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흐흐흥~ 흐흥~”
크리스틴이 코를 흥얼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화창한 날씨에, 선선한 바람, 그리고 녹음이 푸르른 오늘.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늘은 바로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맞선 날이었다.
크리스틴은 현재, 맞선을 보기 위해 마차를 타고 있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그러니까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던 그날 저녁. 아버지로부터 맞선 상대가 정해졌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요? 이번엔 누구예요? 좋은 상대인 건 맞죠?’
‘허허, 진정 좀 하거라. 내가 아무렴 이상한 놈을 네 상대로 정해주겠니.’
디오레스 백작은 마냥 들뜬 딸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불과 며칠 전에 약혼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도망을 가던 제 딸이 맞는지, 신기했다.
마음을 바꾼 이유가 친구의 약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루시아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상대방 측에서 먼저 우리에게 서신을 넣었단다.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어머, 정말요?’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그래서 그쪽에선 하루빨리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넌 어떠니?’
‘저는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아니, 제 일정을 뒤로 미뤄서라도 빨리 볼게요!’
‘하하, 그렇다면 너도 긍정적인 것으로 알고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으며.’
그렇게 속전속결로 이루어져 반나절 만에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왔고, 결국 이틀 뒤인 오늘 약속을 잡게 된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으려고 아버지에게 매달렸었지만, 어째선지 아버지는 아무런 언질도 해 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가 보면 알 게다.’
같은 의미심장한 말만 할 뿐.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지인들 중 예상 후보를 쭉 줄 세워 봤었다.
그럼에도 어떠한 힌트도 없었기에 상대방을 찾아내는 게 힘들었다.
“아가씨, 도착하셨습니다.”
마침 목적지에 도착했다. 크리스틴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앞에는 요즘 제일 잘나가는 카페가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며 크리스틴은 카페에 들어섰다.
입구에서 봤을 때 적당히 눈에 띄는 곳에 자리를 잡고 상대방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상대방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에 가면 제시간에 상대방이 나타날 게다.’
디오레스 백작이 그런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약속시간까지는 5분가량 남았다. 크리스틴은 회중시계를 가방에 넣으며 손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성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하녀의 도움을 받아 새벽부터 치장했다. 덕분에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요 근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아리스타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며 상대방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2분 정도 흘렀을까,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아리스타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봤다.
20대 초반으로 추측되는 말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무언가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크리스틴 쪽을 보며 얼굴을 활짝 폈다.
혹시 자신의 맞선 상대일까 싶어 크리스틴은 긴장했다.
“여기-!”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맞선 상대가 맞는 것 같아 크리스틴도 덩달아 손을 올렸다.
“네, 제가 바로-”
“자기야, 왔어?”
말을 다 잇기 전에 남자가 크리스틴을 지나치며 뒤에 있는 한 여인에게 다가갔다.
착각한 것이다.
급 부끄러워진 크리스틴은 황급히 손을 내리며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딸랑-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휩싸인 크리스틴은 미처 듣지 못했다.
‘아아, 정말 창피해요!’
부끄러움이 수치심으로 변하던 찰나, 크리스틴 옆으로 그림자가 졌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
핏줄이 솟은 곧은 손과 정장을 소화한 옷태가 환상적이었다. 의도치 않게 몸부터 보게 된 크리스틴은 점차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일단, 몸은 합격…….’
혼자 점수를 매기던 때에 익숙한 얼굴을 보고 크리스틴이 딱딱하게 멈춰 섰다. 이내 크리스틴의 실눈이 크게 떠지며 유리 구슬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브라이언?”
“안녕, 크리스틴.”
오랜 친구에게 몹쓸 생각을 한 것 같아 당황하던 것도 잠시, 바로 정신 차린 크리스틴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 보네요.”
브라이언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혹시 약속이 있어서 온 건가요?”
“응, 맞아.”
“아, 그래요? 그러면 누구를…….”
아리스타는 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브라이언이 크리스틴의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다.
잠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멈칫했던 크리스틴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맞선을 보기로 했습니다. 곧 있으면 상대방이 올 거예요. 브라이언도 따로 약속이 있다고 하셨으니 자리를…….”
“그래서 여기 앉았잖아.”
“네?”
“오늘 내 약속 상대가 바로 너라고.”
크리스틴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브라이언이 지금 농담을 하는지 살폈다.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고 브라이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입술을 꾹 다물며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리스틴 디오레스 영애.”
“……어?”
크리스틴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제 이름은 브라이언 체르시스. 오늘 크리스틴 양의 맞선 상대입니다.”
크리스틴의 입과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 모습을 본 브라이언은 싱긋 웃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루시아는 가족들과 함께 페네우스 공작저에 도착했다. 어젯밤에 하일이 도착해 아그네스 일가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초청한 이유는 뻔했다.
“한두 번 본 얼굴도 아닌데 막상 이런 자리에 오니 긴장되는구나. 지금, 내 모습 괜찮니?”
줄리안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옆에서 소매의 단추를 채우던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 충분히 아름다우셔요. 그러니 긴장 푸세요.”
“그,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루시아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가족을 쳐다봤다. 루카스가 줄리안의 긴장감을 덜어주고는 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봐서는 그 역시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버지.’
어젯밤부터 입 한 번 열지 않은 요한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페네우스 공작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워낙 루시아를 아꼈기에 딸이 결혼하는 것이 서운한 건가 싶다가도 아직도 헤르윈을 인정하지 않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에게 헤르윈과 결혼할 거라고 말한 다음부터 요한이 반대를 한다거나 결혼에 대해 입을 연 적은 없었다.
요한의 눈빛이 다시금 가라앉기 시작하자 루시아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아버지, 긴장되세요?”
짐짓 놀라던 요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긴장하실 것 없어요. 헤르윈에게 들었는데 공작님과 부인께서도 저를 반기신대요. 그러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
“네.”
요한은 조금 쓴웃음을 짓다가 제 팔에 올려진 딸의 손을 두드렸다.
“페네우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문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헤르윈이 서 있었다. 그는 장난기를 쏙 빼고 진지한 태도로 정중하게 아그네스 일가를 맞이했다.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아주 잠깐 눈웃음을 지었지만 말이다.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요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쪽으로 오세요. 모두 기다리고 있답니다.”
헤르윈을 손을 내밀자 루시아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붙잡고 나란히 걸었다.
그 뒤를 아그네스 일가가 따랐다.
“이렇게 보니 너무 잘 어울린다, 그렇지?”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그 어리던 녀석들이 어느새 저렇게 다 크다니.”
줄리안은 루시아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헤르윈을 보고 그간 서운했던 감정이 모두 사르륵 녹아내렸다. 진작에 그를 인정한 루카스도 과거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요한만은 웃음기를 지운 채 무감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식당 입구에 도착했다.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 너머로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하게 꾸민 식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식당에는 페네우스 일가가 있었다. 하일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스칼렛과 헨리가 있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아그네스 일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백작. 그간 잘 지냈소?”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저는 그간 잘 지냈죠. 공작님은 요즘 어떠셨습니까.”
“줄리안! 오랜만이야!”
“어머, 얘도 참. 우리 지난주에 한 번 봤잖아.”
하일과 요한, 그리고 스칼렛과 줄리안이 인사를 나누었고, 그 옆으로는 자식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세상에, 헨리라고? 진짜 몰라보게 컸구나, 너.”
“형이… 이렇게 작았던가?”
어느새 헤르윈의 키를 따라잡은 헨리가 자신보다 작은 루카스를 보고 떨떠름해 했다.
하지만, 곧 심통 맞게 변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보였다.
“오랜만이야, 형. 우리 둘이 이렇게 만나는 건 거의 몇 년 만이지?”
“한 3년은 넘은 것 같은데? 이야, 그런데 봐도 봐도 놀랍다. 예전에 내 품에서 오줌 싸던 놈이 이렇게 크다니…….”
“혀, 형!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제 흑역사가 탄로 나자 헨리가 서둘러 루카스의 입을 막았다. 헨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헤르윈처럼 커졌다고 해도 이 중에서 막내인 것은 변함없었다.
루카스와 헤르윈, 그리고 헨리를 쳐다본 루시아는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10년 전만 해도 다들 꼬꼬마였는데 시간이 참 빠르게 흘렀다.
“자, 모두들 인사를 나누었으면 자리에 앉도록 할까요?”
분위기가 더 어수선해지기 전에 하일이 진정시켰다. 이내 상석에 있는 하일을 제외하고 아그네스와 페네우스 일가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명목적으로는 식사 초대였기에 차례차례 테이블에 음식들이 나왔다.
본격적인 얘기를 나누기 전, 먼저 분위기와 긴장감도 풀 겸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교류를 해왔기에 어색함은 없었고, 모두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별다른 언쟁 없이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고 루시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식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디저트가 나올 때쯤 슬슬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현재, 루시아의 전 약혼자로 인해 사교계가 들썩거리고 있잖아요? 헤르윈 말로는 캐스퍼 후작 측에서 일부러 루시아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조치를 취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네, 저도 그 얘기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소문이 조금 사그라들면 결혼식을 올리는 게 어떨까 싶어요.”
“같은 생각이라니 다행이에요.”
지금 당장 결혼식을 올리기에는 시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양측 모두 그 점을 인지했기에 결혼식을 조금 늦추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겨우 성사된 결혼인 만큼 최대한 화려하게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렇다면 10월쯤에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3개월 남짓 남은 건데 조금 촉박하지 않나요? 아직 예식장도 잡지 못했잖아요. 웬만큼 유명한 예식장을 잡으려면 적어도 더 시간을 잡아야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혼자 살 뻔한 저희 아들을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스칼렛이 넉살 좋게 말했다. 농담이 섞이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루시아가 페네우스 가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밤하늘의 별도 따다 줄 용의가 있었다.
페네우스 공작가의 재력이라면 이 제국 내에서 못할 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줄리안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끼며 하하 웃었지만, 내심 기뻤다.
제 딸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고, 페네우스 가에서도 열렬히 반기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별다른 의견충돌 없이 척척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헤르윈과 루시아가 뿌듯하게 지켜봤다.
“그럼, 겨울에 결혼식을 올리는 거로 확정을…….”
탁-
얼추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유독 찻잔 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요한이 낸 소리였다.
“죄송하지만-”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요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결혼, 찬성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