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29)

<13화>

헤르윈의 입가가 서서히 내려갔다.

“……너, 나 좋아해?”

루시아는 헤르윈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쿵!

헤르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이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에 자신을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면… 6일 전, 홀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던 루시아는 주위가 조용한 것을 느끼고 슬쩍 눈을 떴다.

헤르윈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루시아는 하일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고백 안 해.”

“……어?”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고백 안 한다고.”

두려움에 잠식되던 것도 잠시 헤르윈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좋아한다며?”

“응, 난 네가 좋아! 사실 엄마 아빠보다도 더 좋은데! 너는 아니잖아.”

“……….”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어. 헤르윈은 내가 사람들 앞에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싫어하지?”

헤르윈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고백하지 않을 거야.”

굳게 다짐한 것을 증명하듯 루시아가 콧김을 거칠게 내뿜었다.

“그래도…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지?”

그녀가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헤르윈을 향해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보기 좋게 달아오른 분홍빛 볼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웃음은 루시아의 귀여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전에도 봤던 미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푸른 벽안이 벅찬 감정과 함께 헤르윈을 가득 담았다.

그것이 버겁고도 무거운 한편, 가슴 한구석이 살짝 간질거렸다.

그러나 불안감으로 쿵쾅거리는 감각이 더 커서 헤르윈은 그 설렘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헤르윈은 루시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말에 담긴 그녀의 진심 역시…….

그렇기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는 너랑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나는 또 고백할 거다!”

“뭐?”

그녀가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내뱉은 말이었건만, 루시아는 너무나도 상큼하게 받아쳤다.

“내 말 못 들었어? 나는 너랑 안 사귈 거라니까?”

“응, 알아. 그래도 난 너를 좋아하는데?”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헤르윈이 열심히 거절했지만, 그때마다 도돌이표처럼 루시아는 헤르윈을 좋아한다 대꾸했다.

“진짜! 끈질겨……!”

계속 상황이 반복되자 결국 헤르윈이 먼저 짜증을 냈다.

“아무리 말해도 나는 너랑 안 사귈 거야!”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헤르윈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보고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나 정말 싫어?”

“그야 당연히! 싫…은 건 아니지만…….”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가 진심으로 싫은 건 아니었던 헤르윈은 미처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루시아의 입매가 크게 올라갔다.

“그럼 나 좋아해?”

“얘기가 왜 그렇게 돼?”

“그야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난 헤르윈 좋아해.”

“그만! 그렇게 말해도 안 받아준다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친구로서 좋다고.”

허를 찔리자 헤르윈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나는 헤르윈이 친구로서도 좋구, 사귀고 싶을 정도로도 좋아. 너는? 나 친구로서 좋아?”

“……응.”

헤르윈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답변이 조금 늦었어도 마지못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럼 됐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지 루시아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래도 나는 너 좋아하니까 계속해서 고백할 거야.”

“그게 뭐야…….”

엉망진창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해놓고서 친하게 지내자는 게 대체 뭐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하, 이상해.”

그래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헤르윈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리자, 루시아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헤르윈은 한참을 웃다가 제게 뻗은 손을 잡았다.

“그래, 친구로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

두 아이 사이에 남아있던 어색함이 모조리 사라졌다. 제도에서 지냈을 때보다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헤르윈, 좋아해!”

“친구로 지내자고 한 지 5분밖에 안 지났거든?”

헤르윈은 루시아의 고백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운 농담을 던질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8살, 한여름.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시기임에도 시원하고 쾌적한 시간을 보냈던 나날.

잠시 끊어졌던 두 사람의 인연은 북부에서 다시 이어졌다.

* * *

“지금 생각해보니 헤르윈이 당황할 만하네.”

잠이 오지 않는 밤, 루시아는 결국 하녀에게 와인을 부탁했다.

그녀는 테라스에 걸터앉아 어두운 풍경을 안주 삼아 와인을 홀짝였다.

헤르윈에게 처음 반했을 때가 무려 13년 전의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헤르윈에게 반했던 계기와 그에게 고백했던 장면만 떠오를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없었다.

1년 전에 뭘 했는지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데 13년 전은 오죽하겠는가.

“참, 나도 징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차여왔으면서도 접지 못하는 게.”

남들이 하는 말처럼 제 감정을 쉽게 접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으니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다음이 99번째 고백인가.”

딱 한 번 남은 마지막 기회.

“이왕이면 100번 채워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키득키득 웃던 루시아는 자신의 일기를 훑어봤다.

헤르윈을 좋아하기 시작한 8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써온 고백 일기장이었다.

헤르윈이 고백을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행복해한 날도 있었고, 고백에 실패하고 괴로워했던 날도 있었다.

온갖 희로애락이 이 일기장에 그대로 녹아있다.

날것 그대로의 제 감정을 읽어 내리던 루시아는 문득 고백이 60번을 넘어간 시점에서 멈춰 섰다.

“이때부터 아카데미를 다녔던가?”

16살,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시기. 헤르윈과 3년 동안 같이 생활하며 지냈던 나날.

“……이때도 많은 일이 있었는데.”

헤르윈과 같이 있게 되니 좋기도 했지만, 온갖 시기와 질투로 인해 힘들 때도 있었다.

루시아는 문득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를 떠올렸다.

* * *

아카데미는 새 학기를 맞이하여 다시 돌아온 재학생들과 올해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수많은 마차 가운데에 아그네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있던 몇몇 여학생이 그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을 설레게 만든 사람은 바로 올해 18살이 된 루카스였다.

180에 가까운 큰 키와 군살 없이 탄탄한 몸, 진한 초콜릿과 같은 갈색 머리칼, 그리고 하늘보다 맑은 벽안까지.

그는 여학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만큼 훤칠한 미남이었다.

“루시아, 조심해.”

그때, 루카스가 마차로 손을 뻗어 루시아를 에스코트했다.

“우와, 진짜 아카데미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걸 축하한다, 동생.”

루카스가 씩 웃으며 루시아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여타 모든 신입생이 그렇듯 그녀 또한 입학의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아카데미를 둘러봤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교복 잘 어울린다.”

“정말? 이상하진 않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해충 같은 놈들이 꼬이진 않을까 걱정인데.”

“정말. 맨날 그 소리야. 오빠는 다 좋은데 과보호가 너무 심해.”

아무렇지 않게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자 루시아가 루카스의 팔을 찰싹 때렸다.

“루시아! 과보호라니! 네 모습을 봐!”

루시아는 얼떨결에 제 모습을 살폈다.

“내가 뭘……?”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어떤 남자들이 반하지 않겠어!”

루시아는 또다시 제 오빠의 팔불출이 시작됐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걱정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구불구불 부드럽게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과 뽀얀 얼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순한 눈매에 자리한 푸른 벽안까지.

루카스와 똑 닮았지만, 한층 더 귀여운 외모와 150 초반밖에 되지 않은 키 때문에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본인은 앞으로 더 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마 다 자라도 160은 되지 못할 것이다.

큰 소리로 루시아의 장점을 줄줄 읊는 루카스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몰렸다.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나 혼자 갈 거야.”

“잠깐! 루시아!”

루카스는 서둘러 제게서 도망치는 루시아의 뒤를 쫓았다.

뽀로통하게 삐진 여동생을 풀어주는 데에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 *

아그네스 남매는 각자 챙겨온 짐을 짐 보관소에 맡겨놓고 본격적으로 아카데미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를 훤히 꿰뚫고 있는 루카스가 가장 중요한 건물들의 위치와 아카데미 교칙들을 설명하며 루시아와 나란히 걸었다.

교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루카스를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하나둘 말을 걸기 시작했다.

“루카스, 방학 잘 보냈어?”

“오, 아레스. 오랜만이야. 너도 잘 지냈지?”

“그럼, 당연하지.”

루시아는 루카스의 친구들이 올 때마다 한 발짝 떨어져 그들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 인사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이번 친구와는 상당히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옅은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미남.

여리여리한 외관이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상당히 강직하여 아무나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보라색 눈이면…….’

“아, 혹시 얘가 네 동생이야?”

“맞아. 루시아, 여기는 내 제일 친한 친구, 아레스 리디아야.”

아, 역시. 리디아 공작가문의 특징인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다 했더니.

루카스가 꽤 거물인 사람과 친분이 있자 루시아는 내심 놀라며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아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그렇게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

아레스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어? 루시아랑 동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아리스타 말이지?”

“응, 맞아. 네 동생은 지금 어딨어?”

“몰라, 어딘가에 알아서 잘 있겠지.”

“뭐? 그게 지금 오빠가 돼서 할 소리야?”

“네가 이상한 거거든? 애초에 동생을 신경 쓰는 게 난 더 신기… 아, 미안해 동생. 너 들으라고 한 건 아니야.”

제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루카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던 아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를 보고 서둘러 말을 돌렸다.

“괜찮아요, 저희 오빠가 좀 유별나긴 하죠.”

루카스와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루시아의 미소에 아레스는 잠시 멈칫했다.

“……네가 왜 그렇게 여동생을 싸고도는지 알겠네.”

“어허, 어디 불손한 눈으로 봐! 저리 안 꺼져?!”

“오빠! 리디아 공자님한테……!”

“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잘못했는데 뭐.”

루카스가 루시아를 감싸며 으르렁거리자 아레스는 한 발짝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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