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29)
  • <120화>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샌 루카스는 퀭한 얼굴로 출근했다. 아레스가 루카스를 보고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정도로 몰골이 좋지 못했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대체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잠을 좀 못 잤어.”

    “그런 것치고는 너무 초췌한데?”

    루카스는 제 앞을 서성이는 아레스를 쫓아내며 저번에 못다 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조금 몽롱했지만,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밤을 샐 정도로 지겹도록 아리스타만 생각했는데도 다시금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아리스타의 얼굴이 떠올랐다. 루카스는 제 얼굴을 세게 치며 정신 차렸다.

    아리스타를 머릿속에서 쫓아내기 위해 루카스는 일에만 매진했다. 덕분에 아레스는 오늘따라 일의 진전이 빠르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하루가 무난하게 지나갔다. 10분 뒤면 오후 6시. 앞으로 10분만 더 있으면 퇴근이다.

    오늘 아리스타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그녀는 단 한 번도 집무실을 찾아오지 않았다.

    ‘좋아, 퇴근까지 이대로만…….’

    “아레스, 여기 있어?”

    희망을 가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아리스타가 나타났다. 루카스는 곧바로 책상에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박았다.

    리디아 남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어쩐지 오늘 하루 조용하다 싶었다.”

    아레스가 기이한 루카스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고.

    “세상에! 오라버니,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아리스타는 루카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며 그의 이마를 살폈다.

    가까운 거리에서 아리스타를 보게 된 루카스는 눈을 크게 떴다. 하루 종일 생각했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

    제 마음을 제대로 자각하고 나니 아리스타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왜 아리스타를 동생으로만 여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순간 루카스의 얼굴이 폭탄이라도 된 것처럼 붉게 변해버렸다. 아리스타는 어디 아픈 거 아니냐며 안절부절못했다.

    “괘, 괜찮아… 딱히 아픈 곳은 없어…….”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아레스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아, 맞다.”

    아리스타는 루카스와 아레스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아레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루카스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당분간 일은 없어. 푹 쉬어.”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아리스타한테 맡긴 일이 모두 마무리된 모양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에 아리스타가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최근에 네 약혼 얘기를 하시던데. 알고 있어?”

    가벼운 걸음으로 루카스에게 다가가려던 아리스타는 그만 멈추고 말았다. 동시에 아리스타와 루카스 모두 굳은 얼굴로 아레스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루시아랑 헤르윈이 결혼하려는 거 보고 자극을 받으셨나 봐. 너도 슬슬 약혼이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요즘 어머니랑 같이 약혼자를 물색하시던데?”

    “그게 무슨…! 너 약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 약혼 얘기가 나와?!”

    “내 말이. 1년 정도는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뭐, 수고해라.”

    아레스가 측은한 눈빛으로 아리스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느닷없이 맞이한 폭탄에 아리스타는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만큼이나 루카스도 큰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아리스타가 누굴 좋아하고를 떠나서 이러다가는 그녀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한편 두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는 아레스는 갑자기 루카스에게 다가가더니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루카스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뭐야?”

    “연극 티켓이야. 너 요즘 만나는 여자 없냐?”

    이번엔 아리스타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갔다.

    루카스가 아무런 말도 못하자 아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없는 모양이네? 웬일이야? 쉴 틈 없이 여자를 만나던 놈이?”

    “야, 넌 무슨 내가 바람둥이인 줄 알아? 내가 언제 쉴 틈 없이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고……!”

    “너 애인이랑 헤어지면 두 달도 안 돼서 새 여자 만나고 그랬잖아. 그 정도면 쉴 틈 없이 만나는 거지.”

    반박하려던 루카스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자신이 그렇게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건지 생각했다.

    “너 헤어진 지 벌써 두 달은 넘었어. 그래서 진작에 만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럼, 티켓을 준 게…….”

    “오랜만에 기분 전환이나 하라고. 근데 만나는 사람이 없다면…….”

    아레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싱긋 웃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던가!”

    루카스와 아리스타 모두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루카스는 이것을 어떻게 아리스타에게 건넬지 궁리하고 있었고, 아리스타는 그가 이번에 또 다른 여자와 만나는 걸 생각하니 착잡해졌다.

    “6시다! 퇴근 시간이니 난 이만 간다!”

    6시 종이 울리자마자 아레스는 부리나케 웃옷과 가방을 챙겨 들고 문밖을 나섰다. 오늘 황녀와 데이트가 있다고 신나던 것이 떠올랐다.

    얼떨결에 둘이서만 남게 된 집무실에서 아리스타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주저했다.

    루카스 손에 있는 티켓이 신경 쓰였다. 볼 사람이 없다면 자신과 같이 가지 않겠냐고 가볍게 물어볼 수도 있을 텐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헤르윈이 먼저 다가가라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아리스타는 끝내 손을 밑으로 내리며 발을 돌렸다.

    “오라버니, 난 이만 갈게. 오늘 수고 많았…….”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려던 것도 잠시 루카스가 책상을 짚으며 서둘러 아리스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리스타, 오늘 시간 괜찮아?”

    “……어?”

    “시간 괜찮으면 나랑… 연극 보러 갈래?”

    아리스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란 그녀를 보고 루카스는 서둘러 사족을 덧붙였다.

    “그,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나 혼자 보러 가기엔 조금 그래서 그래. 보니까 오늘 하는 연극 같은데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깝잖아.”

    핑곗거리를 대기는 했지만, 루카스는 이것을 기회 삼아 아리스타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단순히 알고 지내던 오빠 동생 같은 사이가 아니라 남녀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루카스의 마음은 아직 아리스타에게 닿지 않았다.

    아리스타는 그저 그가 선의로 자신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아리스타는 기뻤다. 그게 선의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먼저 제안해준 것이니까.

    밑으로 내려가 있던 아리스타의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루카스의 귓볼도 달아올랐다.

    “응, 좋아. 같이 가자.”

    루카스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내 그는 내적 환호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11월 중순. 어느덧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에 다다를 시기. 루시아는 어머니인 줄리안과 페네우스 공작부인인 스칼렛과 함께 한 의상점에 들렀다.

    오늘은 주문을 넣었던 웨딩드레스가 드디어 완성되어 시착을 하는 날이었다.

    벨 디자인의 드레스로, 허리에서 풍성하게 떨어지는 라인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루시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착용했다. 가슴 부분이 조금 조이고, 허리 부분은 남았다.

    디자이너가 그 부분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어디 또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신가요?”

    “네, 없어요.”

    “움직이면서 불편한 곳이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디자이너가 싱긋 웃으며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직원들이 커튼을 걷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들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줄리안과 스칼렛 모두 감격한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가!”

    그들은 감탄과 칭찬을 퍼부었다. 루시아는 부끄러움에 볼을 붉히며 힐긋 옆을 돌아봤다. 벽에 걸려있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확실히 따로 치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처음 웨딩드레스를 골랐을 때, 너무 유명한 디자이너와 비싼 가격에 화들짝 놀랐지만, 스칼렛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빠르게 결제를 진행했다.

    만약 돈을 조금이라도 아낀답시고 다른 드레스를 골랐다면 지금만큼의 만족감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훌쩍-

    그때, 코를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면을 보니 줄리안이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 왜 우세요.”

    드레스가 망가질까 봐 차마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루시아를 대신하여 스칼렛이 줄리안을 달랬다.

    “이제 정말 네가 내 품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결혼해도 저는 영원히 어머니 딸일 텐데요, 뭐.”

    “그래도 조금 서운하구나…….”

    “나도 그 마음 이해해. 너무 걱정하지 마, 줄리안. 내가 정말 딸처럼 루시아를 보살필 테니까.”

    스칼렛은 어느새 줄리안의 어깨를 감쌌다. 줄리안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우는 어머니를 보고 있으니 어느새 루시아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여기서 울음을 터트렸다가는 자신도, 줄리안도 붕어눈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루시아, 떨리지는 않니?”

    어느새 진정한 줄리안이 루시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결혼식은 12월 1일. 이제 보름 정도만이 남았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기대가 더 커요. 정말 어렸을 때부터 바라왔던 일이니까요.”

    헤르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부터 그의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지금에 오기까지 많은 상처도 받고, 그를 놓아주려고까지 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이었다.

    “저 정말 행복해요, 어머니!”

    루시아가 방긋 웃었다. 그런 루시아를 보자 처음 그녀를 낳고, 키우면서 봐왔던 딸아이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줄리안은 눈을 꾹 감으며 싱긋 웃었다.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단다.”

    눈물과 훈훈함 속에서 드레스 시착을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방에서는 헤르윈도 결혼식에 입을 예복을 입어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루시아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스칼렛이 그런 건 결혼식에서 봐야 한다고 막아섰던 터라,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골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제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헤르윈은 생각을 멈추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네이비, 베이지, 화이트 등 여러 턱시도가 있었지만, 가장 깔끔한 검은 턱시도를 골랐고, 검은 바탕에 금수가 들어간 나비넥타이를 맸다.

    일반 정장과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예복이라고 생각하니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헨리, 어때?”

    헤르윈의 상태를 봐주기 위해 헨리가 금쪽같은 주말을 반납하고 이곳에 따라왔다. 책을 보고 있던 헨리가 감탄사를 보냈다.

    “오, 괜찮은데? 옷이 날개라더니. 이제야 좀 새신랑 같다.”

    “큼, 그래? 루시아가 좋아하려나?”

    “응, 좋아하고도 남겠어.”

    만족스러운 답변에 헤르윈은 디자이너에게 소매 기장이 조금 짧다는 것을 알려주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헨리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하아아-

    헤르윈 입에서 짙은 숨이 나왔다.

    “떨려?”

    헨리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소파 뒤로 머리를 젖힌 헤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 튀어나올 것 같아.”

    “아직 결혼식까지 보름이나 남았는데 뭘.”

    “그래, 보름밖에 안 남았지. 하아, 얼른 루시아가 내 부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루시아의 성이 페네우스로 바뀌는 상상을 하자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피식피식 웃던 헤르윈은 팔랑- 하며 책을 넘기는 소리에 헨리를 흘긋 쳐다봤다.

    “헨리.”

    “응?”

    “넌 정말 괜찮은 거냐?”

    헨리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저와 똑같은 붉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 루시아 좋아한다고 했잖아.”

    한창 루시아가 베른과 만나고 있을 때, 헨리가 제게 난동을 부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시아와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그때 그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으니까.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헨리가 얼굴을 굳히다가 피식 웃으며 헤르윈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말을 믿었어?”

    “……뭐?”

    “당연히 거짓말이지! 하도 형이 답답하게 굴길래 장난 좀 친 거야.”

    “하지만, 너 분명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 왔다고…….”

    “어렸을 때 좋아했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누구나 다 겪는 일이잖아. 그리고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난 누나 안 좋아해. 좋아한다면 대서특필 감 아니야? 친형의 부인을 마음에 품다! 금단의 사랑!”

    헨리가 한 편의 연극을 하듯 목소리를 높이자 헤르윈은 떨떠름했다. 굳어 있는 헤르윈을 보고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만약 정말로 누나를 좋아하면 어떡하려고.”

    헤르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헨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너 어디가!”

    “화장실.”

    바로 복도로 나온 헨리는 문을 닫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티 나진 않았겠지.”

    사실, 헤르윈에게 했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조금은 루시아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 분수를 잘 알았다. 그녀의 곁엔 자신이 아니라 헤르윈이 어울린다는 것을. 짐짓 얼굴을 굳히던 헨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쭉 펴며 건너편에 있는 문을 바라봤다. 

    금세 문에서 시선을 뗀 헨리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그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