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
[제77던전 ‘수라의 굴혈’의 던전 마스터, ‘악의 꽃 무르무르’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본래 붕괴해 버린 던전 게이트를 닫으려면, 해당 던전의 지배자인 ‘던전 마스터’를 죽이면 된다.
하지만 이미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게이트를 봉쇄해도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무르무르는… 그럴 일은 없어서 좋군.’
다만 던전 중엔 ‘비선형 던전’이라는 게 있다.
다수의 잡졸과 던전 마스터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평범한 ‘선형 던전’의 구성. 그러나 이 비선형 던전들은 던전을 통틀어서 던전 마스터 딱 한 명만 존재하거나, 던전 마스터가 없거나. 혹은 다수의 던전 마스터로만 구성되기도 한다.
‘최소한 잔당 처리로 귀찮진 않으니. 이번 한정으로 오히려 득 봤다.’
회귀 후 항상 첫 번째로 붕괴하는 제99던전의 드래곤들. 그리고 무르무르가 등장하는 ‘수라의 굴혈’도 거기에 속한다.
이번 게이트 붕괴에서 나온 몬스터는 던전 마스터 무르무르. 단 한 개체뿐이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파지지직!
허공을 찢어발겼던 거대한 균열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검은 안개로 둘러싸여 어둑했던 사위도 점차 제 빛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
나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며, 던전 마스터 처치 보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곧 삐빅. 특유의 전자음과 함께 패널이 떠올랐다.
[던전 마스터 ‘악의 꽃 무르무르’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스킬 ‘블레이드 아크’를 획득하셨습니다.]
패널을 읽던 내 미간이 좁아졌다.
“블레이드 아크……?”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처음 보는 스킬 같다. 나는 황급히 스킬 상태창부터 띄워봤다.
[스킬 정보]
[스킬명: 블레이드 아크]
[타입: 공격형/액티브]
[효과: 공간을 절단하여, 더 멀리 있는 적에게 원거리 참격을 가한다. 다중공격도 가능하다.]
[효력 범위: 반경 100m, 반구형 돔 형태.]
[상세: 제77던전의 던전 마스터 ‘무르무르’ 처치 시 특수 보상 중 하나. 절단한 두 공간을 임의적으로 이어붙이는 희귀한 기술로, 무르무르의 고유스킬 중 하나다.]
‘특수 보상’이라는 상세 설명이 눈에 띈다.
공간을 잘라내서 멀리 있는 적에게 참격을 가한다니. 이게 정확히 어떤 의미지.
‘블루투스 칼질 같은 느낌인가.’
글만 봐선 연상이 잘 안 되는군. 나중에 실전에서 직접 기용해 봐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처음 보는 스킬 맞네.”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스킬이 워낙 오랜만이라 놀랐다.
‘보통 스킬들은, 던전 마스터가 사용하는 스킬의 열화판을 줄 텐데.’
하지만 무르무르는 공격 스킬을 사용하는 마법사형 보스가 아니다. 공격형 스킬을 사용하는 건, 60번 넘게 싸우면서 본 적이 없다.
지금껏 이런 기술을 숨기고 있었나?
왜 나와의 싸움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지?
‘모르겠다. 그 새끼 사고방식은 종잡을 수가 없어.’
무르무르는 현자의 눈 설명도 인정한 리얼 트루 내추럴 본 광인. 말은 통하지만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괜히 생각하면 머리 아프고. 말하면 입이 아프다.
아무튼. 이제 이 폐허에 더 이상 볼 일은 없다. 떠나기 전에 월미도(였던 것)의 참상을 한번 스윽 훑었다.
“…지독하네. 아주.”
나조차 인상을 절로 찌푸릴 정도의 광경이다.
최소한 전생처럼 대폭발이 일어났으면 시체라도 안 남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박살 난 건물과 시체, 그리고 짓이겨진 피와 살점만이 가득했다.
인세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생존자도 없으니… 내 소문을 내줄 사람도 없고.’
괜히 수아의 멘탈만 더 갈려나가겠군.
여러모로 손해가 막심하다. 역시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인가.
“후우.”
수지타산을 계산하며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삐빅. 아직 패널이 한 발이 남아있었다.
[던전 폐쇄자의 이름을 만방에 알립니까?]
거기서 잠깐 사고가 정지.
나는 입을 콱 닫은 채 그 패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호.”
그래. 던전 폐쇄자 고지. 생각해 보니 이런 시스템이 있었군.
회심의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 * *
다음 날.
예상대로 월미도 사태 후, 수아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세상에. 또, 또……? 고, 고작, 이틀 만에, 어떻게 이런 일이……!”
비단 수아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전국민, 전 세계가 유례없는 혼란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미국 동부 3개 주, 일본 오사카, 중국 상하이 시, 톈진 시에서 동시다발적 던전 붕괴 발생… 경악]
[어제 자 전 세계 추산 사상자만 46만 명… 역사 이래 최대 규모 붕괴!]
[세계 각국, 비상 전시 체계 돌입… 대한민국 정부, 게이트 계엄령 선포하나?]
[어떤 거대한 재앙의 전조인가? 전문가 집중 취재!!]
세계에서 우후죽순 벌어지는 게이트 붕괴를 두고 수많은 헤드라인이 오갔다.
다양한 추측과 찌라시의 향연. 불안과 공포의 소용돌이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
“저… 잠시, 오빠네 집에 있어도 될까요?”
그리고 강수아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수아의 기분이 안 좋아질 때면 항상 이런 흐름이었다.
강서윤은 바빠서 집에 없고, 이 시국에 혼자 있긴 외롭고 무섭다. 그래서 급한 대로 나를 찾아오는 거다.
“그래. 얼마든지.”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이내 수아는 한참을 조용히 앉아있다가, 소파 위에서 곤히 잠에 들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TV를 보고 있었다.
[월미도 전역이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협회장님! 협회가 자랑하는 헌터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TV에서는 헌터 협회의 대가리인 우리 양호성 씨가 비치고 있었다. 한창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뚜들겨 맞는 중이었다.
딱 재밌는 장면 때 켰군. 끓여온 라면을 세팅하고 화면을 주시했다.
[…….]
양호성은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킨다. 설사똥 씹은 표정이다.
저 면상만 봐도 점심밥 맛이 좋아진다. 나는 미미하게 싱글거리며 라면을 빨아들였다.
[한국 헌터 협회의 게이트 붕괴 대처 능력에, 문제가 많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월미도에서 1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살당할 동안, 대책반 정예부대가 출동조차 못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게이트 대책반입니까! 그리고 게이트 붕괴는 어떤 경유로 종식된 겁니까!!]
[협회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의문. 질문. 그리고 심문.
날카롭게 가시 돋친 질문의 연쇄가 양호성을 사방에서 압박한다.
‘아무렴. 네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후르륵.
라면 국물 한 번 나발을 불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TV를 쳐다보던 시선이 살짝 가늘어졌다.
“당연히 모르겠지. 산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게이트 붕괴를 종식시킨 건 나다. 월미도의 유일한 생존자 역시 나다.
그러니 양호성은 물론이고, 헌터 협회 전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지금도 협회가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곧 양호성이 무거운 침묵을 박살 냈다.
자. 상황은 이렇게 흘러갔다. 너희는 어떻게 나올 거냐, 양호성. 그리고 대한민국 헌터 협회.
흥미진진하게 TV에 시선을 붙박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로선 헌터 협회는… 이번 월미도 사태에 대해 유의미한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이건 좀 놀라운 선택이다.
양호성이… 저 능구렁이 새끼가, 이실직고를 택할 줄이야. 그만큼 놈들도 이번 사태에 충격을 먹었다? 아니. 그렇다기엔 월미도에서 민간인이 전멸한 회차가, 이번만 있었던 것도 아니야.
‘내가 마지막에 했던 그 조치가… 영향을 줬나?’
아무튼 이런 반응은 좀 새롭다.
이번 회차는 신선한 전개가 많아서 그건 좋네.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여길 주목해 주십시오.]
파팟. 문득 화면이 전환된다.
화면 한가득, 한 줄의 텍스트가 표시되어 있었다.
[제77던전의 폐쇄자: 레드 저거너트]
양호성이 거대한 모니터에 사진 하나를 띄워놨다.
던전의 시스템 패널을 찍은 사진이었다.
[이것이, 이번 월미도 던전 붕괴를 저지한 자의 코드네임입니다.]
웅성웅성.
방청객 패널이 눈에 띄게 수군거렸다. 피식. 그 화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바뀐 전개는 저게 문제였던 듯하다.
“뭐… 급조한 이름치곤 그럴싸하지?”
레드 저거너트. 당연히 저건 나다.
이번 월미도 사태에서도 어떻게든 내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대충 히어로 네임을 즉석에서 만들었고. 그걸 던전 폐쇄자 명으로 입력해 전 세계의 헌터들에게 뿌렸다.
‘눈치채냐? 힌트는 충분히 줬는데.’
붉은색. 레드. 압도적인 힘. 저거너트.
그래서 레드 저거너트. 나름 직관적인 히어로 네임 아닌가.
쉽다 쉬워.
‘이것도 못 알아보면 실망이다. 호성아.’
만약 저들이 헛다리를 짚으면. 다음 생엔 더 직관적인 이름으로 가야 한다.
이를테면 ‘레드 아머’나 ‘빨간 갑옷 아죠시’. 어쩌면 ‘공산당 갑빠맨’이 실현돼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딴 로망 없는 이름은 너희도 싫잖아. 나도 싫어.
[아시다시피 던전 폐쇄자 알림은, 던전을 폐쇄한 사람이 원할 경우에만. 전 세계 모든 헌터들에게 일괄적으로 메시지를 발송합니다.]
양호성은 패널의 내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글자를 쳐다보는 양호성은 전에 없이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월미도에서 붕괴했던 제77던전을 폐쇄한 자. <레드 저거너트>는… 현재 자신의 존재를 세간에 어필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논문 쓰냐. 뭔 서론이 저리 길지.
양호성의 사견이 들어간 분석은 듣고 싶지 않다. 현기증 나니까 결론이나 말해라.
그런 내 염원을 들어줬음인가.
[저희는 이것이, 지난 용산 게이트 붕괴 때의 의문의 구세주. 그 ‘붉은 갑옷 남자’와 동일 인물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옳지. 양호성이 정답을 줄줄 읊었다.
아직 일말의 로망이 죽지 않았구나, 호성아. 이건 칭찬해 주마.
[이 붉은 갑옷 남자. 레드 저거너트에 대한 정보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양호성은 카메라에 대고 꾸벅, 고개를 깊게 숙였다. 대놓고 정보 구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습니다. 대한민국의 희망, 인류의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남자의 단서를 제보해 주십시오. 제보가 유의미하다고 판단될 시, 충분한 보상을 약속드립니다.]
놈이 내게 본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다. 주르륵. 현상금의 목록이 자막으로 뜬다. 그것을 끝까지 읽어봤다.
“이야. 이건… 나라도 제보하고 싶어질 정도인데.”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만큼 억 소리 나올 정도로 대단한 금전적 보상이었다.
[여러분의 협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입니다. 국민 여러분.]
놈은 그렇게 간곡한 부탁을 마치고. 카메라를 향해 재차 고개를 꾸벅 숙였다.
쯧. 나는 혀를 낮게 찼다.
“꽤 노골적으로 나오는구나. 양호성.”
이건 양호성 입장에서도 초강수다.
본인들의 이미지 실추, 무능 프레임 덮어쓰기를 감수한다. 그걸 감수해서라도 ‘레드 저거너트’의 신병과 정보를 우리가 최우선으로 확보하겠다.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확보해서. 자기들의 말로 쓰겠다… 이거겠지.’
그리고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겠다 싶으면?
최소한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죽여 버리거나. 정신계 헌터를 사용해, 세뇌를 시도하겠지. 다른 세력에 붙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수, 수아. 수아야. 아니야. 어째서. 나는, 나, 나는 이러려던 게……!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 한참 전의 전생 때.
... 실제로 내가 세뇌당했던 것처럼.
“흐.”
툭. TV를 꺼버렸다.
검게 물든 액정 안에는, 뒤틀린 비웃음을 머금은 내가 비쳤다.
“어느 쪽도 사절이다.”
너희들이랑 소꿉장난은 질렸다. 호성아.
이대로 다 뒤져버려. 아무도 필요 없으니까.
* * *
그날 저녁의 일이다.
나는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있었는데.
“오빠.”
소파에 쭈그려 앉아 TV를 보던 수아가, 문득 내게 고개를 돌렸다.
“던전은 어떤 원리로 열리고, 왜 붕괴되는 거예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칫솔질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음… 올 것이 왔구나.’
굉장히 익숙한 질문이다.
거의 통과의례 급으로 한 번씩은 꼭 나오는 대화지. 1천 번의 회차 중에 최소 500번은 반복했던 것 같다.
‘그 지겨운 내용을 또 설명해야 하나.’
솔직히 토할 것 같다. 지겨워서 숨질 것 같다.
대체 저걸 왜 궁금해하는 걸까. 헌터가 아닌 이상 알아봐야 인생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데.
‘…아하.’
나는 입을 헹구며 수아 주위를 살폈고. 곧 이유를 깨달았다. 이번엔 TV 프로그램이 문제였다.
[레드 저거너트, 그는 누구인가?]
시사 특집 방송이 한창이었다.
게이트의 연속된 붕괴가 어쩌고저쩌고, 레드 저거너트의 존재의의가 블라블라. 출연 패널들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개지랄을 피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프로를 보다가 의구심이 생긴 듯하다.
“…알아서 좋을 거 딱히 없는데.”
혹시나 싶어 소소하게 저항해 봤다.
물론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이미 알고 있다. 역시나 수아는,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배시시 웃었다.
“아아, 혹시 오빠도 잘 몰라요? 하긴, 현직 헌터라고 꼭 게이트를 잘 알라는 법은 없죠!”
“아니. 그건 아니야. 알긴 아는데.”
“어, 정말요? 그럼 알려주세요! 괜찮죠?”
“…….”
나는 거짓말을 절대로 안 하는 주의다.
그러니 모른다고는 못 하겠다.
‘근데 일일이 말해주긴 또 귀찮고.’
그렇다고 귀찮다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리면, 그녀는 100% 삐진다. 삐지면 그거 달래주는데 또 한세월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사면초가. 완벽한 외통수였다.
“너무 궁금해졌단 말이에요오. 알려주실 거죠? 네? 네에??”
게다가 수아가 말꼬리 늘여가며 애교를 섞어 부탁을 하는데. 저 간절한 시선을 거절하기도 솔직히 좀 그렇다.
제발 그 귀염성을 언니한테 5%만이라도 넘겨줘라. 수아야.
‘어쩔 수 없군.’
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고.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털썩. 그녀의 옆에 앉은 뒤 천장을 멀거니 쳐다봤다.
“설명해 줄게. 뭐가 궁금하냐?”
“아! 그러면 저 있잖아요……!”
그렇게 500번이 넘게 재방송된, 던전의 유래와 구조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