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루시아와 줄리안이 홀을 벗어나자 스칼렛이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자. 모두 가만히 서서 뭐 해. 얼른 움직여.”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루카스가 복잡한 마음으로 멀어지는 제 동생을 지켜봤다.
처음 그녀가 헤르윈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1차 충격을 받았고, 헤르윈이 그것을 거절해 2차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흐지부지 끝나자 그간 받았던 충격까지 공중분해 된 기분이었다.
“누나가 우리 형아 좋아하는 거야……?”
헨리도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 꼬맹이가 루시아를 엄청 좋아하지?’
“헨리는 누나도 좋고, 형아도 좋은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보를 5살 아이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루카스가 헨리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네가 포기해라. 넌 승산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헤르윈을 따라잡을 일은 없으니 하는 소리야. 나중에 커서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헨리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것도 잠시,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일찌감치 포기해.”
“이이, 머리 누르지 마! 키 작아진단 말이야!”
헨리가 루카스의 손을 피하려 발버둥치자 루카스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으아아! 이거 놔아!”
“기껏 여기까지 데리고 왔더니 요것이.”
루카스는 헨리를 귀여워하면서도 슬쩍 곁눈질로 헤르윈과 루시아가 사라진 곳을 훑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더 이상 두 사람의 일을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
“아가씨! 아직 머리가 덜 말랐어요!”
“그러다 감기 걸리십니다!”
샤워를 마친 루시아가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욕실에서 뛰쳐나왔다.
젖은 머리카락 때문에 옷이 축축해졌지만 루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그거 가져가지 마!”
“네?”
마침 루시아가 벗어둔 옷을 수거하려던 한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멈춰 섰다.
루시아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는 옷을 뺏어 들었다.
“찾았다!”
드레스에 숨겨진 주머니를 뒤지자 초록빛의 무언가가 나왔다.
“아가씨, 그건 뭔가요?”
“내 보물 1호!”
“그 잎이 보물이란 말씀이세요?”
얼떨떨해하는 질문에 답해주지 않고 루시아는 방 한편에 위치한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제도에서 가져온 오르골이 있었다.
루시아는 오르골을 열곤 거꾸로 뒤집었다.
리본, 구슬, 머리핀 등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가장 소중했던 물건들이 순식간에 바닥과 책상에 내동댕이 당했다.
함이 깨끗하게 비워지자 루시아는 제 손에 들린 클로버를 그 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히히, 내 보물이야.”
“아휴, 아가씨. 감기 걸리신다니까요.”
하녀들이 수건을 들고 다가오고 나서야 루시아의 짧은 일탈은 막을 내렸다.
* * *
“헤르윈, 사람 무안하게 단번에 거절하면 어떡하니.”
스칼렛은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있는 헤르윈에게 다가갔다.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의 고백은 순진하고도 귀여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칼렛은 침대에 풀썩 앉아, 불룩 올라온 이불 뭉치를 다정한 눈으로 보았다.
“엄마는 루시아라면 찬성이란다. 심성도 착하고, 구김 없고, 귀엽기까지 하니 정말 좋지 않니? 괜히 자존심 세우면서 거절하지 말렴. 헤르윈, 너도 루시아를 좋아하잖아.”
아이들은 약간의 자극이 있으면 손쉽게 진심을 토해내기 마련이다.
스칼렛은 헤르윈이 곧 이불에서 나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헤르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헤르윈, 엄마 말 듣고 있어?”
다시 한 번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상하더라도 부모의 말에는 꼬박꼬박 답하는 아이였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헤르윈?”
동그랗게 올라온 이불에 손을 대자, 이불 너머로 덜덜 떨리는 몸이 느껴졌다.
스칼렛은 황급히 이불을 걷어냈다.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마…….”
“세상에! 헤르윈!”
헤르윈은 넋을 놓은 채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비정상적인 모습에 스칼렛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서둘러 헤르윈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헤르윈, 진정하렴. 엄마가 여기 있잖니. 응? 헤르윈……!”
“……나는 루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쳐다보지 마…….”
“그래, 그래, 루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제발…….”
헤르윈의 호흡이 더더욱 거칠어졌다.
눈을 꾹 감으니 저 멀리서 히죽이며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더욱 생생히 보였다.
깔깔깔깔깔!
그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처음엔 앳되기만 했던 목소리가 점점 중후해지기 시작하더니, 들려오는 목소리의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헉, 허억, 허억…….”
그동안 가신의 자제들을 만나도 예전처럼 동요하지 않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트라우마는 여태껏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 의사! 얼른 의사를……!”
헤르윈이 잠깐 눈을 떴다. 스칼렛이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헤르윈이 제일 좋아!’
다시 눈을 감자, 이번엔 루시아가 고백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쿵! 쿵! 쿵……!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과 당장이라도 넘어갈 것 같던 호흡이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루시아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미칠 것 같던 기분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졌다. 그러나, 헤르윈은 다시금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루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루시아의 고백으로 벌어졌던 일이니 그녀를 거절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헤르윈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속으로 되새겼다.
‘나는 루시아를 좋아하지 않아, 나는 루시아를 좋아하지…….’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용인과 의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헤르윈……!’
뒷산에서 들개로부터 루시아를 구해냈을 때, 울먹거리며 제 품으로 안겨들었던 루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헤르윈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 * *
“아무래도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으신 것 같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개한테 물려서 그런 것은 아니고?”
“예, 아주 작은 타박상을 제외하고는 매우 건강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충격을 받았단 말이야…….”
“음… 자세한 것은 도련님이 깨어나셔야 알겠지만, 제 추측으로는 많은 이의 시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선?”
“예, 저는 당시 홀에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나 아그네스 영애께서 도련님께 고백하였다 들었습니다.”
“그래, 고백은 했지. 근데 그 고백이 왜?”
“아그네스 영애께서 남들이 다 보는 곳에서 고백하였으니 자연스레 도련님께도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쏠렸을 겁니다. 도련님은 또래보다 외부자극에 상당히 예민하신 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드셨을 테고요.”
“지금, 우리 헤르윈이 사람이 많은 장소를 꺼린다는 말인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꺼리시는 것이지요.”
설마 제 아들에게 그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증상을 보인 적 없어서 여태 아무 문제 없는 줄로만 알았는…….
“아, 혹시……!”
무언가 떠올린 스칼렛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무언가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십니까?”
“헤르윈이 예전에 가신의 자제와 트러블이 있었던 적이 있다네. 그 이후로 누군가가 ‘예쁘다’나 ‘여자 같다.’라는 말을 하면 평상시보다 예민하게 굴곤 했지.”
“그렇다면 그때의 일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홀에 누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헤르윈과 트러블이 있었던 아이들도 서 있었던 것 같다.
“일단 도련님께서 푹 쉬실 수 있도록 당분간 내일까지 방의 출입을 제한하십시오. 되도록이면 공작님과 마님, 담당 하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 내 그리하마.”
의사가 떠나고 스칼렛은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녀는 헤르윈이 다시 깨어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 * *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 도련님과는 다음에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못 들어가? 난 형아 동생인데…….”
“송구스럽습니다, 헨리 도련님. 혹시 전하시고픈 말씀이 있다면 제게 하시지요. 헤르윈 도련님께 꼭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뒤, 루시아와 루카스, 그리고 헨리는 헤르윈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어제야 헤르윈이 많이 지쳤을 테니 그렇다고 쳐도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그를 볼 수 없다는 건 어딘가 이상했다.
저마저도 거절당하자 헨리가 울먹거렸다.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상태이시라 오늘까지는 휴식을 취하셔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루카스는 굳게 닫힌 문을 흘긋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얘들아, 내일 다시 오자.”
“우으, 형아 보고 싶은데…….”
헨리가 울려고 하자 루카스는 그를 안아 들었다. 헨리는 이번만큼은 그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안겨들었다.
헨리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앞서 걷던 루카스는 옆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루시아, 안 오고 뭐 해.”
“난 여기 있을 거야.”
“뭐?”
루시아는 헤르윈의 방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에 루카스는 물론이고, 출입을 막던 하녀까지 당황했다.
“아가씨, 이러셔도 소용없으세요. 내일이면 괜찮아지실 테니 그냥 내일 오심이…….”
“응, 알아. 그래도 난 여기 있을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호했다. 루시아는 오르골을 꼭 쥔 채 문 건너편의 벽에 주저앉았다.
하녀가 안절부절못하자 루카스가 다가왔다.
“너 혼자 여기 있으면 심심할 텐데?”
“괜찮아, 안 심심해.”
“흠, 그래?”
루카스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루시아 옆에 주저앉았다.
“네가 여기 있으면 나도 여기 있어야지, 뭐. 헨리, 너도 괜찮지?”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아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나, 누나한테 갈래.”
결국 세 아이는 나란히 앉아 헤르윈의 방 앞을 지켰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마저 하던 일 해. 헤르윈 보살피던 거 아니었어?”
하녀는 우물쭈물 주저하다가 이내 방문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하녀가 헤르윈의 방으로 들어가자 복도가 조용해졌다.
묵직한 침묵이 너무나도 어색하여 루카스는 옆을 흘겨봤다.
헨리가 루시아가 들고 온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다 뚜껑을 열었다. 고운 오르골 소리와 함께 덩그러니 하나만 들어있는 네잎 클로버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