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달달달달-
테이블이 흔들리며, 바닥에는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일정한 소음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레스가 결국 만년필을 내려놨다.
“또 왜? 오늘은 뭐가 문제인데?”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우뚝 서 있었다. 분노를 압축해서 말을 건넨 상대방은 루카스였다.
아레스의 보좌관인 만큼 같은 집무실을 사용하는 두 사람이었다. 요 며칠. 아니, 벌써 한 달여 정도는 친우 녀석이 도통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상사인 제가 물었는데 대꾸조차 안 하는 녀석을 보자 봉급을 깎아야 할지 아레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루카스.”
“아레스, 너 혹시 캐스퍼 후작 어디서 본 적 없어?”
아레스가 이름을 불러서 대답했다기보다는, 질문할 것이 있어서 입을 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레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복화술을 시행했다.
“즐 므르긌는드. 그브드 쁠르 을 은흐믄 느 븡급 즐으…….(잘 모르겠는데. 그보다 빨리 일 안하면 네 봉급 줄여…….)”
“대충 대답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정말 없어?”
루카스가 세상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레스는 결국 백기를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캐스퍼 후작이야 가끔 일 때문에 마주친 적 있잖아. 아니면, 사교 모임이라던지.”
“쓰읍…… 분명 어디서 따로 본 것 같은데.”
원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엔 왜 그러는데? 뭐 꼬투리라도 잡게?”
“아니, 그게. 가끔 캐스퍼 후작이 루시아랑 데… 드으트(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데려다줄 때가 있거든.”
중간에 데이트를 말하려던 루카스가 이빨을 갈며 목소리를 낮췄다. 누가 동생 바보 아니랄까봐 그 다운 반응이었다.
“큼, 어쨌든 그럴 때마다 마주치고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디선가 좀 봤던 얼굴인 것 같아서.”
야차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던 루카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팔짱을 끼며 과거를 회상했다.
베른을 볼 때마다 어디선가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어 아무리 여러 생각을 해봐도 영 시원찮았다.
“……아카데미에서 봤던 것 같은데.”
루카스의 중얼거림을 듣고 아레스도 베른을 어디선가 본 적이 없나 기억을 더듬었다.
“아카데미에서 봤을 수도 있지. 우리랑 고작 1살 차이잖아. 바로 윗선배니까 오며 가며 보지 않았을까?”
“그런가?”
“그래. 별것도 아닌데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한 것이 해결됐지만, 여전히 막힌 부분이 존재했다. 베른이 아카데미 시절 선배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똑똑-
“들어와.”
아레스가 들어오라 이르자, 리디아 가문의 시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루카스 보좌관님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올 사람이 없어서 루카스는 어리둥절했다.
“네, 베키라는 여성분이신데. 모르는 분이시면 돌려보낼까요?”
연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루카스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연인이 온 것은 기쁘지만, 지금은 업무시간이었다. 게다가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불시에 찾아온 거라 그녀를 만나기도 애매했다.
루카스가 아레스의 눈치를 보자 그는 체념한 눈빛으로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다녀와.”
“정말?”
“그래,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집중도 못 했잖아. 이김에 애인이랑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와. 대신 오늘 일은 똑똑히 기록해놓을 테니 그런 줄 알아.”
툴툴거리며 말해도 결국은 휴가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루카스가 활짝 웃으며 아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아레스. 내일 꼭 오늘 몫까지 열심히 일할게.”
고맙다는 표시로 장난스럽게 입술을 들이밀자 아레스가 질색했다. 결국 아레스에게 한 대 얻어맞은 루카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퇴근할 준비를 했다.
짐을 꾸리고 시종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는 이윽고 애인을 만날 수 있었다.
루카스를 발견한 베키가 활짝 웃었다.
“자기야!”
사랑스러운 애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자 루카스는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말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보는 눈이 많아.”
“너무 기뻐서 그러지! 여긴 어쩐 일이야?”
베키는 한참을 웃다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뒤늦게 깨닫고 손에 든 것을 루카스에게 건넸다.
“이건…….”
“제과점에서 간식거리 좀 사 왔어. 이 시간쯤 되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고 했잖아.”
상자 안에 들어있는 조각 케이크와 각종 머핀을 보고 루카스가 감 동어린 표정을 지었다.
“날 위해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야?”
“그것도 그렇고. 이걸 핑계 삼아 자기 얼굴 좀 보려고 했지.”
베키가 윙크를 했다. 루카스는 입술을 씰룩거리다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진짜 고마워. 감동 받았어.”
“하하, 자기는 뭘 해도 리액션이 커서 놀라게 하는 보람이 있단 말이야.”
연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깨소금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곁에 있던 시종도 어느새 두 사람에게 질려 자리를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은 혀짧은 소리와 애칭을 마구 불러댔다.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져있던 루카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정신 차렸다.
“아, 맞아. 베키. 혹시 캐스퍼 후작 알아?”
“캐스퍼 후작? 알지. 이번에 자기 동생이랑 약혼한 사람이라며.”
“아니, 그게 아니라 사적으로나 무슨 소문으로나 캐스퍼 후작에 대해 들은 게 있나 싶어서. 자기도 황실 아카데미 나왔잖아.”
“음…….”
루카스의 질문을 듣고 베키는 곰곰이 고민했다. 루카스보다 1살 어린 그녀는 캐스퍼 후작과 루카스와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었다.
“글쎄, 딱히 아는 게 없는데…. 왜? 뭐가 걸리는 게 있어?”
“아…….”
루카스가 순간 당황했다.
그간 스쳐 간 인연들 중 반절 이상이 그가 동생 바보라는 것에 질려서 떨어져 나갔었다.
‘동생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얼른 대답해봐!’
이런 말을 듣고 차인 전적이 많아, 앞으로의 연애에서는 동생 바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반년 정도 아레스를 따라 공작령으로 내려가 있어서 그 사실을 여태까지 숨길 수 있었는데…….
“그, 그냥! 아무래도 동생이 약혼하니까 싱숭생숭해서.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랑 약혼하면 안 되잖아.”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루카스가 적절한 변명거리를 내뱉었다. 다행히 베키는 그것을 지극히 동생을 걱정하는 평범한 오빠의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렇긴 하겠다. 소문이라… 내가 따로 알아봐 줄게.”
“어? 정말?”
의외의 대답에 루카스가 놀랐다. 떨떠름한 그의 반응을 보고 베키가 웃었다.
“소문이란 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거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의도치 않은 소득을 얻게 된 루카스가 크게 기뻐하며 베키를 얼싸안았다. 베키는 간지럽다며 꺄르르 웃었다.
“오라버니, 거기서 뭐 해?”
그때, 어디선가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루카스를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베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중앙 계단에 선 아리스타가 보였다.
그녀는 루카스를 보자마자 말을 걸었던 터라 그의 품에 안겨있던 베키를 뒤늦게 발견했다.
저를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를 보고 아리스타는 내려오던 것을 멈췄다.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모르는 루카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아리스타를 맞이했다.
“오, 아리스타.”
아리스타가 리디아 공녀라는 것을 알아챈 베키가 날 선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난 지금 퇴근하려고.”
“퇴근? 지금 이 시간에?”
“퇴근? 진짜?”
두 여자가 동시에 같은 반응을 보였다. 말이 겹치자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베키가 먼저 새침한 표정으로 루카스 품에 더욱 파고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응, 오늘 하루 특별 휴가받았어. 봐, 외투까지 입고 있잖아.”
“아, 정말이네?”
뒤늦게 루카스의 옷차림을 알아챈 베키가 그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제삼자는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에 아리스타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해. 나는 이만 가 볼…….”
“아리스타! 잠깐만.”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던 루카스가 아리스타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남들 모르게 볼 안을 깨물며 그를 돌아봤다.
“응?”
베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루카스는 아리스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아리스타는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다.
“자, 이거.”
루카스가 아리스타 손에 한 상자를 쥐여 줬다.
“내 애인이 사 온 간식이야. 아레스랑 같이 먹어.”
아리스타의 고운 손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느 때처럼 햇살과도 같은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계단 밑을 보니 팔짱을 끼며 으스대는 베키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스타는 입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잘 먹을게. 그 녀석한테 전해주면 되지?”
“응, 안에 맛있는 거 많으니까 너도 같이 먹어, 알겠지? 나는 이만 가볼게. 나중에 보자.”
루카스가 아리스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자석처럼 루카스에게 찰싹 붙은 베키가 그에게 물었다.
“자기 먹으라고 사 온 건데. 왜 주는 거야?”
“오늘 우리가 이렇게 데이트할 수 있게 된 게 다 아레스 덕분이잖아. 적어도 뇌물 하나는 바쳐야 하지 않겠어?”
납득했는지 베키는 입술만 삐죽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뒤에 있는 아리스타를 흘겨보며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리디아 공녀랑은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긴. 친구 동생사이지. 자기도 나랑 아레스 사이 알잖아.”
루카스와 아레스는 상하관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절친한 친우였다.
“그래도 너무 친한 거 아니야? 이러면 나 질투 나는데.”
“하하, 왜 질투해. 그냥 친구 동생인데. 그리고 내 동생 친구이기도 해. 신기하지?”
“흐음…….”
대충 고개를 끄덕거린 베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아리스타는 계속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온 시선은 루카스와 베키에게 쏠려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베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러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
“그래, 아리스타는 친한 동생일 뿐이야.”
만족스러운 답을 들었는지 베키가 루카스의 허리를 꽉 잡으며 그와 다정하게 밖으로 나섰다.
한편 두 사람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아리스타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제 손에 들린 디저트를 내려다봤다.
울적해지는 기분에 아리스타는 고개를 푹 숙이던 그녀는 금세 눈빛을 고치곤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노크도 없이 아레스 집무실에 쳐들어갔다.
“아잇, 깜짝이야…. 노크 안 해?”
화들짝 놀란 아레스가 혈육을 보고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스타는 그걸 무시하고 소파에 털썩 앉아, 테이블에 디저트 상자를 던지듯 놓았다.
“이거나 먹어.”
“……그게 뭔데?”
아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상자 안에 있는 디저트를 발견하고 눈을 키웠다.
“케이크네? 네가 웬일이야?”
“내가 산 거 아니야. 루카스 오라버니 애인이 사 온 거지. 너랑 나랑 먹으래.”
“그래?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야겠네.”
아레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시종에게 차를 내올 것을 시켰다. 여전히 뚱한 얼굴로 소파에 삐딱하게 기대던 아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야.”
“왜.”
“……루카스 오라버니. 애인이랑 사귄 지 오래됐어?”
“루카스?”
어느새 머핀 하나를 집어 먹던 아레스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니. 거의 두 달? 세 달 됐나? 그건 왜?”
“애정행각이 좀 진한 것 같아서.”
“아아, 루카스가 좀 그렇긴 하지.”
루카스의 모든 연애사를 지켜본 증인으로서 아레스는 아리스타 말에 쉽게 수긍했다.
“그 녀석은 매번 그래. 사랑을 처음 하는 것처럼 모든 걸 다 주려고 하지. 그런데 어째선지 연애가 그리 오래 못 가더라고. 최대기간이 반년이었던가? 애가 바람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자들이 매번 차더라.”
아레스가 생각해보니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다가 시종이 차를 내오자 곧바로 차와 함께 디저트를 맛보았다.
“……오래 못 간다라.”
“응? 뭐라고 했어?”
아리스타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아레스가 물었다. 아리스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얼른 먹기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