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29)

<51화>

“뭐?”

헤르윈이 그녀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냐고. 내가 맞선을 보든, 약혼자가 생기든 너랑은 상관없잖아.”

루시아의 냉정한 말투에 헤르윈은 순간 울컥했다.

“상관없긴 왜 없어! 네가 내……!”

“‘내’ 뭐? 너랑 나는 그냥 친구 사이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사적인 일까지 간섭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적어도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헤르윈이 서운함을 토해냈다. 그런데 루시아 눈엔 그가 서운함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질투. 그리고 그것에 파생된 여러 감정들이 그의 얼굴에 얼기설기 엉켜 보였다.

그래서 루시아는 더더욱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아니, 왜 이제 와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그야, 헤르윈이 너를 좋아하니까.’

문득, 비앙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질 나쁜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랐다면 미안해. 그런데 헤르윈, 네가 알았다고 해서 내가 맞선을 안 보진 않았을 거야.”

헤르윈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루시아의 말이 모두 옳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걸 먼저 알았다고 해서 어쩔 것인가. 어차피 루시아는 맞선을 볼 테고, 약혼자를 구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목구멍에 무언가가 탁 막힌 것처럼 영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나한테 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헤르윈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왜 고백했어?’

이 질문을 했다가는 루시아와는 영영 마주하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헤르윈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고백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면서, 왜 맞선을 보냐는 질문은 본인이 생각해도 상당히 이기적이었다.

결국 헤르윈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루시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선은 부모님의 뜻이었어. 어차피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고, 언젠가는 가문의 의무를 다해 누군가와 결혼해야 하니까.”

고개를 내렸던 루시아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잖아? 난 그저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빨리 현실을 직시했을 뿐이야.”

분명 평소에 보던 익숙한 미소인데 오늘따라 유독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헤르윈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이건 너무 빨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헤르윈의 표정이 제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헤르윈을 쳐다봤다.

“정 내가 약혼하는 게 싫으면 네가 내 약혼자가 될래?”

헤르윈의 붉은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크게 당황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이것 봐. 그건 싫으면서.”

“루시아.”

“정식으로 리디아 가문에 결혼 제의라도 넣어봐. 혹시 알아? 잘만하면 성사될지?”

더 이상 루시아의 심장은 거칠게 뛰지 않았다. 말을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남은 헤르윈의 대한 미련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보다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너는 내가 13년 동안 좋아했던 남자야.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분명 아리스타한테도 네 매력이 통할 테니 잘 해봐. 시기를 놓치면 다른 남자한테 뺏길지도 모른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내뱉었지만, 헤르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어색하여 루시아는 더더욱 활짝 웃었다.

“이제 우리 진짜 친한 친구로 지내자. 그동안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 말은…….”

“루시아! 늦어서 미안해요. 잠깐 길을 헤매는 바람에…….”

헤르윈이 말하던 도중, 마실 걸 가지러 갔던 베른이 나타났다. 그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다가 헤르윈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페네우스 공자? 둘이 같이 있었군요. 혹시, 얘기하던 도중이었나요?”

“거의 다 끝났어요.”

심기 불편해 보이는 헤르윈과 달리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베른의 곁으로 다가갔다.

길을 헤맸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몇 가닥 내려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어, 루시아는 손수건을 꺼냈다.

“뛰어오셨나 봐요. 천천히 오셔도 됐는데.”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워서 느긋하게 올 수가 없었어요.”

베른의 두 손엔 와인잔이 들려있어서 루시아가 직접 그의 땀을 닦아주었다.

처음엔 당황하던 베른은 이내 허리를 숙여 그녀가 편히 닦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마워요, 루시아.”

“뭘요. 이 정도쯤이야. 이건, 제 건가요?”

루시아는 베른에게서 와인 잔 하나를 건네받았다. 향이 나쁘지 않았다.

“공자가 같이 있는 줄은 몰라서 두 잔 밖에 안 들고 왔는데. 혹시,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헤르윈은 베른이 건네는 와인을 거절했다. 베른은 잠시 거절당한 잔을 내려 보다가 이내 능청스럽게 와인을 홀짝였다.

“루시아, 이제 발목은 좀 괜찮나요? 아직도 아프면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요?”

“발이요? 아아…….”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던 루시아는 헤르윈을 눈짓하는 베른을 발견하곤 탄식을 흘렸다.

분명 이곳으로 오기 전에 발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헤르윈을 피했었다.

그새 그걸 까먹고 말았다. 설마 제 거짓말을 헤르윈이 알아차렸을까?

루시아는 아픈 척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며 오른발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두 남자가 동시에 다가왔다.

“괜찮아?”

“괜찮아요?”

말이 겹친 헤르윈과 베른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 봐봐. 접질린 거면 제때 치료를 받아야 해. 안 그러면 고생한다고.”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조금 뻐근한 정도?”

루시아는 헤르윈의 시선을 슬슬 피하며 베른의 팔을 붙잡았다. 베른이 장단을 맞춰, 루시아를 부축했다.

“그럼 더 이상 파티는 무리겠네요. 집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저랑 같이 가요.”

“네, 부탁드릴게요.”

헤르윈이 끼어들 새도 없이 루시아는 베른에게 기댔다. 루시아를 도와주려던 헤르윈의 손이 무안해졌다.

헤르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나는 이만 갈게. 나중에 보자, 헤르윈.”

“……그래.”

베른은 간단한 인사를 남기곤 루시아를 부축했다. 두 사람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헤르윈으로부터 멀어졌다.

지금은 어색하지만, 익숙해져야만 하는 광경이었다.

헤르윈은 멀어지는 루시아의 뒤통수를 보다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닿을 수 없게 되었다.

루시아가 진짜 친한 친구로 지내자던 말. 베른이 나타나서 마저 하지 못했던 질문이 헤르윈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지?’

헤르윈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루시아.”

루시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헤르윈의 말에 대답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아무래도 루시아, 진짜 약혼하는 거겠지?”

“너도 똑똑히 봤잖아. 둘이 춤도 추고, 밖으로 나가는 거.”

“나는 루시아가 헤르윈 거절하는 거 오늘 처음 봐.”

루시아와 헤르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들은 여전히 루시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약혼자를 데려온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저번에 다 같이 모였을 때 그렇게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는데 대체 한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 난 이제 몰라. 두 사람 일이니 둘이 알아서 하겠지.”

골머리를 앓던 에단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전 분명 둘이 사귀는 줄 알았어요. 캐스퍼 후작을 약혼자라고 소개하기 전까진 두 사람이 연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니까요.”

크리스틴은 지금도 속고 있는 것 같다며 넋두리했다.

그녀의 오해가 그리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평소 그들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맨날 소꿉친구라는 말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구 그 이상의 기류가 흘렀었다.

간혹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질 때면, 사람의 눈을 피해 애정행각이라도 벌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라졌던 두 사람이 나타나면 얼른 비밀연애를 밝히든, 정식으로 교제하든 뭐라도 하라고 농담을 던졌었는데…….

“설마,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아리스타의 중얼거림에 친구들이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쓰다듬던 아리스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군가를 발견한 그녀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얘들아, 너희들 혹시 루시아에 대해서 뭐 아는 것 없니?”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목적부터 말하는 사람은 바로 루카스였다. 아무래도 그 또한 루시아의 일로 혼란스러운지 벽안이 지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동생 사랑은 요 몇 년간 봐와서 잘 알기에 친구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혹시 캐스퍼 후작 말씀인가요?”

“그래, 그 파렴치… 큼, 그게 아니라 루시아 약혼 후보 말이야. 너희는 루시아랑 절친한 친구니까 뭐 아는 거 없나 싶어서.”

“저희도 몰라요. 오늘 처음 알았거든요.”

“맞아요, 약혼자라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브라이언 말에 크리스틴이 동의했다. 그러자 루카스의 눈이 쭉 찢어졌다.

“약혼자라니! 누가 약혼자야! 아직 약혼 안 했어!”

“……그래요?”

생각 이상의 분노에 모두 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희보다는 형님이 더 잘 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둘이 가족이시잖아요.”

에단의 질문에 루카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중요한 일을 얘기하지 않았는지, 원. 나도 오늘 처음 알았어! 결혼하기엔 아직 어리구만 부모님은 대체 뭐가 급해서는…….”

영 마땅찮은지 루카스가 연신 혀를 차며 불만을 토해냈다.

“혹시 형님이 약혼을 안 해서 루시아를 먼저 보내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뭐?”

브라이언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린 루카스의 뒤로 크리스틴이 타당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루시아랑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한 명이라도 먼저 결혼시키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잖아요. 이번에 아리스타도 오라버니가 약혼하면서 결혼 잔소리에 벗어났다고 했죠?”

“어? 어어, 맞아. 적어도 1년은 조용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아리스타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끙… 진짜로 그런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루카스가 팔짱을 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 루카스를 훔쳐보던 아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보니까 오늘 어떤 여성분과 온 것 같던데… 그분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베키 말하는 거야? 베키는 내 여자친구야.”

“오오, 애인이 있으셨구나.”

“꽤나 미인이시던데 능력 좋으시네요.”

“하하, 내 애인이 많이 예쁘긴 하지.”

금세 기분 좋아진 루카스가 크게 웃었다. 이번엔 크리스틴이 물었다.

“애인분이랑은 약혼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음…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돼서 약혼은 조금 이르지 않나 싶어. 아무래도 약혼은 현실이니 신중해야지. 하지만, 나 때문에 루시아가 원치도 않는 약혼을 하는 거라면 나도 이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자신 때문에 루시아에게 피해가 갔다고 생각했는지 루카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굳게 다짐한 벽안을 보고 아리스타는 남들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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