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스칼렛의 뒤론 헤르윈의 눈치를 보는 제롬이 서 있었다. 스칼렛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찌푸리며 헤르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주 꼴이 말이 아니군요. 아드님.”
“어머니께서 여긴 어떻게…….”
질문을 무시한 스칼렛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술 냄새에 스칼렛은 코를 틀어막으며 어두컴컴한 실내를 둘러봤다. 그리고 곧장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밝은 빛이 들어오자 헤르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이걸 혼자 다 마셨단 말이야?”
방 안을 나뒹구는 술병을 본 스칼렛이 기겁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다 도수가 높은 것들뿐이네.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니?”
“얼마 안 됐어요.”
“일주일 동안 방에서 나오시지도 않고, 밥도 드시지 않은 채 술만 마셨습니다. 마님.”
애써 변명하는 헤르윈의 말을 제롬이 바로 정정했다. 헤르윈의 날 선 시선이 제롬을 향했지만, 제롬은 애써 모른 척하며 스칼렛을 따라 커튼을 걷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내려왔는데 네 상태가 더 심각하구나.”
“……헨리의 연락을 받으셨군요.”
“그래! 루시아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난 네가 언제쯤 우리에게 교제 사실을 밝힐까 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전 루시아와 사귄 적 없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네가 루시아를 좋아하는 건 명백한 사실인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안 그래도 헨리도 편지에 그런 이상한 말을 적…….”
코웃음을 치던 것도 잠시, 스칼렛은 제 시선을 피하는 헤르윈을 보고 서서히 입꼬리가 내려갔다.
“……아니라고?”
“네.”
“그, 그럼 루시아는? 루시아도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니?”
“루시아는…….”
헤르윈은 입을 달싹였다. 이내 루시아와 베른을 떠올린 그가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상상 이상으로 망가진 아들의 모습에 스칼렛은 당황했다.
“저, 마님… 잠시 귀 좀…….”
그때, 스칼렛 주변을 서성이던 제롬이 그간 헤르윈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저번에 참석하신 파티에서 아그네스 영애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파티에서 돌아오신 날로부터 계속 술을 드셨으니까요.”
“흐음…….”
스칼렛은 얼추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몰골이 말이 아닌 아들을 위아래 천천히 훑어봤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는 거로 하자꾸나. 제롬, 주방장에게 가서 당장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고, 헤르윈 너는 욕실로 들어가서 씻고 나오렴.”
일주일 동안 자란 수염으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밥도 먹지 않은 채 빈속에다가 술을 들이부었기 때문에 그의 낯빛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머니, 저는 괜찮으니 그냥 돌아…….”
“다 큰 아들을 내가 직접 씻겨주리? 잔말 말고 얼른 들어가! 깔끔하게 씻기 전까진 절대 밖으로 못 나올 줄 알아!”
헤르윈이 스칼렛의 으름장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씻으러 들어갔다.
스칼렛의 말대로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고, 자라난 수염을 면도까지 한 헤르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영혼 없는 눈동자와 초췌한 얼굴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았다.
“다를 건 없지.”
제 마음을 늦게 알아챈 것에 괴로워하고, 계속 루시아를 밀어낸 걸 후회했다. 루시아가 제게서 영영 멀어졌다는 사실에 죽을 것만 같은데 이게 실연이 아니면 무엇이라 말인가.
헤르윈은 거울 속 제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머리를 대충 털며 욕실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술 냄새가 진동했던 방에는 맑은 공기가 맴돌았고, 어질렀던 방도 그새 청소를 했는지 깨끗했다.
“다 씻으셨군요. 마님께서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마침 제롬이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나타났다.
헤르윈은 순순히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밑으로 내려갔다.
제 말에 한 번쯤은 토를 달던 사람이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자 제롬은 불안했다.
“어머,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네, 당연히 잘 지내고 있죠. 정말 오랜만이에요. 공작부인.”
그때, 어디선가 스칼렛의 웃음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에 헤르윈은 불안함을 느꼈다. 걸음을 빨리해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가자 그곳에는 금발을 늘어뜨린 아리스타가 서 있었다.
“아리스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리스타가 뒤돌아봤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평범한 바지에 셔츠를 입은 차림새였다.
헤르윈을 본 아리스타는 얼굴을 구겼다.
“……너 얼굴이 왜 그래?”
헤르윈을 찬찬히 살피던 아리스타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파티장에서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번에 파티장에서 봤을 때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는데 지금은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이 홀쭉해진 것으로 보아선 식사도 제대로 못 한 모양새였다.
킁-
그때, 아리스타의 코끝에 희미한 향이 느껴졌다.
“너 혹시 술 마셨어?”
“……냄새 나?”
“많이 나지는 않는데 내 코가 워낙 좋으니까.”
아무리 권유해도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던 녀석이 어쩐 일이냐며 아리스타가 놀라워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야? 기별도 없이.”
“기별도 없기는. 나랑 애들이 너한테 얼마나 많이 연락했는데. 혹시 못 받았어?”
헤르윈이 제롬을 쳐다보자 제롬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께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친구분들께 연락 왔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요 며칠 제정신이 아니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너 얼굴도 보고, 상태도 살피겸 왔지. 마침 검도 완성됐고.”
일전에 아리스타는 헤르윈의 부탁을 받고 리디아 가문 전속 대장장이에게 검 제작을 맡겼다.
아리스타가 새로 들고 온 검을 보여줬지만, 헤르윈은 무덤덤한 얼굴로 검을 살필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대금은 치러야 해!”
“아니야, 마음에 들어. 나중에 제롬한테 말해놔. 대금을 보낼게.”
헤르윈이 고맙다며 무심하게 검을 도로 내려놓았다.
아리스타는 어리둥절했다. 자신 못지않게 검에 미친 헤르윈이 저런 반응이라니.
새 장난감을 가진 아이마냥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영 이상했다.
잠시 아리스타와 헤르윈의 대화를 살펴보던 스칼렛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비켜줄 테니 친구끼리 대화라도 나눠보렴. 그편이 너한테도 편하겠지, 헤르윈?”
“어머니…….”
“아리스타. 우리 못난 아들 좀 부탁하마.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게 더 속마음을 털어놓을 것 같구나.”
“네? 네, 알겠습니다.”
헤르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스타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제롬과 스칼렛이 사라지고 나서 헤르윈이 피곤한 안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말씀은 신경 쓰지 마. 별것 아니니까.”
“별거 아니긴. 네 몰골부터 보고 말해. 나 너 이렇게까지 망가진 거 처음 봐. 루시아는 너 이런 거 알아?”
“……….”
헤르윈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아리스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시아는 지금 제 약혼자랑 바쁘게 지내고 있겠지.”
헤르윈의 자조적인 말에 아리스타가 팔짱을 꼈다.
“역시 너 루시아랑 파티에서 무슨 일 있었지?”
헤르윈의 손이 움찔 떨렸다. 아리스타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루시아랑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헤르윈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리스타를 외면했다. 그에 질세라 아리스타는 헤르윈 건너편에 앉아, 다리를 단단히 꼬았다.
“말할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말해.”
“……….”
“아니면 루시아한테 찾아가서 직접 물어본다?”
루시아의 이름에만 반응하는 그를 보고 아리스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에 둘이 대화할 수 있게 자리를 비워줬는데 아직도 화해를 못 한 거야?”
베른과 루시아까지 다 같이 식사했던 날을 말한다는 걸 깨달은 헤르윈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루시아가…….”
“루시아가?”
“캐스퍼 후작과 입을 맞추고 있었어.”
친구의 스킨쉽 얘기가 나와 아리스타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동요를 감췄다.
“큼. 둘이 약혼할 사이이니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네.”
헤르윈은 상상한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잠깐의 침묵이 맴돌고, 헤르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겹쳐본 아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후회할 거면서 왜 진작에 잡지 않았던 거야?”
“……뭐?”
“너 지금 루시아가 다른 남자와 키스한 게 못마땅한 거잖아. 루시아를 뻔히 좋아하면서 왜 진작에 붙잡지 않았냐고. 내가 봤을 땐 루시아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루시아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그걸 말이라고… 애들이랑 너희 둘이 대체 언제 사귈지, 아니면 사귀고 있는 걸 숨기는 건 아닌지 얘기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아리스타의 말을 듣고 헤르윈이 크게 당황했다.
“언제부터?”
“음… 아카데미 때부터. 그 왜, 1학년 때 네가 루시아를 구해준 적 있었잖아. 그때부터 네가 루시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라며 아리스타가 말을 덧붙였다.
확신하게 된 계기는 그날이지만, 의심을 한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아리스타와 친구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크게 싸웠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 시기에는 한창 루시아가 자신을 피하던 시기여서 아리스타는 헤르윈을 붙잡고 루시아에게 사과하라고 사정까지 할 정도였다.
“진짜 징하다 징해. 아니, 대체 왜 화해를 안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한테는 말도 안 해줘요.”
브라이언은 냉기가 감도는 두 사람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며 혀를 찼고, 크리스틴은 루시아가 자신에게도 아무 말도 안 한다며 울적해 했다.
“야, 저기 보여? 헤르윈 또 루시아 쳐다본다.”
그렇게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눈치를 볼 정도로 냉전 상태에 있으면서, 헤르윈의 시선은 늘 루시아에게 가 있었다.
저렇게 루시아만 보고 있으면서 왜 화해를 안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에단이 툴툴거렸다.
‘근데 막상 루시아가 자기를 쳐다보면 모른 척 시선을 돌린단 말이야.’
소꿉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빤히 쳐다볼 땐 언제고, 루시아가 헤르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헤르윈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만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아리스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얼마 있지 않아 제 잘못으로 루시아가 큰 봉변을 당하고, 헤르윈이 처음으로 오러를 발현했을 때 아리스타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헤르윈은 루시아를 좋아하는구나.’
헤르윈의 시선이 오롯이 루시아에게만 향하는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