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제국에는 크고 작은 여러 축제가 있지만, 그중 단연코 제일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축제는 바로 겨울에 열리는 신년회와 여름에 있는 여름제였다.
황실의 주도하에 진행하는 만큼, 전국의 수많은 귀족들이 여름제를 즐기기 위해 수도로 몰려들었다.
여름제가 시작되는 첫날. 루시아는 베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역시 올해도 변함없이 화려하네요.”
“이번엔 황실에서도 공을 많이 들인 모양입니다. 저리 많은 꽃을 들이다니. 규모가 대단하군요.”
루시아와 베른은 천천히 파티장에 들어섰다. 초입구부터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보고 심상치 않겠다 느끼긴 했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규모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머, 얼음상까지 있네요. 여름에 이리 큰 얼음은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역시 황실이네요.”
그리 느낀 건 비단 루시아뿐만이 아니었는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번 여름제의 화려한 규모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오, 이게 누굽니까. 캐스퍼 후작이로군요.”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베른에게 말을 건넸다. 사업 동료인지 베른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대화를 이었다.
“안 그래도 이번 사업에 대해 좀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은 가요?”
“네, 괜찮습니다. 루시아, 저 잠시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저는 친구들 만나러 가 볼게요.”
베른이 싱긋 웃으며 루시아의 손을 한 번 쥐고는 사내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루시아는 바로 주위를 둘러보며 아는 얼굴이 없는지 살폈다.
여름제면 황실에서 주최하는 큰 행사이니 친구들이 빠질 리 없었다.
더위도 식힐 겸 샴페인 하나를 들고 주위를 거닐던 찰나, 에단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에단!”
에단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던 루시아는 이윽고 에단의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단의 큰 덩치에 가려져 미처 보이지 않았었다.
루시아는 에단에게 다가가던 것도 잠시, 무언가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해 눈을 가늘게 떴다.
상당히 앙증맞고 귀여운 외모의 한 여인이 에단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에단은 쾌활한 성격답게 호탕히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의 웃음이 평소보다 낯설었다. 얼굴을 붉히고, 도통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애꿎은 목과 귀를 만지작거렸다.
‘설마, 좋아하는 사람인가?’
에단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또한 잘생긴 축에 속해 여자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았지만,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지 딱히 누군가와 연애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 에단이 저리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루시아는 곧바로 입을 다물며 눈치껏 뒤로 빠졌다.
“루시아! 여기 있었구나!”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가려던 찰나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는 순간 당황했다.
“뭐야. 네 약혼자는? 왜 혼자야?”
루시아에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이었다. 그들은 웬일로 혼자인 루시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잠깐 다른 사람이랑 할 얘기가 있다고 자리를 비웠어. 곧 올 거야.”
“그런가요? 어? 저기 에단도 있어요. 에단!”
루시아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크리스틴이 에단을 있는 힘껏 불렀다. 그에 에단이 이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되는데…….”
루시아의 중얼거림에 브라이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 백단인 그도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
“아아 그렇구나. 우리가 실수했네.”
“네? 뭐가 말이에요?”
크리스틴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해했다. 그때, 저 멀리 에단이 대화를 나누던 여성과 헤어지고 이곳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옆에서 브라이언이 바보 같은 놈이라며 혀를 찼다.
“얘들아. 다 모여 있었구나?”
“이 멍청아.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지. 왜 왔어?”
“뭐야. 너희가 먼저 나 불렀잖아. 왜 다짜고짜 시비야?”
“맞아요. 브라이언. 에단이 뭘 잘못했다고 면박을 줍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크리스틴이 에단 편을 들자 브라이언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 그게 아니라. 우리가 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그래. 보아하니 저 여성분께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친구들이 다투기 전에 루시아가 서둘러 중재를 하며 브라이언을 대변했다. 에단이 한 박자 늦게 루시아의 말을 이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즐거운 시간? 설마 방금 전 그분이랑 데이트 중이셨던 건가요? 세상에! 저는 그것도 모르고…….”
“거기까지 해. 그러다 쟤 얼굴 불타 없어질라.”
크리스틴이 미안하다고 호들갑 떨기 전에 브라이언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제야 에단은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렇게 티 많이 났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어, 한눈에 봐도 알겠던데?”
애써 둘러 말하려는 루시아와 다르게 브라이언은 단호했다. 루시아의 뾰족한 시선을 받고 나서야 브라이언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아, 이것 참 부끄럽네. 너희들한테 있는 꼴 없는 꼴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러울 게 뭐 있겠어요.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그동안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맞아.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야.”
“일단 축하한다. 짜식, 여자에 통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너도 사내자식이구나.”
브라이언이 어깨동무를 하며 그를 놀리자 에단이 부끄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그만큼 에단의 첫사랑 소식은 흥미롭고도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분이랑 어디까지 갔어? 데이트는 했어?”
“맞아요. 진도는 어디까지 나가셨어요? 아니, 어쩌다가 아시게 된 거예요?”
축하도 했겠다.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이 눈에 불을 켜고 본격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저번에 일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쳤어. 어디선가 모자가 날아와서 그걸 잡았는데. 레이라 영애 거더라고.”
에단은 그렇게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아직은 그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상대방이 아직 애인도 약혼자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모자를 주워준 이후로 세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고, 이게 인연이 되어 서로 안부 인사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풋내 가득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모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루시아도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때, 바로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타. 왔어?”
“방금 전에 도착했어. 무슨 얘기를 나누길래 아무리 불러도 못 들어? 쟤네들은 지금 에단 붙잡고 뭐해?”
“아아, 지금 에단이 자기 러브스토리를 말하고 있거든.”
“뭐?! 에단이? 이거 완전 특종이잖아!”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처럼 아리스타도 눈을 희번뜩 뜨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단은 쩔쩔매면서 아리스타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아, 부럽네. 너도 봄이 왔는데 나는 대체 언제쯤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에단의 이야기가 끝마치고 간질거리는 감정을 느낀 브라이언이 부러움 가득한 어투로 칭얼거렸다.
“뭐야, 너 저번에 사귀던 사람 있지 않았어?”
“그 사람이랑 헤어진 지가 언젠데. 벌써 넉 달은 넘었어.”
“어머, 네가 웬일이야? 그렇게 오랫동안 애인 안 만드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아리스타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브라이언이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쭈뼛거렸다.
“뭐… 나도 이제 슬슬 한 사람에게 정착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조금은 성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지 브라이언이 옆에 있는 크리스틴을 은근슬쩍 흘겨봤다.
“크흠, 크리스틴. 너는 무슨 소식 없어? 너도 에단 못지않게 연애에 관심 없는 편이잖아.”
솔직히 말하면 친구들 중에서 약혼한 루시아와 브라이언을 제외하고 아무도 연애를 해 본 사람은 없었다.
모두 하나같이 인물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추파는 늘 들어왔지만, 딱히 특정 상대방을 고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브라이언은 크리스틴을 콕 집어 물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가느다란 눈을 뜨며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빛냈다.
“안 그래도 저 곧 약혼할지도 몰라요.”
크리스틴의 대답에 브라이언의 뺨이 경직됐다. 순간 말을 잃은 그를 뒤로하고 에단과 아리스타, 그리고 루시아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게 사실이야?!”
“뭐야, 여태까지 상대방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잖아! 어떻게 된 일이야?”
“혹시 우리 몰래 다른 사람이랑 사귀고 있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숨기긴 뭘 숨겨요.”
크리스틴이 진정하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동안 숨을 참고 있던 브라이언이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고 크리스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면 약혼 얘기는 대체 뭐야?”
“부모님께서 최근에 약혼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 보셨거든요. 사실, 올해 초만 해도 약혼이나 결혼은 머나먼 얘기라고 생각하고, 별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근데 루시아를 보니까 너무 부럽더라고요.”
“응? 나?”
갑작스레 지목된 루시아가 얼떨떨하게 본인을 가리켰다.
“네, 루시아와 캐스퍼 후작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정략혼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저도 잘만하면 루시아처럼 좋은 남자를 약혼자로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하, 하하… 좋게 평가해주는 건 고맙지만 괜찮겠어? 나야 사정이 있어서 서둘러 약혼하는 거지만, 너는 시간이 많잖아.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깊은 관계도 맺은 뒤에 약혼해도 늦지 않을 텐데?”
“괜찮아요. 사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저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없거든요.”
“정말? 첫사랑도 없어?”
“네, 없어요.”
모두가 의외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리스틴을 쳐다봤다.
“에단도 이제 막 처음으로 사랑을 시작한 거잖아요.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뭐,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좀 신기하네. 그러면 사랑이 아니더라도 호감이나 약간의 셀렘도 느껴본 적 없던 거야?”
“음…….”
크리스틴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막 아카데미에 입학해, 지금의 친구들과 친해지던 시기.
제 자리 근처에 앉아있던 에단, 루시아, 헤르윈과 친해지고 뒤이어 브라이언과 비앙카가 무리에 합류하던 때에 크리스틴은 아주 가끔 브라이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헤르윈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뛰어난 외모인데다 능글맞고 사교적인 성격의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브라이언을 잘 알지 못하던 때에는 다정한 그에게 끌렸었다.
‘그래, 호감이라면 그런 게 호감이겠네.’
하지만, 호감이 사랑으로 변하기 전에 그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들에게 상냥하고,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마음을 접어버렸다.
일부러 의식해서 접었다기보다는 브라이언과 자신이 함께 있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크리스틴은 오랜만의 회상에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브라이언이 드물게 웃음기를 지우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코멘트할게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호감 가는 사람은 있었던 거네.”
에단과 아리스타가 크리스틴 옆에 찰싹 붙어 얼른 제대로 불으라며 칭얼거렸다.
한편 어렴풋이 브라이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루시아는 그를 쳐다봤다. 브라이언은 여전히 크리스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순간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래서 약혼한다 이거지?
문득 뒷목으로 소름이 오소소 솟으며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슬슬 파티가 시작할 것 같은데 헤르윈은 아직 안 왔나?”
“혹시 안 오는 거 아니야? 걔 맨날 이런 행사에서 빠지려고 했잖아.”
“아니야, 곧 올 거야. 지금 헤르윈이 하는 일이 있어서 조금 늦는 모양이야.”
“일? 무슨 일?”
“혹시 몬스터 말하는 거야?”
“어, 맞아. 루시아 그거 어떻게 알았어?”
에단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황실 기사단에서 근무 중인 에단은 헤르윈이 하는 일을 바로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저번에 헤르윈이 알려줬어. 말하는 걸 보면 아직 몬스터가 잡히지 않은 모양이네.”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사실, 며칠 전에 몬스터 새끼를 생포했거든.”
“몬스터를 잡았다고?”
“그런데 왜 죽이지 않고 생포를 한 거야? 몬스터는 바로 죽여야 하잖아.”
“사실 헤르윈이 바로 죽이려고 했는데 상부에서 막았어. 새끼만 잡은 거지 아직 모든 몬스터를 잡은 게 아니었거든. 상부에서는 새끼로 몬스터를 유인한다고는 했는데…….”
그보다는 처음으로 생포한 몬스터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에단이 중얼거렸다.
만약 에단의 말처럼 그런 단순한 이유로 몬스터를 죽이지 않았다면 헤르윈이 아마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눈에 훤했다. 문득 루시아는 바쁘게 일하고 있을 헤르윈이 걱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