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곡이 서서히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곧 춤이 끝난다는 것을 직감한 헤르윈은 이대로 루시아와 떨어지기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루시아와 함께하고 싶었다.
다음 곡에도 또 춤을 출 수 있도록 헤르윈은 은근슬쩍 루시아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루카스 형 만났어.”
“오빠를?”
“응, 나한테 사과하더라. 정작 사과할 사람은 나인데 형이 먼저 사과해올 줄은 몰랐어.”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짓던 루시아가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 오빠가 먼저 사과해야지. 너를 하루 종일 바깥에 세워서 아프게 만들었는데 사과도 안 하면 사람도 아니야.”
“……혹시 형이랑 싸웠어?”
평소보다 격한 루시아의 반응에 헤르윈은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아는 흥분하던 것도 잠시,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네가 형이랑 싸우다니 별일이네. 나 때문에 싸운 거지?”
“그, 그야 오빠가 잘못했으니까!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했으면 똑같이 화를 냈을 거야.”
뒤이어 변명을 했지만, 헤르윈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오직 루시아가 자신을 위해 루카스와 다퉜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 기뻤다.
“오빠가 제대로 사과한 거지?”
한편 기뻐하는 헤르윈의 심정을 모르는 루시아는 루카스의 사과에 집중했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겠지만, 혹시 루카스가 자신과 싸운 것을 모면하고자 억지로 헤르윈에게 사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헤르윈이 씩 웃으며 루시아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왜? 형이 대충 사과했을까 봐?”
“아니, 뭐… 그냥, 어땠나 궁금해서.”
루시아가 애써 딴청을 피우자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제대로 사과한 거 맞아. 진심이 아니라면, 약혼녀가 옆에 있는데도 굳이 사과할 리가 없잖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제대로 사과했다고. 그러니까 너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아니, 잠깐만 그 말 말고. 방금 전에 뭐라 말하지 않았어?”
“뭐가?”
“분명 약혼녀라고…….”
“아아, 형 약혼녀?”
루시아의 눈이 서서히 커지자 도리어 헤르윈이 당황했다.
“……혹시 형한테 약혼녀 생긴 거 몰랐어?”
“오빠한테 약혼녀가 있어?!”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이 루시아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지금 루시아에겐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형이 말한 적 없어?”
“전혀! 집에서도 아무 말 없었는데? 아니, 약혼녀가 생겼는데 왜 말을 안 한 거지?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
“잠깐, 루시아 조금 진정해.”
루시아가 버둥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자 헤르윈은 루시아를 단단히 붙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눈을 부릅뜨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루카스가 한 여인과 춤추는 모습을 발견했다.
1번 정도밖에 보지 못한 루카스의 애인이었다.
“세상에, 설마 저 사람이 오빠 약혼녀야?”
“응, 맞아. 방금 전에 약혼할 사이라고 직접 말했어.”
루시아가 말도 안 된다며 경악했다. 헤르윈은 새삼 루시아가 제 가족을 많이 아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카스의 팔불출에 가려져서 그렇지, 루시아도 꽤나 루카스를 아끼는 편이었다.
“이상하다. 오빠가 약혼을 결심한 거라면 바로 부모님이나 나한테 말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없었지?”
“음… 그러고 보니 형이 조금 이상하긴 했어.”
“어떻게?”
순식간에 마주한 말간 벽안을 보고 헤르윈은 잠시 멈칫하다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뭔가 약혼 얘기를 꺼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약혼녀는 약혼 소식을 얼른 주변에 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형은 그 반대처럼 보였거든.”
“그래?”
“응.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형 약혼녀, 뭔가 꺼림칙해.”
“어떤 식으로 꺼림칙하다는 건데?”
“설명하긴 조금 힘들어. 하지만, 직감이라는 게 있잖아. 별로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더라고. 그리고 은근슬쩍 아리스타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리스타를 왜 경계하지?”
“내 말이. 두 사람이 만난 적도 별로 없을 텐데. 유독 아리스타를 의식하더라고.”
“흐음…….”
헤르윈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석연찮은 부분들이 있었다.
루카스 성격이라면 약혼이 확정되는 대로 바로 가족들에게 알렸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결혼 언제 하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그저 허허 웃으며 넘기지 않았던가.
그때는 지금 애인이랑 결혼까지 갈 생각이 없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걸. 두 사람이 약혼을 결정했단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루시아는 문득 베키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짧은 시간에 안부 인사만 한 것이 전부인지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 보는 눈이 예리한 헤르윈이 베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것 보면…….
‘별로 성격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혹시 그것 때문에 약혼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꺼내지 않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는 뚫어져라 루카스와 베키를 쳐다봤다.
그녀가 제게 몸을 맡긴 채 두 사람에게 집중한 덕분에 헤르윈은 몇 번이고 루시아와 춤을 출 수 있었다.
* * *
모든 사람이 파티를 즐기고 있을 때, 베른이 셀린느의 손을 붙잡고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루시아가 헤르윈과 춤추는 것을 보자마자 셀린느를 끌고 나온 것이다.
베른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너 제정신이야?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거야? 루시아가 그나마 이해해줘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알아. 내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알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높아지는 베른의 목소리에 셀린느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단단히 굳어진 눈매로 그를 올려다봤다.
“네가 내게서 영영 멀어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말문이 막힌 베른은 입을 뻐끔거렸다.
“나도 아그네스 영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아. 그 사람한테 내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도 잘 아는데! 네가 포기가 안 되는 걸 어떡해.”
“……….”
“하나만 물어보자. 아그네스 영애는 나랑 네 사이 알고 있지?”
“……그래.”
제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셀린느는 더욱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서로에 대한 마음이 없어도, 약혼자에게 전 애인이 접근하는 것을 두고만 볼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셀린느가 베른에게 접근해도 가만히 있었다.
베른과의 결혼을 확신하기 때문일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여유로움을 설명할 길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영애께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베른이 흠칫 떨자 셀린느는 제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른이 루시아와 약혼한다고 했을 때부터 루시아가 어떤 여자인지 찾아봤었다.
그때, 셀린느는 루시아가 오랜 기간 페네우스 공자를 짝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파티장을 나오기 전에 두 사람은 같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이 다른데 왜 굳이 약혼을 이어가려는 거야? 이건 아니야. 아그네스 영애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며! 아까 보니까 그 사람이랑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대체 왜…….”
“그래, 나도, 루시아도 서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지.”
셀린느가 말을 다 하기 전에 베른이 가로챘다. 잠시 말문이 막힌 셀린느는 뒤늦게 베른이 자신을 아직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루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둘 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어. 나는 나대로 루시아는 루시아대로 서로의 사랑을 보답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지.”
베른의 고백에 들뜨던 것도 잠시 베른의 숨겨진 상처를 보게 되자 셀린느는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약혼한 게 아니야. 그저 앞으로 함께 나아갈 배우자를 구한 거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리는 그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함께할 동반자로서 미래를 기약한 거야.”
“하지만… 이대로는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이상한 거 알아. 하지만, 이미 루시아와 얘기 끝났어.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으니 서로 공감할 게 많더라.”
베른이 루시아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전에는 베른이 루시아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는 루시아에게 마음을 품었다기보다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녀를 존중하는 것뿐이었다.
단순히 루시아에게 호감을 가진 것뿐이라면 빈틈을 파고들기라도 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 공략하기 어려웠다.
사랑이 아닌 신뢰로 쌓인 관계라 두 사람의 사이는 견고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베른이 루시아와 약혼할 것 같았다. 초조함을 넘어 공포심이 몰려오자 셀린느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정말, 아그네스 영애는 이대로 괜찮대?”
제 옷자락을 붙잡고 바싹 다가오는 셀린느를 보고 베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그네스 영애라면 우리 사정을 듣고 약혼을 파기해주실지도 몰라. 너도 아직 나 좋아하잖아……!”
“셀린느, 나는…….”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마. 내가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하더라도 네 눈빛을 못 알아볼 리는 없으니까.”
변명하려던 베른이 침음을 흘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베른은 아직 셀린느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이대로 너랑 또 멀어지고 싶지 않아. 네가 말하기 힘들면 내가 아그네스 영애에게 말해볼게. 내 단독행동으로 여겨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노력해보면 안 될까?”
셀린느가 어느새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그녀는 절실했다. 베른은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한 채 그저 셀린느를 쳐다봤다.
여름제 전, 카페에서 우연히 셀린느와 마주쳤을 때, 루시아는 베른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에게 마음이 변했다면 언제든지 말해달라는 상냥한 배려를 했었다.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루시아가 괜찮다 했으니 셀린느와 재결합하고 싶은 감정도 컸다.
하지만, 그렇게 셀린느와 함께 떠나버리면 홀로 남게 될 루시아가 걱정됐다.
사랑을 뛰어넘을 정도로 루시아가 우위에 있는가를 묻는다면 쉽게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과 같은 위치, 같은 고통을 겪은 그녀가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했다.
복잡한 머릿속에 결론을 내린 베른이 힘겹게 셀린느를 밀어냈다.
“……나도 너처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안 돼.”
“……대체 왜?”
베른을 이해하지 못한 셀린느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베른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만약 네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지금 네가 이리 나한테 다가오는 일은 없었을 거야.”
셀린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면 나는 그대로 루시아와 무사히 약혼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 네가 나를 붙잡으러 온 건 남편이 사별해서잖아? 서로의 상처를 이겨내고 함께 미래를 나아가자 다짐했는데 내 사랑만을 위해 그 사람을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일렁거리는 셀린느의 시야 너머로 자신과 똑같이 고통스러운 베른이 보였다. 베른은 고통을 감내할 만큼 루시아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루시아의 일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베른이 자신에게 올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셀린느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셀린느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다가 방금 전, 루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루시아는 헤르윈과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베른의 옆에 있을 때는 성숙하고 차분하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던 루시아가 헤르윈과 있을 때는 표정을 쉽게 감추지 못했고, 빈틈이 보일 정도로 흐트러졌으며,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었다.
게다가 분명-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어.’
베른의 말을 들어보면 루시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고, 베른과 같은 처지라 했다.
그렇다면 그녀만의 짝사랑이라는 건데. 적어도 오늘 자신이 봤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확실했다. 아니, 확실해야만 한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루시아가 베른과 헤어지고 돌아갈 자리가 있다면-
‘두 사람은 순순히 파혼할 거야.’
작은 희망을 엿본 셀린느가 베른의 손을 꼭 잡았다.
“네 말은, 아그네스 영애를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거지?”
“……응.”
“만약 영애에게 돌아갈 자리가 있다면? 영애도 영애의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는지 베른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셀린느의 말을 곱씹어 보던 그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파혼하겠지…….”
절대 파혼할 수 없다고 말하던 것에 비하면 훨씬 희망적인 답변이었다. 순간적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에 셀린느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내가 아그네스 영애랑 얘기해볼게.”
“……….”
“무작정 너랑 헤어져달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만약 내 말을 듣고 영애가 너랑 헤어지겠다고 말한다면…….”
셀린느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그땐 나랑 결혼해줘.”
품에 살며시 안기는 셀린느를 뿌리치지 못한 베른은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