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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29)

<34화>

사람들은 루시아의 짝사랑 기간과, 여러 번의 고백을 들먹이며 헤르윈이 그녀를 받아줘야 한다며 함부로 입을 놀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말로 루시아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을까?

순전히 호의로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루시아는 그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지금의 상황이 재밌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으며 당사자들이 불편한 상황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겠지.

헤르윈은 정확히 그 지점을 지적했다.

그는 루시아의 진심을 제대로 봐 주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취했을 뿐이다.

늘 진지했기에 거절해왔던 것이고, 같은 마음이 아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헤르윈은 자신도 곤란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당당히 맞서며 루시아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가 너무 고맙고도 미안하여,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루시아는 방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헤르윈을 철저하게 피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과 자리를 바꿔 헤르윈의 옆자리에서 벗어났고, 그와 함께해야 하는 자리는 무조건 피하는 등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틈을 만들지 않았다.

다행히 헤르윈도 루시아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처음 한두 번을 제외하곤 자신을 피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헤르윈을 피하길 며칠, 방학까지 3일 남은 시점에 루시아는 크리스틴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크리스틴, 어디로 가는 거야?”

“제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루시아.”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도 이런 대답만 나오니 답답했다.

크리스틴이 돌발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서 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녀의 상태가 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틴 입장에서는 갑자기 친구 한 명을 잃어버린 거니까.’

생일파티 이후, 비앙카와는 완전히 멀어졌다.

비앙카는 그동안 보였던 모습이 거짓인 것마냥 평소 루시아를 시기하는 무리에 합류하여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진심을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숨길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그녀는 이제 대놓고 루시아에게 적대감을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비앙카와 예전처럼 지내기란 불가능했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빈 교실에 들어선 루시아는 교실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비앙카…….”

“지금, 삼자대면하자고 날 부른 거야?”

비앙카도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 상황이 탐탁잖은지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하지만,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아서…….”

루시아를 잡았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며 크리스틴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서 묻고 싶어요. 비앙카, 정말로… 정말로 루시아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자리를 만든 건가요?”

그토록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크리스틴이 대신해주었다.

비앙카가 얼굴을 굳혔다.

“우리, 사이좋았잖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한 방에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잖아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죠? 대답해주세요, 비앙카.”

크리스틴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사이좋던 친구들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져 버렸고, 그중 한 명은 또 다른 한 명을 작정하고 무너트리려고 했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절친했던 친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루시아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앞으로 한 발짝 내밀었다.

“……나도 묻고 싶어. 정말로 네가 꾸민 일이야?”

답을 알고 있지만, 그녀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얼어붙었던 비앙카가 한참 있다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리디아 공녀가 한 말이 다 맞아. 전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이야.”

“대체 왜? 나는 너를 정말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 친구? 나는 단 한순간도 너를 친구로 생각한 적 없어.”

비앙카가 서늘한 비웃음을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없었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주제에 소꿉친구라는 이유만으로 헤르윈 옆에 붙어서 얌체처럼 행동했잖아. 정말, 그동안 힘들었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네 비위 맞춰 주는 게 말이야.”

루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나를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다고.”

“어. 단 한 번도.”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울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못하고 꽉 쥔 주먹을 파르르 떨 때, 회색빛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짝-!

그리고, 매서운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틴이 비앙카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

“아니길 바랐는데……!”

비앙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부어오르는 뺨을 부여잡으며 크리스틴을 노려봤다.

비앙카를 노려보던 크리스틴 역시 매몰차게 돌아서서 루시아의 손을 이끌고 나왔다.

“……크리스틴.”

“흐으…….”

한참을 걷기만 하던 크리스틴이 결국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루시아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크리스틴은 어느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는 루시아만큼이나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미, 미안해요, 루시아. 지금 루시아가 가장 힘들 텐데…….”

“……….”

루시아는 말없이 여린 어깨를 토닥였다. 크리스틴은 애써 울음을 참다가 결국 루시아를 꼭 끌어안으며 신음을 흘렸다.

친했다고 여긴 친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 * *

“이제 방학이네요.”

“하아, 지긋지긋했던 1학기가 드디어 끝이구나.”

방학을 맞이하여 집으로 가는 마차를 타기 직전, 친구들은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나마 방학 직전에 일이 터져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다음 학기쯤 되면 소문이 잠잠해지겠죠.”

친구들은 아직도 한창 뜨거운 소문에 대해 염려했다. 에단의 말대로 금방 방학을 맞은 게 다행이었다.

“……이대로 헤르윈이랑 루시아는 화해하지 않는 건가.”

“2학기엔 어떻게 되려나…….”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얘기 한 번 나누지 않았다.

친구들은 지금의 관계가 2학기에도 이어질까 걱정했다.

“그런데 헤르윈이랑 루시아는 어디 있는 거죠?”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안 보이네?”

크리스틴을 시작으로 친구들이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강당에서 방학식을 치렀을 때만 해도 다 같이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지 않았다.

브라이언과 아리스타 등, 친구들이 헤르윈과 루시아를 찾을 때,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구석에 있었다.

루시아가 도망치기 직전에 그녀를 끌고 온 헤르윈이 두 팔 사이로 루시아를 가뒀다.

“루시아, 이제 도망 못가.”

낮은 음성을 듣고 루시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앞에 있는 헤르윈이 아닌 주변에 신경을 쏟았다.

아무도 없는데도 남의 눈치를 보는 그녀의 행동에 헤르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평생 나를 피할 생각이야?”

“헤르윈…….”

“뭐가 그렇게 불안해? 아직까지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여? 그래서 나를 계속 피하는 거야?”

루시아가 입술만 달싹일 뿐, 도무지 입을 열지 않자 헤르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아 아그네스. 이대로 영영 나 안 볼 생각이면 지금 여기서 말해.”

루시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게 냉정하게 말하는 그의 말보다도 저를 내려 보는 붉은 눈동자가 너무나도 지쳐 보여 목이 턱 막혔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피한 게 아닌데…….’

저 때문에 그가 다시 곤란해질까 봐. 또다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까 봐. 더 이상의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피한 것뿐이다.

그가 상처받기를 바란 게 아니라.

“나는 네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헤르윈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마! 너와 나 사이의 일이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한테 어떠한 영향도 못 끼친다고! 그러니까…….”

얼굴을 가린 큰 손 너머로 붉은 눈이 일렁였다.

“제발…무슨 말이라도 해봐.”

제 앞에 있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에게서 8살 어린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만큼이나 그가 위태로워 보여 루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밉지 않아……?”

“밉다니? 내가 왜?”

“그야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니까…….”

루시아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비앙카에게 큰 배신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며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너한테 고백하지 않았다면… 멍청하게 비앙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면… 아니,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었다면……!”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네가 이렇게까지 곤란해지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나는… 나 때문에 네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 너는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사람들에게 책잡힐만한 일은 절대 안하잖아. 그런데 겨우 나 하나 때문에 네 평판까지 무너져 내렸어…….”

루시아가 울분을 토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네 옆에 있어!”

“……결국 내가 곤란해지는 게 싫어서 피했다는 거네?”

헤르윈은 잠시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루시아의 어깨를 잡아 눈을 마주했다.

“네가 싫고 귀찮았다면 나는 진작에 너를 멀리했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 시선이 정말로 싫었다면 이리 너와 대화를 나눌 생각도 안 했겠지. 그런데 내가 왜 안 그런 줄 알아?”

루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하니까.”

루시아의 푸른 벽안이 흔들리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나를 향한 네 마음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끔은 네 고백이 짜증 날 때도 있긴 해. 하지만, 네가 전에 내가 친구로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마찬가지야. 네가 내 친구라서 좋아. 그런 소중한 친구를 고작 이런 일로 잃고 싶지 않아.”

“정말로…내가 미웠던 적 없어?”

“어, 단 한 번도.”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생각한 눈물샘이 다시 가득 차올랐다.

그의 말 한마디에 구원받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약한 불안감이 있었다.

사실은 그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어릴 적부터 이어져 왔던 인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옆에 두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들이 마음을 좀먹곤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헤르윈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만 괜찮으면 예전처럼 계속 고백해도 돼. 이번 일로 괜히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내게 다 털어놔.”

맑아진 시야 사이로 헤르윈의 거칠고 큰 손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소매에 붉은 보석이 박힌 커프스 버튼이 보였다.

그걸 본 루시아의 눈이 꾹 감겼다.

“좋아해… 헤르윈…….”

“그래.”

“좋아해서 미안해…….”

헤르윈은 루시아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녀 곁을 지켰다.

한참동안 자리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헤르윈과 루시아가 나란히 있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시 사이가 좋아진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렸지만, 루시아는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헤르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볼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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