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29)

<21화>

새끼고양이 같은 루시아의 얼굴을 보고 헤르윈이 피식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끄윽……!”

“일어나지 말고 누워있어. 온몸에 타박상이 있어서 아플 거야.”

“아, 어쩐지… 계속 아프더라니.”

루시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헤르윈은 기어코 상체를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배고프지는 않아? 어제 점심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안 그래도 너 일어나면 배고플 것 같아서 내가 샌드위치를…….”

샌드위치를 꺼내는 루시아를 뒤로하고 헤르윈이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시아.”

“응?”

“아리스타는 어딨어?”

“아리스타? 아리스타는 왜?”

일어나자마자 아리스타를 찾다니 조금 이상했다. 루시아는 평소와 다른 것 같은 헤르윈을 보다가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

“아! 아리스타가 구해줘서? 아리스타도 양호실에 있어.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지만.”

헤르윈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리스타를 걱정하는 건가 싶어 루시아는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리스타는 약간의 피로를 제외하고는 다친 곳 하나 없으니까. 곧 있으면 너처럼 의식을 되찾…….”

루시아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그녀의 푸른 벽안이 휘둥그레 커졌다. 헤르윈이 침대에서 일어서려 했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샌드위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르윈!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니까!”

“……아리스타에게 가야겠어.”

“뭐? 지금 이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너 발목도 깁스를 해서 제대로 걷지 못하잖아.”

“루시아, 나 좀 부축해줘.”

“싫어, 안 돼. 이제 막 깨어났으면서 어떻게…….”

“부탁할게.”

단호히 거절하려던 루시아는 굳은 의지를 띤 붉은 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눈동자 너머로 헤르윈의 진심이 엿보였다.

루시아는 결국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헤르윈을 부축했다.

“이번뿐이야. 아리스타 얼굴만 보고 바로 다시 눕기로 약속해.”

“그래, 그렇게 할게.”

족히 20cm는 차이 나는 신장 때문에 부축이라기보다는 헤르윈에게 안기는 모양새였지만, 루시아는 최선을 다해 그를 부축했다.

아리스타의 침대가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 루시아, 헤르윈.”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아리스타가 앉은 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리스타! 깨어났구나! 언제 일어났어?”

“방금 전에. 혹시 여기 양호실이야?”

“응, 네가 쓰러지고 바로 양호실로 옮겼어. 몸은 좀 어때? 어디 아프거나 하지는…….”

루시아가 서둘러 아리스타의 상태를 살피려고 할 때 왼쪽 어깨에 얹어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헤르윈의 손아귀 힘을 느끼고 루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 미안한데 나 잠깐만 아리스타랑 단둘이서 얘기할 수 있을까?”

“어……?”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저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리스타를 보며 말하는 헤르윈에게서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그래. 비켜줄게…….”

“고마워.”

헤르윈은 침대 옆 가림막을 쳐서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막았다.

지끈-

그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루시아의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혹시 헤르윈이 아리스타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면…….’

왜 지금 비앙카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일까.

루시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시간이 흘러 헤르윈과 아리스타가 실종됐었던 날로부터 어느덧 2주가 지났다.

두 사람이 실종되고 며칠 동안은 온 교내가 시끌벅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 외에 헤르윈과 아리스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리스타는 의식을 찾은 날 곧바로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약간의 타박상과 피로 외에는 다친 곳이 없어서 굳이 양호실에 있을 필요가 없던 것이다.

반면 헤르윈은 온몸의 타박상과 발목 골절, 약간의 뇌진탕 증세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양호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덕분에 루시아는 매일같이 헤르윈의 간호를 자처했고, 그녀를 따라 브라이언과 에단, 크리스틴, 비앙카 등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다.

소식을 전해 들은 루카스가 병문안을 오기도 했다.

헤르윈은 다치기 전처럼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것만 보면 다치기만 했을 뿐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헤르윈이 특정 누군가에게만 반응을 달리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아직도 깁스하고 있네.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양호실을 나온 지 일주일 정도 되던 날. 아리스타가 헤르윈에게 다가왔다.

그의 오른발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아직 1주일 더 있어야 한대.”

에단이나 브라이언이 물었으면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헤르윈이 부드럽게 웃었다.

분명 실종 전에도 헤르윈은 아리스타와 웃으면서 장난칠 정도로 친한 사이이긴 했지만, 그건 친한 친구 사이의 장난에 불과했다.

지금 그가 짓는 미소는 친구 그 이상의 대상에게나 보일법한 표정이었다.

다정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조바심을 느꼈다.

안부를 주고받는 가벼운 인사말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아리스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분명… 예전엔 안 그랬는데.’

전에 비앙카나 다른 사람들이 헤르윈과 아리스타를 엮으려고 들 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저 가십을 좋아하는 이들이 별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낸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소문이 사실이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오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건가?”

“노력은 해보곤 있는데, 생각처럼 따라주질 않아. 그래도 한번 오러를 낸 적 있으니 곧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거야.”

“이런, 분명 내가 먼저 오러를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 낫고 나면 서둘러 너를 따라잡아야겠어.”

아쉬운 말투였지만, 그 속에 자리 잡은 감정은 애정에 가까웠다.

헤르윈이 아무에게나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루시아, 괜찮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루시아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느새 아리스타와 헤르윈이 자신을 걱정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어, 어?”

루시아가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아니,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어디 아픈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크고 거친 손바닥이 루시아의 하얀 이마를 덮었다.

헤르윈이 열을 재기 위해 손을 이마에 올린 것이다.

그의 아주 사소한 행동이 바닥을 찍었던 루시아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렸다.

“……미열이 좀 있는데?”

“뭐? 진짜? 혹시 감기가 다 낫지 않은 거야?”

“아니야 감기는 거의 다 나았어. 그냥 더워서 그런가 봐.”

루시아가 애써 웃으며 손을 내저어도 두 사람의 얼굴은 도통 펴질 줄 몰랐다.

이마에 얹어졌던 손이 떨어졌다. 헤르윈의 손이 멀어져 내심 아쉬워하던 것도 잠시 갑자기 얼굴이 무언가에 끌려갔다.

이윽고 헤르윈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약간 차가운 감촉이 이마에 맞닿았다.

“이것 봐 열이 있잖아.”

“아, 아니 나는 괜찮…….”

헤르윈이 이번엔 손이 아닌 자신의 이마를 맞댄 것이다.

루시아는 코앞까지 다가온 헤르윈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헤르윈에게 붙잡힌 얼굴을 빼려 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루시아를 붙들지 않았다. 루시아는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알아볼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아닌가 싶었다.

“헤르윈, 너 루시아한테 잘해. 루시아가 감기 걸렸는데도 너 보살핀다고 아주 온갖 정성을 들였으니까.”

“나도 알아. 몸도 좋지 않으면서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내 말은 듣지도 않아.”

아리스타가 툭툭 치며 건넨 말에 헤르윈이 옅은 숨과 함께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마치 성가시다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꽉 조여졌다.

“루시아, 나 깁스만 하고 있을 뿐이지 통증은 별로 없어. 그러니까 이제는 나 안 챙겨줘도 돼. 네 몸부터 먼저 챙겨.”

“그래, 맞아. 소꿉친구라고 해도 너무 챙겨주는 거 아냐? 얘가 어린애도 아닌데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헤르윈의 말에 아리스타가 힘을 실어주었다.

루시아는 무너질 것만 같은 표정을 억지로 갈무리했다. 분명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하하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말일 텐데 오늘따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설마 못 알아듣는 건 아니지? 네가 귀찮다잖아. 단둘이 있고 싶은데 네가 눈치도 없이 끼어드는 게 짜증 난다잖아. 이제 모르는 척 그만하고 현실을 직시해.’

머리 한구석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제 망상일 뿐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속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서 울렁거리기도 했고, 짜증이 솟구쳐 화를 내고 싶었으며, 감정조절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아리스타가 가식적으로 느껴져 그녀가 점점 미워졌다.

그동안 헤르윈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질투하면서도 나름대로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질투 정도는 몇 번이고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만에 불과했다.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질투는 질투의 ‘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잘게 떨리는 숨이 루시아의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왔다.

“루시아, 안색이 더 안 좋아졌…….”

탁-

아리스타가 루시아에게 손을 뻗으려고 하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쳐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루시아는 얼굴을 굳히던 것도 잠시,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미, 미안해… 어디 다치지 않았어?”

“어? 어어… 다치지는 않았지.”

“피곤해서 예민해졌나 봐. 정말 미안해…….”

루시아가 유순한 눈매를 늘어뜨렸다. 당황하던 아리스타는 곧바로 루시아가 무안하지 않도록 웃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사과하지 마. 그럴 수도 있지.”

“……….”

빙그레 웃어 보이는 아리스타 옆에 선 헤르윈이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루시아를 바라봤다.

짝사랑하는 사람 이전에 그와는 소꿉친구이기에 혹시 헤르윈이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올라왔다.

‘시, 싫어…….’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루시…….”

“루시아!”

헤르윈이 루시아를 부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가 루시아를 불렀다.

“비앙카.”

“루시아, 교수님께서 부르셔.”

비앙카가 돌연 끼어들어 루시아의 손을 탁 잡았다. 당황하던 루시아는 제게 신호를 보내는 거라는 걸 눈치챘다.

“어어… 교수님이 부르시면 가야지.”

루시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앙카와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뒤를 돌아보자 헤르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괜히 제 마음에 찔려 루시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교실에서 벗어나, 복도로 나오고 나서 한참 있다가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비앙카, 고마워.”

“곤란해 보여서 대충 둘러댄 건데.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루시아는 비앙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두운 그녀의 표정을 본 비앙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리디아 공녀를 조심하라고 했지?”

“……….”

예전 같았으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루시아가 이번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을 본 비앙카는 서둘러 루시아를 끌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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