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화 (9/235)

9화

<100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꾸드득, 꾸득.

하트 기어를 타고 뿜어져 나온 피가 피부 위로 스멀스멀 움직인다.

“후우.”

이내 붉은 기운을 따라 핏줄기가 딱딱하게 굳으며, 핏빛의 갑옷으로 화했다. 변신을 마친 나는 오른손의 사복검을 길게 늘였고. 곧바로 횡으로 휘둘렀다.

“당신 같은 사람이 진짜 영웅이지 않을까. 박현우.”

내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푸화악! 수십에 달하는 오크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졌다.

“쿠에에엑!!”

“취이이익!!”

푸른 핏줄기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오크들이, 바닥에 즐비한 사람의 시체 위로 장난감처럼 나동그라졌다. 그 시체들 중에는 오크 족장 케샤쿠도 있었다.

“그… 허, 억?”

케샤쿠는 몸이 토막 난 와중에도 의문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눈알이 뒤룩뒤룩 구른다.

하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했는지, 억울한 듯이 박현우를 쳐다봤다.

“어, 아니? 이, 이 새끼가 갑자기 왜……?”

물론 박현우도 상황이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얼빠진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박현우의 시선이, 이내 내 쪽으로 닿았다.

“…아.”

그는 터질 듯이 눈을 부릅뜨고 한동안 나를 응시했다.

“붉은, 갑옷. 설마 워, 월미도의 그……?”

박현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내 소문이 헌터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난 듯하다. 전의 두 붕괴에서 뚜렷하게 목격자를 남겼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다.

“컥.”

그리고 그 순간. 케샤쿠의 입에서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부들대던 상체가 완전히 축 늘어졌다.

삐빅. 내 앞으로 패널이 떠올랐다.

[제21던전 ‘은빛 늑대 주둔지’의 던전 마스터, ‘은빛 늑대 족장 케샤쿠’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서서히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료됩니다.]

나는 박현우를 아랑곳 않은 채 그 패널을 가만히 주시했다. 어김없이 내 이름을 알리겠냐는 질문을 무시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내 삐빅. 고대하던 패널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던전 마스터 ‘은빛 늑대 족장 케샤쿠’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이템 ‘은빛 늑대의 글레이브’을 획득하셨습니다.]

파아앙!

진녹색 빛이 내 주위로 터졌다. 내 앞에는 아까 케샤쿠가 사용하던 거대한 은색 도끼가 등장했다.

“개X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들러리들이 흠칫한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쌍욕해?”

“나도 몰라. X발…….”

“우리 X된 거 아냐?”

자기들한테 화가 났나 싶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글레이브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박현우에게 던져줬다.

“가져요. 던전 클리어 보상입니다.”

“예……? 어, 으어!”

박현우는 날붙이가 날아오자 식겁하며 받아 들었다. 이내 그는 알딸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저,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저럴 법도 하다. 안 그래도 수상하고 정체 모를 존재가 적들을 단박에 쓸어버리더니. 갑자기 던전 보상을 자기한테 주는 기이한 상황이다.

나 같아도 의심하겠다.

“금도끼 은도끼. 봤습니까.”

나는 대충 변명해줬다.

“내가 사실 그 산신령입니다.”

“…뭐요?”

“착하게 사는 거 같길래. 도끼 하나 서비스 나갑니다.”

내뱉고 보니 너무 대충 변명했나 싶었지만, 이내 생각하길 관뒀다.

지금 그런 변명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글레이브를 어루만지는 박현우에게 목청을 좀 높였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거나, 아니면 최대한 여기 꼭꼭 숨어있으십쇼.”

“아, 예?”

“북문이랑 서문, 남문이 이미 뚫렸을 겁니다.”

“…아, 아아!!”

“천안 시내에 이미 오크들이 바글바글할 테니까. 살고 싶으면 도망치거나 숨으라고요.”

그렇다. 이 백화점의 입구는 우리가 지키고 있던 동문만 있는 게 아니다.

북문, 서문, 남문, 그리고 동문. 그중에서 내가 있는 동문을 제외한 모든 곳이 뚫렸을 거다. 나는 지금부터 그걸 막으러 가야 한다.

잔당 처리. 보상까지 꼬라박은 지금 시점에선, 귀찮으면서 이득도 없는 애프터 서비스였다.

“저, 저기……!”

문득 박현우가 떠나려는 내 뒤에서 목청을 높였다.

박현우는 내가 돌아보자, 꽤 절도 있게 인사를 박았다.

“가, 감사합니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끼는 이미 있는 거라서 준 겁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요.”

한 13개 정도 갖고 있지. 망할.

속으로 씁쓸하게 웃자니, 박현우가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 아니. 그게… 사,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한 건데요.”

“아.”

그쪽의 감사였군.

‘하긴. 그건 감사하긴 해야지.’

지금껏 케샤쿠가 등장한 회차에서, 일기토 3합 이상을 버틴 중대장이 하나도 없다. 내가 조금만 늦게 나왔으면 케샤쿠는 분명히 박현우의 목을 날렸을 거다.

“…그쪽이라면 더더욱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 쪽이 감사하지.

살릴 가치가 있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 덕분에 일할 맛이 났다.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냐. 같은 한 달을 999번 반복하면. 싫어도 알게 된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사십쇼. 오래오래 살길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그래봐야 한 달 안에 다 뒤질 목숨들이니, 딱히 뜻깊은 말은 아니다.

“수고.”

의문에 찬 박현우를 뒤로한 채.

푸화악! 오크 잔당들을 처리하러 백화점 밖으로 날아갔다.

* * *

또 하루가 지났다.

나는 오늘도 멍하니 침대에 앉아 TV 뉴스를 보고 있다.

[김대기 기자, 현재 천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예.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합니다.]

왜 항상 시작은 현장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걸로 시작할까. 천안 시가지가 곱창 났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인데.

그냥 인사치레 같은 건가.

[도시 곳곳에 끔찍한 시체들이 수두룩하게 널려 있는 가운데. 현재는 무너진 건물과 교량 등에서 생존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후르륵.

나는 끓여온 라면을 빨아들인 뒤. 다시 뉴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

어느새 기자의 브리핑이 끝났다.

전환된 화면엔, 헌터 협회 높으신 양반의 기자회견이 나오고 있었다.

[저희 헌터 협회에서는 총력을 다해 이번 사태의 원인 규명과,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족분들에겐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보상 조치가 취해질 것이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건립을 추진 중입니다.]

찰칵, 차차찰칵.

한마디 끝날 때마다 무수한 플래시 세례가 터진다.

높으신 양반은 잠깐 그것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내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한층 깔았다.

[또한 대한 헌터 협회가 자랑하는 10명의 오버랭커들을 상시 비상 체계로 전환할 것입니다.]

인터뷰하는 양반은 나도 아는 얼굴이다.

알다마다. 아주 이가 갈리도록 악연으로 엮여봤던 인물이지.

[공기업이나 사기업 소속, 프리랜서 할 것 없이 모든 헌터들에게, 준 계엄령 급의 비상 군비 체계를 편성하도록 계획하고 있으며…….]

헌터 협회 서열 1위 헌터.

이름은 양호성. 얼굴을 가로지르는 깊은 흉터가 인상적인 반백의 중년이다.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인터뷰 레퍼토리는, 변하는 법이 없구나. 양호성.”

한때는 저 새끼랑 연락 한번 닿아보겠다고 개지랄하던 시절이 있었지. 한참 지난 회차들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니 문득 한 기자 양반이 질문을 던졌다.

[소문의 ‘붉은 갑옷 남자’에 대해선 인지하고 계십니까?!]

흥미로운 질문. 나 역시도 이목이 집중되는 화제였다.

먹던 라면 끊고 시선을 TV에 고정했다.

[…….]

움찔. 양호성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순간 숨을 삼키는 기자들. 양호성의 표정이 굳자 두려워진 듯하다.

‘하긴. 노친네 인상이 워낙 험해야 말이지.’

그런데 꼴에 기자 정신이라도 발휘하는 것인가.

곧 여기저기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비슷한 질문이 빗발쳤다.

[이번에 사건을 해결한 것도, 용산 사태와 월미도 사태의 현장도! 그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붉은 갑옷 남자는 헌터 협회 소속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신병은 파악된 상태입니까?!]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이것 봐라?’

사건이 꽤 재밌게 흘러가는군.

예상 밖이다. 아직 회귀 초반인데, 벌써부터 사람들이 내 존재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적은 단언컨대 1천 번의 반복 중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붉은 갑옷이 눈에 띄어서?”

가능성 있다.

전번 회차들에선 검은 복면을 쓰거나, 후드를 쓰고, 광학 미채로 투명화를 하는 등. 최대한 위장한 채 몬스터를 조용히 사냥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소문의 확산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붉은 갑옷의 임팩트 때문에 소문이 더 빨리 확산되는구나.’

혈천갑이 겉모습만 보면 꽤 멋지긴 하지. 좀 다크 히어로 복장 같달까.

나는 공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에는 협회의 인체 실험의 결과물이나, 협회에서 키워낸 비밀 병기 히어로라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가요?]

아주 개지랄 났다.

인터넷의 나는 협회의 비밀 히어로가 된 모양이다.

‘직전 999회차 때만 해도… 내가 게이트 붕괴의 흑막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있었는데.’

이미지메이킹이 이렇게나 중요하군. 전대물 주인공들이 알록달록 쫄쫄이를 입고 다니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예상외의 전개긴 한데…….”

내가 볼 때 이건 나쁘기만 한 전개는 아니었다. 나는 라면을 씹어 삼킨 뒤.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예 이번엔 영웅 행세를 해봐?”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기회도 없었으니까.

‘근데 기회가 생겼잖아.’

그렇다면 굳이 안 할 이유도 없다.

영웅 행세를 한 번도 안 해봤으니, 이게 수아를 지키거나 인류 멸망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른다.

“뭐든 밑져야 본전이지.”

딱히 도움이 안 되면, 다음 회차부터 안 하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 안 그래도. 그 남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협회가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TV 속 양호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놈은 카메라를 직시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당사자께서 이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망설이지 말고 협회로 연락을 주십시오.]

[저희 대한민국 헌터 협회는, 당신에게 최고의 대우와 아낌없는 협력을 약속드릴 것입니다.]

울컥.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불쾌함에 떨다가 무심결에 한마디 읊었다.

“지랄 싸지 마라. 족 같은 새꺄.”

저 말에 속아서 헌터 협회에 도움을 청했다가, 그대로 인체 실험에 끌려간 게 몇 번째 회차였더라.

그 외에도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뒤통수 맞아 죽고. 고문을 당하고. 헌터 협회에는 쓰라린 기억밖에는 없다.

“적폐가 드글거리는… 역겨운 쓰레기 새끼들 같으니.”

그냥 쓰레기 소굴.

헌터 협회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까지. 자기 밥그릇과 잇속에 미쳐 사리분간도 못 하는 정신병자들의 동네다.

‘너희는 빨리 망하는 게 인류 평화에 이득이야. 개새끼들아.’

저 새끼들이랑 엮이면 제대로 돌아간 적이 없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속으로 양호성에게 차가운 조소를 날리고 있자니.

“음?”

문득 화면이 바뀌며, 게이트 붕괴의 현장 인터뷰가 이어졌다. 화면에 잡힌 익숙한 얼굴.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던전 마스터를 사살하고, 저에게 이 보상품을 주고 유유히 떠났습니다.]

박현우였다. 그가 ‘붉은 갑옷 남자’의 목격자로서 증언대에 서있었다.

[그 남자와 대화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 잠깐 대화를 해봤지만… 그, 뭐랄까.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목소리만 봐선 제 또래 남자 같았는데. 글쎄요. 변조된 목소리가 아니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을지도 모르지요.]

목소리 변조 같은 건 한 적 없다.

내 목소리를 듣고도 진짜 여자라고 생각할 수가 있나. 아니면 그만큼 혼란스럽다는 표현인가.

아니면 혹시,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여성성이 있었던 건가. 하와와 엣큥.

“어쨌든. 대충 알겠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TV를 껐다.

그리고 앞으로의 행동 지침을 좀 수정했다.

“베일에 싸인 다크 히어로 컨셉을 잡아볼까.”

붕괴 때마다 위기에서 모두를 구원해내고. 인류의 희망이 되어 보자.

그러려면 연출발을 좀 받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야 뒤져나가든 터져나가든, 일부러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만 등장하는 거다.

‘재밌겠는데.’

꿈 많던 소년 시절이 떠오른다. 다음 붕괴가 좀 기대되기까지 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딩동―

혼자 히죽거리고 있자니, 문득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인터폰 화면을 흘깃 봤다. 강수아가 보였다.

어두운 표정으로 복도 한복판에 서있었다.

“…뭐야?”

나는 거대한 의문을 느낀 나머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런 적이 전에도 있었나?

‘아니. 없었는데.’

3차 붕괴가 끝나고 강수아가 나를 찾아온 적.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 그녀는 지금 두려운 마음에 방에 칩거하거나, 퇴원한 언니와 함께 멘탈 케어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지금 이 상황. 1천 번의 반복 속에서도 처음 겪는 일이다.

‘처음… 겪는 일?’

그 문장 자체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만큼 오랜만에 겪는 새로움이었다.

“이럴, 수가.”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일면 공포까지 들 정도로 심장이 술렁였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달려갔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냐. 수아야.”

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강수아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이내 힘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빠. 붉은 갑옷의 남자라고… 아시죠?”

갑자기 명치를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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