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얏!”
바늘에 손을 찔린 루시아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피가 송글송글 맺힌 손가락을 서둘러 입에 가져다 댔다.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의사를 부를까요?”
“이 정도는 괜찮아. 그보다 이걸 얼른 만들어야 할 텐데…….”
루시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손에 든 것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만들고 있는 건 바로 헤르윈에게 줄 손수건이었다.
마지막 고백인 만큼 의미 있는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일주일이란 촉박한 시간도 시간이고, 웬만한 건 다 그에게 선물했었기에 한참을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바로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이라면 큰 부피를 차지하지도 않고, 전장에서도 나름 요긴하게 쓰이니 꽤나 실용적이다.
보통은 연인이나 약혼자에게 줄 만한 선물이지만, 드물게 친한 친구들에게 주기도 하니 그가 부담스럽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헤르윈이라면 여기에 내 이니셜을 새겨도 모를 것 같아.’
헤르윈은 꼼꼼하면서도 은근 무딘 구석이 있었다. 그라면 손수건에 루시아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것이다.
헤르윈의 이니셜을 마무리한 루시아는 잠시 손수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손을 내렸다.
“……헤르윈이 받아주지 않으면 소용도 없는데.”
여기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긴다 한들 상대방이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른 작업을 하던 세인이 고개를 들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또 속으로 혼자 앓고 있는 루시아를 보고 세인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내일 페네우스 공자님과 데이트가 있으시죠?”
루시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녀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세인은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이렇게 귀여운 우리 아가씨께서 직접 손수건에 수까지 놓아주시는데… 페네우스 공자님께선 언제쯤 아가씨의 마음을 알아주실까요?”
“……그러게. 언제쯤 알아줄까?”
제 기분을 풀어주려는 세인의 말에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페네우스 공자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고 하셔도 너무 괘념치 마셔요. 아가씨께선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하하, 지금 나 위로해 주는 거야? 나 아직 차이지 않았는데?”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요즘, 아가씨께서 기운 없어 보이셔서…….”
세인이 고개를 숙이자 루시아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세인에게 걱정을 끼쳤네. 미안해, 내가 요즘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랬나 봐.”
루시아가 환하게 웃고 있음에도 세인은 도통 걱정스러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아가씨, 너무 혼자 떠안으시려고 하면 결국 지치게 되어있습니다.”
세인이 루시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때론 그 짐을 다른 이에게 나누면 힘이 나기도 합니다. 저는 늘 아가씨 편이예요. 버거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 제게 그 짐을 나눠주세요.”
루시아는 미소 지은 그대로였다. 세인은 여전히 그녀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세인은 가볍게 웃으며 루시아의 고운 손을 토닥였다.
“그저 한 말이었어요. 그냥 흘려들으셔요.”
“응, 그래도 날 위해 한 말이었지? 고마워.”
“고맙긴요. 수는 다 놓으셨나요? 혹시 막히는 부분이 있으시면 제가 해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거의 다 했어. 이것 봐, 나름 괜찮지?”
루시아가 얼추 완성된 손수건을 보여줬다. 손재주가 없는 편은 아니라 그녀가 놓은 수는 꽤나 멋들어져 보였다.
“페네우스 공자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이 정도면 헤르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루시아는 조심스레 헤르윈의 이니셜을 쓰다듬었다.
3일에 걸쳐 완성한 손수건. 드디어 내일이 대망의 날이다.
루시아는 마지막 수를 한땀 한땀 놓으며 제 소망을 빌었다.
‘부디, 내 마음이 닿기를.’
* * *
루시아가 초조한 걸음으로 같은 자리만 계속 맴돌았다.
“세인, 나 이상한 곳 없지?”
“그럼요. 아름다우셔요.”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옷 좀 사두는 거였는데… 이 드레스 정말 괜찮아?”
“네, 당연하죠. 우리 귀여우신 아가씨께 정말 잘 어울려요.”
세인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달래주었지만, 루시아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그리 불안하신 걸까?’
평소에도 귀엽고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그 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그야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모든 하녀들을 총동원했으니 당연했다.
귀엽고 가녀린 루시아의 이미지에 걸맞게 노란 드레스를 입고, 넘실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작은 포인트를 줬으며, 진주 액세서리로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거기에 평소엔 하지도 않던 화장까지 했으니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엔 페네우스 공자님이 아가씨께 홀딱 반할 것 같은데.’
저 모습에도 반하지 않는다면 헤르윈에게 분명 문제가 있는 거라고 세인은 생각했다.
“아가씨, 페네우스 공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마침, 헤르윈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루시아가 잔뜩 경직된 모습으로 뻣뻣하게 나아가자 세인은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제일 중요한 걸 잊으셨어요.”
세인이 작은 선물상자를 건네고 나서야 넋이 나가 있던 루시아가 퍼뜩 정신 차렸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고마워, 세인.”
“고맙긴요. 아가씨, 긴장하지 마세요. 모두 잘 될 거예요!”
세인이 떨리는 루시아의 손을 꽉 잡아주자 조금이나마 그녀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루시아는 침착하게 눈을 빛냈다.
“다녀올게.”
“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세인의 배웅과 응원을 받은 루시아는 한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아그네스 백작가 앞에 페네우스 가문의 문양이 달린 마차가 서 있었다.
루시아가 다가오자, 문이 열리며 헤르윈이 나타났다.
“좋은 아침, 루시아.”
루시아는 순간 헤르윈을 보고 동요했다.
그가 평소의 입던 제복이 아니라,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었기 때문이다.
검과 자신은 하나라며 웬만해선 절대 검을 떼놓지 않던 사람인데 오늘따라 평소 입던 스타일과 다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래선 마치 그가 데이트를 위해 차려입은 것 같지 않은가.
“웬일로 제복을 안 입었어?”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자 헤르윈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복을 입으려고 했는…….”
헤르윈이 말하다 말고 멈췄다. 그에 의아한 루시아가 되물었다.
“했는데?”
“해, 했는데 갑자기 오늘은 다른 옷을 입고 싶더라고.”
“그래? 그것참 신기하네.”
역시 예상대로 그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좀 더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루시아를 보고 헤르윈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혹시라도 아그네스 영애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옷을 입으시라 권유했단 것도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떠나기 직전, 시종인 제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옷은 제복을 입고 나가겠다는 자신을 뜯어말리고 그가 억지로 갈아입힌 것이었다.
그가 왜 그런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헤르윈은 루시아를 슬쩍 훔쳐보았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루시아의 기분이 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나아 보였다.
‘좋은 게 좋은 건가.’
루시아의 기분이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내 하루를 원하셨는데 하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그러는 너야말로 오늘 내게 하루 종일 휘둘려도 상관없는 거지?”
능글맞게 질문한 헤르윈의 말을 루시아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어떤 어마어마한 일을 시키려고 그러시나? 이거 긴장 좀 해야겠는걸?”
“하하, 누가 들으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그냥 너 북부에 돌아가면 한동안 못 보니까… 가기 전에 둘이서 놀고 싶은 것뿐이야.”
“하긴, 우리 둘이서만 있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네. 그동안은 늘 애들이랑 함께했으니까.”
아카데미에 다닌 이후부터는 단둘만 있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짧은 시간뿐. 그 외에는 적어도 3명 이상씩 어울렸으니 말이다.
오늘이 그와의 데이트라고 생각하기 전에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도련님, 곧 번화가에 도착합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이 열리고 마부가 물었다.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고개를 돌리자 루시아는 서둘러 대답했다.
“‘알레인’ 레스토랑으로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마부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루시아가 말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레스토랑인가?”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배부터 채워야지. 내가 미리 예약해뒀어.”
헤르윈과 루시아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리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그간 함께한 세월이 있었기에 그들 사이에는 한 줌의 어색함도 없었다.
이윽고 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저잣거리에 대해 잘 아는 하녀에게 분위기 좋은 곳으로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아주 탁월했다.
그런데 주로 연인들이 찾는 곳인지 주변에는 연인으로 추정되는 남녀들이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음, 분위기도 좋고, 맛도 좋네. 나중에 또 와야겠어.”
감탄하는 헤르윈에게 나중에 누군가랑 올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루시아는 꾹 참았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사실,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요즘 입소문을 타고 있는 곳이라 나중에는 예약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러면 더더욱 메인 코스가 기대되는걸? 어떤 걸로 시켰어?”
“일단 가장 잘나가는 거로 예약했어. 여기 오는 대부분이 주문하는 메뉴라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
머지않아, 메인 요리가 등장했다. 그런데 음식을 본 순간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옆에서 종업원이 메인 요리에 대한 설명을 늘어뜨렸지만, 루시아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럼,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종업원이 물러나고, 헤르윈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려던 찰나, 그는 루시아가 포크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어? 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맛있겠다. 그치?”
어색하게 말하던 루시아가 서둘러 칼질을 하자 헤르윈은 그 모습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봤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왜?”
“왜긴 왜야. 너 버섯 못 먹잖아.”
헤르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 앞에는 각기 다른 요리가 놓여있었다.
헤르윈은 스테이크 위에 와인을 졸인 소스가 올라가 있는 반면, 루시아는 버섯으로 풍미를 더한 소스가 올려진 스테이크였다.
차이점이라곤 소스밖에 없지만, 문제는 루시아가 버섯을 못 먹는다는 점에 있었다.
“이리 줘. 나랑 바꿔 먹자.”
“아, 아니야, 괜찮아. 예의에 어긋나게 그럴 수는…….”
“됐으니까, 얼른.”
헤르윈이 단호하게 말하자 루시아는 하는 수 없이 내젓던 손을 내렸다. 헤르윈은 자신의 접시와 루시아의 접시를 바꿨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찌푸려졌던 그의 인상이 펴졌다.
“……알레르기도 아니고, 그냥 먹어도 상관없는데.”
“단순 편식이 아니잖아. 너 버섯 먹으면 속 울렁거린다며. 전에 멋모르고 먹었다가 하루 종일 고생했잖아.”
그의 말대로 루시아는 어릴 적 버섯을 먹고 크게 체한 뒤로부터는 버섯을 조금이라도 먹기만 하면 하루 종일 속앓이를 할 정도로 버섯을 거부하는 체질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설마 그가 접시까지 바꿔줄 줄은 몰랐다.
이미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꾸는 행동은 예법에 크게 어긋난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 헤르윈은 대수롭지도 않은지 태연한 모습으로 바꾼 음식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뭐해. 얼른 먹지 않고.”
“……응.”
루시아의 귀가 발그레 달아올랐다.
아주 사소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그의 배려가 애써 떨쳐버린 긴장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결국 후식이 나올 때까지 루시아는 헤르윈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했고,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헤르윈 혼자 즐겁게 대화를 이어갔다.
루시아는 헤르윈이 둔하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