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하루빨리 약혼식 날짜 정해야겠다. 우리 부모님도 만나 봬야지?”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하자.”
“싫어. 난 자기랑 빨리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다과 시간이 끝나고 베키가 루카스에게 엉겨 붙으며 투정을 부렸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자기 일해야 하지? 난 이만 가 볼게.”
“그래? 그러면 마차까지 같이…….”
“됐어. 자기 일 많잖아. 저, 공녀님.”
웃으며 루카스의 호의를 거절한 베키가 아리스타를 불렀다.
아리스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공녀께서 안내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마침, 하고픈 말도 있고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순순히 아리스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잠깐, 그냥 내가 데려다줄게. 아리스타도 지금 하는 일이 있고…….”
“아니야. 오라버니. 소화도 시킬 겸 내가 갈게. 그리고, 마침 나도 영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던 참이었으니까.”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베키가 음험하게 웃었다.
이내 두 여자가 자리를 떠나고, 루카스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황망하게 쳐다봤다.
“대체 저 두 사람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 언제 따로 만난 적 있던 건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드디어 약혼도 하는데 기뻐해야지! 너 오늘따라 좀 이상해.”
“그런가…….”
“베키랑 약혼하기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뭔가 조금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아레스의 질문에 루카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루카스의 시선은 베키보다도 그 옆에 있는 금발의 여인에게 쏠렸다.
한편,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거닐던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약혼이라니. 다른 남자랑 정분이 난 사람이 쉽게 약혼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군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던 건 공녀 아니던가요?”
아리스타가 걸음을 멈췄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진심으로 약혼할 생각이에요?”
“못할 건 뭐 있겠어요. 루카스라면 차기 백작은 따 놓은 당상이고, 바람 필 걱정도 없고, 착하기까지 한데 굳이 약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아리스타가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바람 필 걱정도 없다니. 이미 두 명 이상의 남자와 놀아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루카스가 걱정이라도 되는 거예요?”
“당신 같은 몰상식한 여자랑 약혼한다는데, 걱정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죠.”
“몰상식이라… 뭐 마음대로 지껄이세요.”
헛웃음을 내뱉던 것도 잠시 베키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리스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래 봤자, 내가 루카스랑 약혼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당신은 절대 루카스를 가지지 못해.”
“……….”
“당신은 루카스한테 진실을 말할 용기도 없잖아?”
서늘한 표정으로 아리스타가 주먹을 꽉 쥐었음에도 베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돌아섰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죠. 공녀, 다음번에는 저희 약혼식 때 뵙겠네요.”
베키가 웃음을 흘리며 서서히 떠나갔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아리스타는 베키가 사라지고 난 자리를 멀거니 보다가 꽉 쥔 주먹을 폈다.
손바닥에 찍힌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말할 용기도 없다고?”
아리스타가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은 패배자의 모습에서 승리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저 오만한 얼굴이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궁금하네.”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다. 계속 타이밍을 보고 베키가 빠져나갈 수 없게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뿐.
모든 고리가 완성되는 대로 루카스에게 진실을 고할 셈이다.
이대로 두 사람이 약혼하기에는 루카스가 너무나도 아까웠다. 만약 베키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두 사람이 약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짝사랑으로 끝낼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아리스타는 스스로의 다짐을 되새기며 뒤돌아섰다. 더 이상 그녀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 * *
수도 외각에 위치한 어느 한 마을.
황실 기사단과 함께 몬스터 조사에 착수한 헤르윈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하군…….”
“예상 출몰 지역에서 벗어난 곳이라 방심하고 말았습니다.”
현재 헤르윈이 있는 곳은 수도 외각 서북부에 위치한 마을. 황궁과 나름 인접한 곳에 있는 지역이었다.
지금까지 조사에 의하면 몬스터의 주 서식지는 수도 외곽에 있는 서쪽 숲이었다.
마을에 피해를 끼친 것은 농작물 외에는 없어서 주로 숲에서 서식하는 걸로 추정했는데, 이번에 단단히 허를 찔렸다.
“아무래도 영역을 옮기는 모양이야.”
“넓힌 게 아니고요?”
“넓혔다고 하기에는 최근 서쪽에선 몬스터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잖아. 분명 이 부근을 조사하면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영역을 옮긴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조사 자료를 보면 서쪽 숲에 있던 몬스터 흔적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료를 읽던 헤르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을의 집들이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특히 헤르윈이 서 있는 곳은 마을에서 쓰는 공용 창고이자, 이번에 몬스터 피해를 당한 곳이었다.
게다가 이 창고에는 마을의 식량을 보관하고 있던 모양인지 지금 당장 마을 주민들이 먹을 음식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들었다.
헤르윈은 폐가나 다름없는 창고에 들어섰다. 문으로 들어가는 의미가 없을 만큼, 창고 벽이 허물어져 햇살이 창고 내부로 들어왔다.
둘러본 결과 식량 외에 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마을의 피해는 어떤가?”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새벽 3시쯤, 굉음이 들렸다고 합니다.”
“다른 집들은 노리지 않았던 건가…….”
“예, 이 창고 외에는 몬스터가 습격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죠.”
“글쎄, 과연 그럴까?”
“네?”
헤르윈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인명 피해가 없는 건 다행이야.’
하지만, 인명 피해가 없어서 불안했다.
식량만 가져간 것을 보아, 배가 고팠거나, 혹은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몬스터 특성상 다른 집에 쳐들어가 사람을 납치하거나 잡아먹는 것이 더 타당할 터.
그런데 이 몬스터는 마을의 식량 창고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제 목적만 달성했다.
‘생각보다 머리가 비상한 놈이야.’
평범한 몬스터라 생각하고 접근했다가는 큰코다칠 것이 분명했다.
웅성웅성-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헤르윈은 벽에 뚫린 구멍으로 주변을 살폈다. 마을 주민들이 서성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헤르윈은 이곳의 분위기가 여타 마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건장한 사내들이 많군.”
“네?”
“저기 마을 사람들 말이야. 보통 이런 외곽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연령대가 높고, 청년들의 비중이 높지 않을 텐데. 유독 이곳만은 다른 것 같아서.”
“아아, 청년들이 많다는 말씀이시죠? 아마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바로 이 근처에 황궁이 있지 않습니까.”
황궁과 마을 연령대가 무슨 연관인가 싶어 기사를 쳐다보니 그가 말을 이었다.
“황궁 주변으로 담이 쌓여있지만, 그 너머로는 황실 소유의 숲이 있잖아요. 아마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황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거예요. 정확히는 황실 숲 관리자들이겠죠.”
“황실이라…….”
“제 추측일 뿐이지만, 저기 저 사람도 가슴에 황실 사용인 마크를 달고 있어요.”
기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건장한 체격의 한 남성이 황실 마크가 새겨진 뱃지를 하나 달고 있었다.
기사의 말이 맞다면 몬스터는 이곳에 건장한 사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사람들과의 마찰을 피한 것이다.
제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건장한 다수의 사내를 쉽게 상대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헤르윈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헤르윈을 보고 더욱 수군거리던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 앞에 그가 멈춰 서자 고개를 조아렸다.
“페, 페네우스 공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헤르윈은 손을 들어 올리며 그들을 일으켰다.
“이번 몬스터 사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협조 가능한가?”
“네, 몬스터만 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협조하겠습니다.”
황실 배지를 단 사내가 앞장서서 말했다.
“그 배지를 보아하니 황실 소속인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는가?”
“네, 맞습니다. 저는 황실 숲 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아담이라고 합니다.”
“황실 소유의 숲이 바로 이 근방이라는 얘기는 들었네. 그래도 보통 황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도성에서 지낼 텐데 왜 수도 외곽으로 나와 사는 건가?”
“도성에서 지내는 이들도 몇몇 있지만,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저처럼 외곽에서 사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저희 마을에서도 몇몇 있고요.”
“일과가 어떻게 되지?”
“보통은 3교대로 근무를 하는 편입니다. 저는 오후 4시에 출근해서 자정이 되면 돌아오죠.”
“주로 무슨 일을 하는가.”
“모두 맡은 업무가 다르긴 합니다만. 전체적인 숲 관리와 숲에서 사는 동식물의 개체 수 조절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여름제가 다가와서 외부 숲에서 더 많은 짐승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사슴이나, 여우같은?”
“네. 여름제가 이제 열흘 언저리밖에 남지 않았습니까. 사냥제도 같이 시작하니 귀족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죠.”
“그렇다면 짐승들은 인근에 있는 숲에서 보충하겠군.”
“네, 최근에 서쪽과 동쪽에 있는 짐승들을 몇몇 잡아 왔습니다.”
몬스터가 왜 영역을 옮긴 건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짐승의 수가 줄어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황실 숲은 북쪽에 위치해 있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몬스터가 짐승의 냄새를 맡고 황실 숲 안쪽까지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저, 공자님. 혹시 심각한 일인가요? 다행히 아직 몬스터가 사람들을 공격하진 않았지만, 혹시 사람들을 습격이라도 한다면…….”
생각에 빠져있던 헤르윈은 두려움에 잠긴 그의 말을 듣고 정신 차렸다.
“걱정하지 말게. 이번에 이곳에 새로운 병력을 배치할 셈이니까. 그리고, 일단 황실에 얘기를 해놓겠지만, 당분간은 출퇴근할 때 도끼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2인 이상씩 다니도록 해. 혹시 몬스터가 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네, 사람들에게도 당부해놓겠습니다.”
사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가 헤르윈이 일러준 사항을 알렸다.
“공자님! 숲 안쪽에서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마을 주변을 탐색하던 기사들이 헤르윈에게 보고했다.
그것을 듣자마자 헤르윈은 곧장 몬스터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곳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사슴 사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여느 때처럼 사슴은 기다란 나무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에 기사들이 침음을 흘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요.”
“꼭 이런 식으로 짐승을 죽였어야 하는 걸까요?”
“공자님, 혹시 이런 식으로 사냥하는 몬스터들이 얼마나 있나요?”
기사들이 사슴의 사체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때 한 기사가 헤르윈에게 물었다.
“꽤 있지. 주로 인간형 몬스터가 이런 형식으로 먹이를 취하는 편이야. 대표적으로는 오거, 고블린, 트롤, 오크 등이 있어. 하지만, 고블린은 아닐 거다.”
“왜죠?”
“고블린은 기본적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몬스터거든. 게다가 체형도 작지.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몬스터는 한 마리고, 덩치는 인간보다 클 거다.”
“저, 공자님. 그럼, 이건 뭘까요?”
조금 동떨어진 곳에서 한 기사가 바닥을 가리켰다. 그것을 보자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렸다.
“……발자국이군.”
“크기로 봐서는 인간이랑 비슷하지만, 맨발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겠죠.”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는 생소한 흔적이었다. 헤르윈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선명히 찍힌 발자국을 살폈다. 바로 근처에는 다른 몬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도 있었다.
기존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그 크기가 조금 작았다.
“설마…….”
무언가 떠올린 헤르윈의 낯이 어두워졌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간다!”
헤르윈은 갑자기 기사들을 모아 황궁으로 가기 시작했다. 말의 고삐가 서서히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새끼의 발자국이 틀림없어.’
이제야 왜 몬스터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새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끼를 가진 몬스터는 짐승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행여라도 제 새끼에게 위협이 가해질 경우 그 어느 때보다도 흉폭해진다.
어쩌면 새끼 외에 다른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몬스터의 수가 더 증식하기 전에, 인간에게 위해를 끼치기 전에 서둘러 토벌해야만 한다.
“이랴!”
서서히 가까워지는 황궁을 보고 헤르윈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