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29)

<27화>

“하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친 곳 없다고 했잖아. 아니, 그보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황당해하던 루시아는 문득 헤르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헤르윈이 루카스에게 알린 건 아닐 테고, 그러면 대체 누가…….

“내가 네 일을 어떻게 몰라! 다 아는 수가 있지!”

“오늘 오후에 1학년 사이에서 큰 사고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거기에 아그네스 영애 이름이 나와서 얘 눈이 홱 돌았어.”

루카스를 대신하여 아레스가 대신 설명했다. 루카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굳었던 표정이 많이 누그러워졌다.

루카스가 어떤 난동을 부렸을지 눈에 훤했다.

“못난 오빠 때문에 고생 많으시네요. 제가 대신 사과를…….”

“하하하! 괜찮아, 저 녀석 덕분에 심심할 날이 없는걸.”

아레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혹시 저 사람…….”

“……아리스타 오빠 아냐?”

루카스가 루시아의 친오빠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도 잠시. 친구들은 루카스와 함께 온 사람이 리디아 공자임을 눈치챘다.

그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구석으로 숨은 아리스타에게로 말이다.

친구들의 속삭임을 들은 아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바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리스타?”

구석으로 숨으려던 긴 금발이 흠칫 떨렸다.

“네가 왜 여깄어?”

아레스가 해괴한 것을 보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리스타 역시 똑같이 얼굴을 찡그리다가 제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깄어?”

“왜긴 왜야. 친구 동생이 아프다길래 왔지. 아, 혹시 루시아랑 아는 사이야?”

“……네 친구라고?”

아리스타가 찡그린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루시아와 똑같이 청량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안녕? 그러니까 아리스타 양?”

루카스가 어색하게 인사하자 아리스타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카스와 아레스가 친해진 지도 벌써 3년이 흘렀지만, 루카스가 아리스타를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리스타 리디아입니다. 루시아 친구예요…….”

“그래, 나는 루카스 아그네스야. 남매끼리 친구라니 참 신기하네.”

“그, 그러게요. 참 신기하네요.”

처음 보는 사람도 친근하게 대하던 그녀가 심하게 낯을 가렸다.

그걸 다른 사람들도 느낀 건지 친구들, 특히 아레스가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인사를 마친 루카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관심은 오직 루시아에게 쏠려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어, 잠깐 칼날이 나한테 날아와서…….”

“뭐? 칼날?!”

“헤르윈이 구해줘서 다치지 않았어. 나도 왜 기절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눈 떠 보니 양호실이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루시아와 달리 루카스는 심각했다.

“어떤 씹어 먹을 놈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

장난기를 쏙 뺀 루카스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화났단 것을 감지한 루시아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루시아, 내 눈 똑바로 봐. 누구야?”

루시아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여기서 아리스타라고 답했다가는 루카스가 어떻게 나올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결국 모두를 위해 침묵을 택하자 루카스가 목표를 바꿨다.

“혹시 누가 그랬는지 아는 사람?”

짙은 살기가 주변을 장악하자 브라이언과 에단이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헤르윈 또한 식은땀을 흘렸다.

“저, 저기…….”

루카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리스타였다.

“저에요… 그 범인…….”

“……뭐?”

“아리스타, 네가?”

루카스는 물론이고 아레스마저 예상치 못한 범인의 정체에 당황했다.

아리스타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덜덜 떨며 제 잘못을 고했다.

“제, 제가 친구랑 검을 맞대다 칼날이 잘렸어요. 그리고 그 칼날이 루시아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루시아는 아리스타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가가 아주 옅게나마 붉어져 있었으니까.

루시아는 제 어깨를 붙잡은 루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 당황하던 루카스가 어느덧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딱!

“으앗!”

경쾌한 소리와 함께 루카스가 이마를 붙잡았다.

“루시아! 갑자기 왜……!”

“뭔 심각한 일이라고 인상을 써. 단순한 사고인데.”

“사고…라고?”

“그래,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무튼 일부러 작정하고 나를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니야. 아리스타한테 진작에 사과 받았어. 어차피 헤르윈이 구해줘서 다친 곳 없이 멀쩡하잖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던 분위기는 한층 풀려났지만, 경직되어있는 건 여전했다.

루카스는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동생을 위험에 빠트린 범인을 용서치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정체가 절친의 동생이고, 사고 또한 우연한 사고에 불과했으니까.

지금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지만, 분노를 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헤르윈, 네가 우리 루시아를 구했다고?”

“……응.”

루카스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친 헤르윈이 긴장했다. 루카스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루시아를 구해줘서 고맙다. 그나마 네가 있어서 망정이지. 진짜 너라도 없었으면…….”

루카스가 뒷말을 흐리자 아리스타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루시아가 안 다쳤으면 됐어.”

질끈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루시아가 아리스타 양을 용서해줬다는데 내가 뭐라 나설 수도 없고. 루시아가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루카스는 다친 곳 없이 멀쩡한 루시아를 돌아봤다.

“이렇게 무사하니까 됐어. 그저 아무리 사고라고 해도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염두 해뒀으면 좋겠군.”

“다, 당연하죠! 다시는 이런 일 생기지 않도록 할 겁니다! 물론 루시아에게도 잘할 거고요!”

아리스타가 루시아에게 했던 다짐을 다시금 밝혔다. 그 모습에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리스타의 얼굴에 안도감이 돌았다. 상황이 잘 해결된 것만 같아 안심이었다.

띠리링~ 띵띵~

때마침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오빠 이제 그만 가봐.”

“칫, 수업만 아니면 그냥 여기 있는 건데. 그냥 이번만 땡땡이…….”

“부모님께 말씀드린다?”

어떻게든 내보내려는 루시아의 태도에 루카스 어깨가 축 내려갔다.

“자, 우린 수업 들으러 갑시다.”

그는 결국 아레스의 손에 이끌려 끌려갔다.

“우리도 가볼게. 다음 쉬는 시간에 올 테니까 푹 쉬어. 알겠지?”

아리스타와 친구들도 다음 수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헤르윈, 넌 안 가?”

수업을 들으려면 헤르윈도 가야 하는데 그는 여전히 보조 의자에 앉아있었다.

“응, 안 가.”

“……왜?”

“아까부터 계속 그러는데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헤르윈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사실 그가 왜 여기에 남는 것인지 대충 눈치는 챘다. 하지만, 저만의 착각일까 차마 묻지 못했다.

“……내가 걱정돼서?”

“그래.”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아주 간단한 답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

루시아의 얼굴이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헤르윈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시선을 돌렸다.

“헤르윈.”

“응.”

“미안해…….”

루시아는 저번에 싸웠을 적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헤르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루시아를 침대에 눕히곤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좀 자. 기억이 안 난다곤 했지만… 너, 지금 손 떨고 있어.”

그의 말에 따라 루시아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많이 놀랐을 거야. 그러니 오늘 하루만 푹 쉬어.”

자신조차 알지 못했는데 헤르윈은 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그는 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소한 것을 눈치채며 챙겨주고는 했다. 이런 배려 때문에라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루시아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다가 헤르윈을 힐끔 바라봤다.

“헤르윈,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손잡아 줘.”

루시아가 왼손을 빼꼼 내밀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부탁조차 못했겠지만, 지금이라면 들어줄 것 같았다. 루시아는 속으로 긴장하며 헤르윈이 답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말이 없던 헤르윈이 손을 내밀었다.

“됐어?”

“히히, 응.”

“그럼, 이제 그만 자.”

제 손을 감싸는 커다란 손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딱딱한 굳은살과 거칠지만 상냥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좋아해, 헤르윈…….”

루시아의 눈이 점점 가물거리다가 이내 감겼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헤르윈은 눈을 가린 갈색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웠다.

사락-

루시아와 헤르윈이 있는 침대에서 조금 멀어진 곳.

가림막이 쳐져있던 곳에 한 여자가 눈에 불을 켜곤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곤 혀를 작게 차며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 * *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어느덧 1학기도 슬슬 막바지에 이르렀다.

초반에 어수선했던 교내 분위기는 많이 진정되었고, 그만큼이나 헤르윈에게 접근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줄어들었다.

무슨 수를 써도 그와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루시아에게 헤르윈을 소개해 달라 졸라대던 여학생들은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목숨을 구했던 날 이후론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루시아가 지나갈 때면 수군거리며 무언가 중얼거릴 뿐이었다.

루시아는 그들의 눈빛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질투.

그들은 헤르윈과 루시아가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들의 눈빛을 받을 때마다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착각대로 헤르윈과 좋은 사이로 진전됐다면 상관없을 텐데, 두 사람은 여전히 소꿉친구에 불과했다.

오히려 헤르윈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으니 어이없을 뿐이었다.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루시아는 아리스타와 친해졌다.

아리스타는 잘하겠다고 다짐한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루시아 곁을 맴돌며 지극정성이었다.

아리스타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긴 했어도, 헤르윈이 그녀를 좋아하는 이상 루시아는 그녀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친해지고, 아리스타 역시 꾸준하게 다가오자 어느덧 그녀에 대한 마음이 풀어졌다.

가끔 헤르윈이 아리스타와 있는 것을 보면 마음 아프기는 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질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허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법.

아리스타와 친해질수록 비앙카와는 조금씩 멀어져갔다.

이제 그녀와 비밀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같이 다니는 것은 여전했지만, 비앙카는 다른 친구들과 곧잘 어울려 지냈다.

그녀는 에단 못지않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인지라 두루두루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루시아도 처음에는 비앙카와 멀어진 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그녀도 그녀 나름의 생활이 있다고 생각하여 굳이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저런 변화가 점차 익숙해질 때쯤 어느덧 1학기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 말은 즉, 여름방학이 다가옴과 동시에 헤르윈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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