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29)
  • <80화>

    “참나… 살다 살다 이런 광경도 다 보네.”

    헨리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고이 자고 있는 헤르윈을 쳐다봤다.

    돌도 씹어먹을 정도로 튼튼한 제 형이 골골거리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루시아의 일로 화가 풀리지 않아 다시 헤르윈에게 따져보려고 잠깐 저택에 들른 것이었는데 헤르윈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 있었다.

    툴툴거리던 것도 잠시, 식은땀을 흘리는 헤르윈을 보며 헨리가 중얼거렸다.

    “……형 많이 아파?”

    “어제는 좀 열이 많이 나셨는데 지금은 내려갔습니다. 그래도 아직 열이 다 내려간 것이 아니라 상태를 지켜봐야 합니다.”

    기척에 민감한 사람이 옆에 누가 있는 지도 모르고 잘만 자고 있었다.

    괜한 반항심과 걱정이 뒤섞여 헨리는 헤르윈의 이마를 살짝 만지다가 헤르윈이 뒤척이는 것을 보고 결국 손을 거뒀다.

    “내가 있어봤자 방해만 되겠네.”

    헨리는 결국 밖으로 나섰다.

    루시아에게 그런 큰 상처를 줘놓고 멀쩡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헤르윈이 아프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형제는 형제인 모양이었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문을 조심스럽게 닫던 제롬은 헨리가 떠나려 하자 그를 붙잡았다.

    “아카데미에 가야지. 형이랑 대화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저 상태로는 제대로 된 대화도 안 될 테고. 난 이만 갈게.”

    “그러면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십시오. 마님께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어머니가 오셨어?”

    “네, 슬슬 오실 때가 됐습니다.”

    “흐음… 어머니 얼굴은 보고 가야겠네.”

    잠깐 고민하던 헨리는 기다리겠다며 복도를 벗어났다.

    그때, 정문 쪽이 소란스러웠다. ‘마님’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타이밍 좋게 스칼렛이 돌아온 모양이다.

    “어머니, 오셨어요……?”

    스칼렛을 반기던 헨리는 뒤늦게 그녀와 함께 있는 루시아를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조합에 헨리가 얼어붙었다.

    오랜만에 보는 헨리의 얼굴에 스칼렛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헨리!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혹시 헤르윈이 걱정돼서 온 거야?”

    “아뇨. 잠깐 형한테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루시아 누나랑은 어떻게…….”

    “헨리, 오랜만이야.”

    얼떨떨해하는 헨리에게 루시아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그네스 백작가에 잠깐 갔다가 루시아가 헤르윈이 보고 싶다고 하여 같이 왔단다. 그렇지?”

    “네? 네… 뭐, 그렇죠.”

    루시아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헤르윈의 상태를 보고 싶어서 따라온 건 맞지만 스칼렛의 말투가 미묘하게 다른 듯했다.

    루시아처럼 헨리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두 사람을 훑어봤다.

    가느다랗게 눈을 뜬 스칼렛은 누가 보더라도 꿍꿍이가 가득해 보였고, 쭈뼛쭈뼛 서 있는 루시아는 조금 곤란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스칼렛이 루시아에게 말했다.

    “일단 먼저 헤르윈부터 만나보겠니?”

    “형이라면 지금 자고 있어요.”

    루시아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헨리가 스칼렛의 말을 거들었다.

    “아직도 자?”

    “네. 제가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 자고 있었어요. 조금 있다가 깨어나지 않을까요?”

    “흐음, 아직 많이 아픈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금쯤이면 일어날 때가 됐다.

    “루시아, 헤르윈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랑 있을까? 헤르윈이랑 얘기할 거면 그편이 더…….”

    “저… 그냥 지금 상태를 확인해 보면 안 될까요?”

    앞서가던 스칼렛이 멈춰 섰다. 루시아는 어느새 조금이나마 띠고 있던 미소도 지운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상태만 확인하려고 온 거니 지금 보고 싶어요. 아픈 사람 무리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스칼렛이 마음대로 하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루시아를 안내해달라는 스칼렛의 말에 따라 헨리는 루시아를 헤르윈의 방까지 데려갔다.

    헤르윈의 방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눴다.

    “아카데미는 어쩌고 집에 있어? 아, 오늘 주말이라 잠깐 나온 건가?”

    “응. 형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저렇게 아플 줄은 몰랐네. 형이 침대에 누워있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어렸을 때 빼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본 적 없는데.”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헤르윈이 트라우마로 인해 힘들어했을 때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고 들었다.

    그 시절 그가 트라우마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에 가슴이 쓰라렸다.

    ‘그런 애를 내 이기심으로 더 힘들게 만들고.’

    아무리 의도치 않은 일이라고 해도 16살, 헤르윈 생일 때 있었던 일은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제 감정이 닿지 않는 것에 조급함을 느낀 나머지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터지고 나서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헤르윈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니까.

    ‘만약 헤르윈이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와의 관계는 16살에 머물렀을 것이다.

    헤르윈은 알까? 그때 그가 먼저 다가와 준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었는지.

    “……그러게.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초연한 루시아의 얼굴을 보고 헨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루시아가 아직 헤르윈을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형한테 상처받았으면 얘기하라고, 제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루시아와 헤르윈 사이에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견고한 벽이 있었다.

    가끔은 헤르윈보다 먼저 태어나는 상상을 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루시아의 옆에는 헤르윈이 아니라 자신이 있지 않았을까?

    루시아를 헤르윈에게 양보하면서 완전히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에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여기가 헤르윈 방이지?”

    어느덧 헤르윈 방까지 도착했다. 루시아가 문을 열려고 하자 헨리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저, 누나……!”

    입을 열려던 것도 잠시 말간 벽안과 마주하자 헨리의 몸이 얼어붙었다.

    루시아의 눈에는 헨리가 비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관심이 누군가에게 쏠려있는지 헨리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왜? 할 말 있어?”

    헨리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집어삼키며 루시아를 붙잡았던 손을 놨다.

    “……아니야. 그냥, 형 잘 봐달라고.”

    “그래. 한번 확인해 볼게.”

    루시아가 방에 들어가자 헨리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역시 난 형한테 안 되는 거네…….”

    옛날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라 새삼스러운 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허했다. 씁쓸해지는 입을 다물며 헨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편, 안으로 들어간 루시아는 어두운 방을 훑어봤다.

    침대 머리맡에만 불이 켜져 있어 헤르윈의 얼굴이 은은하게 보였다.

    방안에 헤르윈의 고운 숨소리가 퍼져나갔다. 색색이는 소리를 들으며 루시아는 한 걸음씩 앞으로 옮겼다.

    “헤르윈…….”

    어제 봤을 때보다 헤르윈의 얼굴이 더 수척해졌다. 한눈에 봐도 기력 없어 보이는 모습에 괜히 눈물이 나왔다.

    “미련하게 버티기나 하고. 그냥 약속 잡고 오면 되잖아.”

    루카스에게 쫓겨난 것도 속상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자신을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는 것도 속상했다.

    “내 마음을 돌리려는 거라면 성공했네. 너 보러 왔으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마음과 반대되는 투정이 계속 튀어나왔다. 괜히 투덜거리며 헤르윈을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서서히 손을 뻗었다.

    얇은 손가락이 헤르윈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열이 높지 않아서 다행이야.”

    조금 뜨끈하지만, 고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아팠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미열은 엄청난 열에 시달렸다는 증거였다.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이 마른 것을 확인한 루시아는 옆에 놓인 대야로 수건을 적셨다.

    물기를 짜던 그때, 대야 옆에 있던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자수를 보고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루시아는 천천히 손수건을 살폈다.

    “이건…….”

    헤르윈에게 마지막 고백을 했을 때, 그에게 줬던 선물이었다.

    아무 데나 두고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손수건에선 희미하게 헤르윈이 쓰는 머스크향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괜히 울컥해진 마음에 루시아는 손수건을 도로 제자리에 놓고, 물수건을 헤르윈 이마에 올렸다.

    “아리스타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이건 왜 갖고 다닌 거야? 내가 준 건 그냥 무시하면 되잖아.”

    커프스 버튼도 그렇고, 손수건도 그렇고. 헤르윈은 루시아가 선물한 것들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썼다.

    다른 이들이 선물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러니까 네가 나만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기대하게 되잖아.”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새어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정말 나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

    “그거 네 착각이야. 친한 친구가 갑자기 멀어지니 서운한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게 분명해.”

    헤르윈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혼자 앓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으니 한결 가벼웠다.

    “너도 네 마음 잘 들여다 봐.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사랑으로 오인한 건지. 그러면 너도 한결 마음이 편해질 거야.”

    헤르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 있었다. 한참 헤르윈을 보던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의 상태도 확인했으니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이곳에 있는다고 해서 헤르윈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픈 헤르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해, 꼼꼼하게 헤르윈을 덮었다.

    “……난 갈게.”

    그렇게 뒤돌아서서 가려던 찰나, 뜨거운 감각이 루시아의 손목을 휘감았다.

    루시아는 멈칫하며 밑을 내려다봤다. 루시아의 손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헤르윈의 손이었다.

    “……루시아.”

    푹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가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는 떨리는 눈으로 헤르윈을 쳐다봤다.

    헤르윈은 아직 잠에 취해있는 듯 몽롱한 눈빛이었다.

    “가지 마…….”

    절절한 목소리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한참 말이 없던 루시아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왜 가지 말라는 건데?”

    “영영 내 곁을 떠나버릴 것 같아서…….”

    이리 약한 말을 한 걸 보면 그는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루시아는 헤르윈의 손을 잡으며 결국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떠나긴 어딜 떠난다고 그래. 평생 네 친구로 있을 텐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게 싫어…….”

    뒤이어 들려오는 헤르윈의 말에 루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결국 내 옆에서 네가 사라지는 거잖아. 그런 건…싫어.”

    분명 친구를 잃는 상실감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일 텐데, 왜 이렇게 절절하게만 느껴질까?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 곁에 있어 줘. 평생… 나랑 함께하자.”

    헤르윈이 사랑과 절망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네가 내게 와 준다면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릴 거야. 너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가 되겠지.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하다.”

    헤르윈이 다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을 넣어 깍지를 꼈다.

    “아이는 너를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 그거 알아? 너 처음 봤을 때 요정이 인간계에 떨어진 줄로만 알았어. 어쩌면 너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네게 반했을지도 몰라.”

    아무리 잠결이라고 하더라도 낯부끄러운 말투성이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루시아는 꽉 잡은 손만큼, 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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