 컨트롤하거나 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변수를 일으키는 건, 언제나 사람이었다.’
웬만한 변수들을 거슬러 보면. 그 끝엔 항상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이번도 다를 건 없을 거다. 이런 현실이 눈앞에 닥친 이유.
그것도 분명, 결정적인 트리거는 ‘사람’일 테다.
“이세라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누군가…….”
사람.
아마도, 이세라의 지인.
그것도 친한 친구.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저항 없이 따라갈 정도로 친한. 누군가.
그리고… 그래. 레드 스컬.
“…걔밖에 없네.”
한 명. 짐작 가는 이가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번 생에도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일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지금인 듯하다.
‘지금도 좀 늦었긴 하지.’
기왕이면 이세라가 멀쩡할 때였으면 좋았을 텐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
어쩔 수 있나. 설마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곤…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고. 꿈에도 몰랐다.
내가 이세라처럼 예언자도 아니고 말이다.
“…이브.”
나는 조용히 이브를 불렀다.
평소보다도 한 층 낮게 깔린 목소리. 이브는 퍼뜩, 위축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으, 으응. 아빠.”
“이번엔 좀 길다. 3시간. 힘을 빌려줘.”
“…으응.”
“이건 거래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니 딸기우유 협상은 없어.”
“아, 알아. 응.”
이브의 손을 붙잡고 출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 오라클에 걸려있는 배리어를 재차 확인한다. 인간의 출입 흔적이 다수. 그것도 꽤 강한 마력의 소유자들이다.
이미 확보했던 정보들에 더불어, 가지고 있던 확신이 더해져 간다.
“가자. 이브.”
“…응.”
나는 이브를 번쩍 들어 올려 가슴팍에 부둥켜안았다.
이브는 내 품에서 잠깐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훤히 열린 셔츠 앞섶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생명력을 한계까지 소비해, 종말의 이브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콰드득!
그녀의 쩍 벌어진 입이 내 살갗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최대 체력의 50%를 혈천갑에 환원합니다.]
쿠르르륵!
잠깐의 극심한 고통 후. 검붉은 갑주가 온몸을 감싼다.
오른손의 사복검과 왼팔의 버클러를 한 번 점검한 뒤. 나는 곧장 블러드 스트림으로 공중에 치솟았다.
‘이세라의 발자국은…….’
남서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중간에 부자연스럽게 발자국이 끊겨있다. 아마 여기부턴 날아서 갔던 거겠지.
그렇다는 건, 걸어서 갈 만한 거리는 아니라는 방증이다.
‘예상과 일치한다.’
짐작 가는 곳이 좀 더 좁혀졌다. 넉넉잡아 다섯 군데 정도.
머릿속에 떠오른 곳을 다 뒤져보겠다. 그러면, 분명 그중 하나에는 있겠지.
푸쉬익! 빗속을 꿰뚫고 신형이 쇄도했다.
* * *
서울 전역의 여기저기, 예상 목적지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탐색했다.
두 번의 실패 후. 세 번째 탐색에서 드디어 당첨이 걸렸다.
“…찾았다.”
반파되어 너덜너덜한 폐건물이었다.
본래는 대형 종합쇼핑몰이었던 거대한 복층 건물.
주변으로 나무와 철근을 엮어 만든 바리케이드가 둘러져 있었고. 육안으론 보이지 않지만 경계 마법과 배리어도 둘러져 있다.
웬만한 일반인과 저급 헌터들은 접근조차 못할 수준.
“아앙?”
“야. 넌 X발 뭐냐?”
정면엔 위병소를 수비하는 병력도 두 명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정면 위병소로 걸어갔고. 위병소의 수비병들은 나를 경계하며 고함을 질렀다.
“야. 안 들려?! 너 뭐냐고 새끼야!!”
파지직!
왼쪽의 사내가 손아귀에 번개를 응집했다.
“오지 마! X발아!”
모여든 번개가 천천히 양쪽으로 뻗어 나와 거대한 창의 형상을 만든다.
사내는 번개의 창을 내 쪽으로 위협하듯 뻗었다.
“더 이상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뒤질 줄 알아!!”
헌터였다.
별다른 무장이 없길래 혹시나 했더니. 무려 헌터가 위병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진짜 제대로 찾아왔군.’
이 정도면 확정이다.
방금 걸로 거의 100%에 가까워졌다. 여기가 내 목적지다.
‘…현자의 눈.’
두 사내의 상태창을 가볍게 스캔해 봤다.
각기 캐스터와 격투계 헌터. 왼쪽의 캐스터는 김강현, C급 헌터고. 오른쪽 격투계는 박영훈, B급이었다.
철컹! 사복검을 휘둘러 채찍 형태로 만들었다.
“3초 내에 비키면 살려준다.”
긴 말은 하지 않았다.
파지지직! 인챈트 스킬을 발동. 사복검 칼날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냥 길만 트면 된다. 그 외 행동은 전부 죽인다.”
물론 알고 있다.
놈들은 헌터다. C급만 돼도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아는 족속들.
미치지 않고서야, 생전 처음 보는 시정잡배의 같잖은 협박에 굴할 리가 없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미 알지만.
그냥 예의상 이번에도 해보는 것뿐이다.
“하. X발, 뭐 이런 정신 나간 새끼가……!”
아니나 다를까. 김강현은 코웃음 치며 곧장 뇌전의 창을 내리꽂으려 했다.
하지만 덥석! 옆에서 박영훈이 저지했다.
“자, 잠깐.”
“엉?! 뭐야, 박영훈! 이거 놔!”
“야… 저, 저 시뻘건 갑옷.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냐?”
“뭐? 빨간…….”
그제야 김강현은 내 모습을 제대로 살펴봤다.
이내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놈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부풀어 오른다.
“어, 아니… 씨, X발?”
슈르륵.
김강현의 손아귀에서 번개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 설마. 레드 저거너트?”
김강현이 중얼거렸고. 박영훈도 그제야 자기 안목을 확신한 듯했다.
놈들이 혼란스러운 듯이 제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아, 아니! 하, 하지만. 그, 그놈이 왜 지금 여기에……! 그, 마, 말이 안 되잖아!”
“그, 근데! 갑옷이 똑같아도 너무 똑같잖아!”
“그, 그, 그렇긴 한데……!”
놈들에게서 전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두려움에 찬 시선이 쏟아졌다.
‘뭐야. 안 싸우냐?’
이건 또 예상 못해본 전개인데. 내가 혈천갑을 두르고 등장한 것이 또 다른 변수로 작용했다.
놈들에게서 ‘대화’의 여지가 보이고 있었다.
“3초 내에 비키면. 살려준다.”
나는 아까의 통보를 그대로 재방송해 줬다.
초장부터 힘 빼지 않고 통과할 기회다. 아예 기선제압을 해버리기로 했다.
[스킬 발동: 수라흉인]
쿠르르르.
땅이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를 중심으로 위압적인 기류가 형성되어 휘몰아친다.
“허, 억……!”
위병소의 헌터들이 아찔한 헛숨을 들이삼켰다.
파바박! 놈들이 곧장 위병소 양옆으로 길을 터줬다. 전광석화 같은 행동이었다.
“옳지.”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놈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왼쪽의 김강현이 퍼뜩 목청을 높였다.
“자, 잠시만요!”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투구 너머로 놈을 쳐다봤다.
“뭐냐.”
김강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온몸을 떨었다. 시선만으로도 압도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저기. 여, 여기가 어딘지는… 아, 알고 계시지요? 레드 저거너트.”
“레드 스컬 아지트겠지. 아니냐.”
“아, 아뇨. 맞습니다. 호, 혹시나 해서요… 하, 하핫.”
그사이 태도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말은 엄청나게 더듬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바짝 낮추고 있다.
억지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굴욕과 수치심. 그리고… 그것을 아득히 상회하는, 막대한 동경?
‘유명해져서 나쁠 거 없다더니. 참.’
매스컴이 하도 떠들어대서, 레드 저거너트의 위용은 온 국민이 다 안다.
오버랭커들도 어쩌지 못한 던전들을 단신으로 격파한 붉은 갑옷 남자. 내가 진짜 그것임을 알아보고 김강현은 곧장 저자세를 취했다.
아니. 단순한 저자세가 아니다.
거의 숭배하는 수준. 놈은 지금 나를 우러르고 있다.
‘내 유명세가 너희들을 살렸구나. 엑스트라 A, B.’
예부터 힘의 논리로 돌아갔던 맹수집단, 헌터 협회의 떨거지다운 반응이다.
나는 냉소를 머금었고. 놈들을 빤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