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29)

<23화>

“헤르윈,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너 혹시 아리스타 좋아해?”

뭐든 답하리라 생각했던 헤르윈이 순간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반응이 불안감을 더 몰고 왔다.

“진짜로… 아리스타를 좋아하는 거야?”

“내가 아리스타를……?”

헤르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루시아의 말을 곱씹는 눈치였다.

“나는…….”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그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뭔가 깨달은 듯 그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미세하게 들뜬 감정이 그의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난생처음 보는 헤르윈의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루시아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야 헤르윈을 떠올릴 때의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과 같았으니까.

헤르윈을 떠올릴 때면 들뜨고 설렘 가득한 심정을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두근거림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헤르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루시아는 비참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에 밀쳐진 루시아는 절망에 가득 찼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진 루시아가 공허하게 물었다.

“……역시 아리스타를 좋아하는구나.”

헤르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것이 강한 긍정으로 느껴졌다.

루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왜? 아리스타의 어디가 좋은 건데? 혹시… 전에 너를 구해줘서?”

“……루시아?”

루시아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헤르윈이 이상함을 느끼고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루시아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가 호선을 그려 애써 웃고 있어도 눈만큼은 울고 있었다.

“아리스타의 어디가 좋은 거야? 응? 대답 좀 해봐…….”

“루시아, 너 왜 그래. 표정이 이상해.”

“대답 좀 해보라니까? 어디가 좋은 거냐고.”

헤르윈이 중간에 말을 끊어도 루시아의 질문은 똑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을 걱정하는 헤르윈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텐데 루시아는 그것을 알아낼 여력이 없었다.

질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야가 좁아졌다. 루시아의 눈엔 그저 지금 헤르윈이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스타 좋아하지 마.”

“……뭐?”

“좋아하지 말라고. 아리스타가 너를 구해줬으니 좋아하는 것도 알겠는데 아리스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 아니야.”

루시아의 머릿속으로 그간 비앙카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루시아, 제대로 봐봐. 저 남자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눈웃음 슬슬 흘리면서 사람 홀리고, 장난이라는 명목으로 은근슬쩍 스킨십하고 있잖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알아. 저게 꼬리치면서 인맥 관리하는 거거든.’

‘하, 친구? 친구는 무슨.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그건 전부 다 변명이야. 봐, 너도 헤르윈을 좋아하잖아.’

‘난 처음부터 알아봤어. 앞에서는 실실 웃으면서 사람 좋은척해도 분명 뒤에서는 다른 사람 욕하고 난리도 아닐걸? 그리고, 엄청 고단수야. 남자를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넘어오게 할지 잘 알고 있어.’

루시아가 아리스타를 꺼리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비앙카는 아리스타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예전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렸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대로 아리스타가 정말로 어장 관리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결국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여태까지 들어온 비앙카의 말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아리스타에게 향한 헤르윈의 관심을 끄게 하려는 루시아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말이 늘어날수록 헤르윈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져 갔다.

처음엔 루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점점 얼굴을 굳히며 종국에는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아리스타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루시아.”

기괴하게 웃으며 말하던 루시아가 뚝 멈췄다. 귓가로 들려오는 헤르윈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서늘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직감한 루시아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더욱이 커졌다.

“왜…나를 그런 눈빛으로 봐?”

페네우스라는 성에 이끌려 다가오는 날파리들을 보는 것처럼 헤르윈의 얼굴에는 미약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헤르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루시아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지금 아리스타를 욕하는 거야?”

“내, 내가 언제 아리스타 욕을… 나는 그냥 네가 진실을 알았으면 해서…….”

“진실? 네가 내뱉는 말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해?”

헤르윈의 미간 골이 더욱 깊어졌다.

“넌 지금 질투에 눈이 멀어 어떻게든 아리스타를 깎아내리고 있어.”

쿵-

존재감을 감췄다고 생각한 심장이 다시금 밑으로 내려갔다.

“너 대체 왜 이래? 너답지 않아. 네가 가장 싫어하는 게 당사자 앞에서 하지도 못할 말을 뒤에서 하는 거랑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소문내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 네 모습 좀 봐.”

헤르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루시아는 그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처참하게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나, 나는…….”

“아무리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내 마음까지 조종할 권리는 없어.”

루시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실망이야, 루시아.”

무정한 말이 귓가에 꽂혔다.

루시아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나 보여주는 딱딱한 표정을 루시아에게 짓고 있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던 두 사람 사이에 변동이 생겼다.

루시아는 직감했다. 지금 헤르윈이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곤 그 벽을 넘지 못하게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헤르윈이 정해놓은 선 밖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숱하게 노력해왔던 그간의 노력이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그의 곁에 설 자격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피부를 타고 뼈 깊숙이 파고들었다.

절망이라는 단어로 이루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각이었다.

루시아의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헤르윈은 이번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고 냉정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잘 생각해 봐.”

그는 결국 루시아를 달래주지도 않고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루시아는 차마 붙잡을 수도 없어 헤르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제기랄……!”

얼굴을 굳히며 교실로 향하던 헤르윈이 이를 까득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체기가 있는 것처럼 속이 꽉 막혀 답답했다.

방금 전 루시아가 아리스타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헤르윈은 그제야 자신이 아리스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크리스틴처럼 그저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는데 산속에서 오거를 마주하고 난 이후로 아리스타에 대한 감정이 달라졌다.

오거의 공격에 의해 부상을 입었을 당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발목을 제대로 삐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오거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오러를 사용할 줄 알았더라면 오거에게 대항할 수 있었겠지만, 헤르윈은 아직 오러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아리스타가 나타난 것이다.

‘헤르윈!’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소리 지르던 그녀는 검에서 보랏빛 오러를 폭포수처럼 뿜어내며 장대비를 반으로 가르고, 오거의 몸조차 반으로 갈라냈다.

그 이후로는 정신이 반쯤 나가 어떻게 숲을 빠져나왔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오거의 몸을 반으로 갈라내던 아리스타의 모습만 기억할 뿐.

그때부터 헤르윈은 아리스타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자신을 구해냈다는 것도 크게 일조했지만, 그리 강력한 오러를 만들어낸 그녀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그래서 양호실에서 아리스타와 다시 대화를 나눴을 때, 감사 인사와 함께 몸이 다 나으면 나중에 대련하기로 약속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호승심과 두근거림이었다.

그전에도 그녀와 실력이 비슷하여 즐거운 감정은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더 즐겁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아마, 이것이 좋아한다는 감정일까? 잘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특별한 감정임은 틀림없다.

‘아리스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 아니야.’

조금 전에 했던 루시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야말로 혼란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겨우 자신이 아리스타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이유로 그런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루시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아리스타를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잘못을 지적했을 때 보았던 루시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창백해졌고,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 자신의 잘못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루시아가 아리스타를 욕보였을 땐 화가 나면서도, 그녀가 평소 남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서 루시아가 눈물을 흘렸을 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하아…….”

그저 지금 루시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헤르윈은 복잡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교실로 들어섰다.

“헤르윈, 왜 혼자와?”

“루시아는?”

루시아를 찾으러 갔던 헤르윈이 혼자 돌아오자 친구들이 의아해했다.

“혹시 루시아 못 만났어?”

비앙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헤르윈은 그녀를 발견하고 인상을 더더욱 구겼다.

‘……요즘 비앙카랑 자주 어울리던데.’

루시아가 예전과 달라지던 시점이 비앙카와 친해지고 나서부터였다. 혹시 그녀의 영향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헤르윈이 비앙카를 빤히 보자 비앙카의 귓불이 남들 모르게 살짝 달아올랐다.

“왜, 왜?”

“……아니.”

찝찝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이다. 안 그래도 크리스틴과 달리 비앙카는 미묘하게 껄끄러웠는데 이김에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헤르윈, 루시아랑 이야기 잘 나눴어? 혹시 나에 대해서 무슨 말 안 해?”

아리스타가 앞으로 다가왔다.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친 헤르윈이 잠시 멈칫했다.

“나도 몰라.”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리스타가 황당해하며 제대로 얘기해 보라고 말했지만, 헤르윈은 침묵을 유지했다.

드르륵-

뒷문이 열리며 루시아가 들어왔다. 친구들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루시아, 좀 괜찮…….”

에단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해맑게 물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울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루시아의 눈가가 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당황했다. 헤르윈도 속으로 동요했지만, 애써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루시아.”

아리스타가 조심스레 불렀으나 루시아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제자리에 앉았다.

짓궂게도 루시아는 헤르윈의 바로 옆자리였다.

헤르윈이 슬쩍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묵묵히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책상에 팔을 기대 엎드렸다.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친구들은 단번에 직감했다.

헤르윈과 루시아가 싸웠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이 싸웠을 때는 주변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보통 중재하는 사람이 루시아였을 뿐더러, 무슨 일이 있어도 늘 좋게 넘기는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헤르윈과 싸웠다는 것은 그야말로 심상찮은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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