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57장 짧은 귀환(1)
하늘에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비처럼 쏟아졌다. A급 이상의 헌터들이 자랑하는 오러 아머조차 얼음 조각에 꿰뚫렸다. 얼음 조각은 마치 오러를 머금은 것 같이 날카로웠다.
땅에서는 뜨거운 불기둥이 솟구쳤다. 선두에서 전진하던 전차들이 대상이었다. 두꺼운 장갑이 불기둥에 닿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녹아내렸다.
“제기랄! 갑자기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튀어나온 거야!”
중령 계급의 장교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마정석 기술로 만들어진 대형 지휘 헬기에 탑승하여 전장을 살피고 있었는데, 바로 발밑에서 휘하 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있는 게 보였다.
“전선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작전 참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절망적인 전황을 알렸다.
“다른 부대는?”
“전원 후퇴 중입니다! 시위대가 시간을 벌어주고 있을 때 저희도 물러나야 합니다!”
최전방이 무너지고 있을 지금, S급 헌터 이선우의 시위대가 피를 흘리며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연합군이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이선우와 시위대 또한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려고 했지만.
“침략사령부의 뜻을 거스르고도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단 한 명의 인베이더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제13침략군단 휘하 11번 부대 소속 대전사이자 5급 인베이더인 케이만이라고 합니다.”
그는 혼자였지만 시위대의 헌터들은 물론이고 이선우조차 섣불리 다가갈 생각을 못 했다.
침공이 시작되고 시위대는 그 규모를 크게 키웠고 뛰어난 헌터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하나의 군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지금 그들 중 단 한 명도 눈앞의 인베이더, 케이만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근원을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 동물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대장, 어떻게 할까요?”
시위대의 헌터가 선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이선우는 그동안 계속된 전투를 겪으면서 성장하여 S급 최상위의 경지에 올랐으며, 그의 휘하에도 S급 헌터 몇 명이 들어왔다.
지금 이곳에도 몇 명 있었고 대부분이 A급 이상에다가 수도 적지 않았지만 다들 지쳤다는 게 문제였다.
‘5급 인베이더라면 SSS급 최상위…….’
케이만에게 향하는 이선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강현준과 레비앙의 정보 공유로 인해 침략사령부의 정보가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선우는 5급 인베이더가 얼마나 가공할 무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대장님. 뒤에서 적의 병력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시위대, 앞으로 전진!”
지시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선우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블레스!”
버프를 부여하기 무섭게 시위대 헌터들이 케이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S급 최상위 보조계 헌터의 버프를 받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시위대 헌터들을 보며 케이만은 그저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찢겨 죽어라.”
시위대 헌터 다섯이 1m 안으로 접근해 오자 케이만이 권능을 발동시켰다. 검은 칼날 수십 개가 케이만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피 분수가 솟구치고 잘린 팔다리가 춤을 췄다. 비명과 함께 시위대 헌터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S급 최하위가 3명, 그리고 A급 상위 2명이 일격에 당했다.
‘5급 인베이더의 무력이 이 정도라니…….’
“제, 제기랄!”
선우가 욕설을 내뱉었다. SSS급 최상위의 경지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다. 그래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터져라!”
펑! 퍼엉!
가벼운 폭발음이 울렸다. 선우의 옆에 있던 시위대 헌터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터지며 피가 흩뿌려졌다.
“산개해서 방어선으로 물러나! 여긴 내가 맡는다!”
“대, 대장!”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선우가 검에 오러를 불어 넣으며 외쳤다. 시위대 헌터들은 물러나지 않으려 했지만, 선우는 단호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장 물러나! 나도 곧 따라갈 거니까!”
결국, 시위대 헌터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고서 흩어졌다.
케이만의 시선이 그들을 훑었다. 그가 권능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선우가 조금 더 빨랐다.
“블러드 레이지!”
스스로에게 광화의 버프를 부여한 이선우가 케이만에게 총탄처럼 날아들었다. 그 기세가 날카로웠지만,
“고작해야 SS급에 닿지도 못한 피라미가 동귀어진을 시도할 줄이야, 이건 굴욕이군요.”
“크아악!”
케이만의 손짓 한 번에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며 튕겨져 나갔다.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려면 당신 같은 하찮은 존재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생성된 수십 개의 검은 창이 선우를 겨눴다.
케이만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표정으로 선우에게서 등을 보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검은 창들이 선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광화까지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 케이만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었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끝인가? 싶은 마음에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게 느껴졌다. 강렬하면서도 익숙한 마력.
‘이 반가의 마력의 주인은 분명!’
“가, 강현준 씨?”
눈을 뜨자 몇 번 본 듯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왼팔에서 시작된 오러 실드가 검은 창을 모두 막아냈다. 그의 옆에서 로브를 입은 남자가 대검을 휘둘렀다.
“아이스 스피어!”
일백 개가 넘는 아이스 스피어가 케이만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위 마법 수준으로 위력을 조정한 것이었지만 케이만의 손짓 한 번에 모두 소멸했다.
단 한 순간, 시선조차 교란하지 못했다.
“레빌 씨, 뒤에 있는 친구를 부탁합니다.”
“강현준 경의 지인입니까?”
“그렇다고 해두죠.”
“지키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것일까?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케이만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강력한 마력의 유동을 느낀 케이만 또한 방어 태세를 갖췄지만…….
“의미 없다.”
현준은 모든 걸 꿰뚫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라이키리의 빛이 당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합니다. 빛과 함께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적을 꿰뚫으세요.
한 줄기의 빛이 케이만의 앞을 가린 칠흑의 방패를 관통했다.
“커, 커헉?”
검을 들어 올렸을 땐 이미 랜스가 흉부를 뚫고 등 뒤로 튀어나온 뒤였다.
곧이어 전격이 케이만을 덮쳤다. 초고속 재생 술식이 발동한 덕분에 몸이 마비되는 건 피했으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도살자 단검이 배후에서 케이만의 목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이기어검.”
“제기랄!”
늦었다. 도살자 단검이 케이만의 목에 꽂혔다.
심장과 목. 급소를 두 군데나 당했다. 초고속 재생이 발동 중이라고는 하지만 신체가 서서히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나, 나는 5급 인베이더……. 11번 부대의 대전사……. 이대로 당할 수는…….”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현준이 뽑아 든 지옥참마도가 케이만의 머리를 쪼갰기 때문이다.
머리를 잃은 육신이 힘없이 무너지고 현준의 시선은 지상에 착륙한 채 병력을 쏟아내는 상륙선들로 향했다.
현준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마정석 50여 개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검은 마정석은 충분하니까…….”
적의 수가 너무 많으니, 군단을 소환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동안 착실하게 모으고 아껴온 덕분에 아공간 주머니에 저장된 검은 마정석의 수는 풍족해서 넘칠 정도였다.
-아콘이 위대한 명령으로 차원 관문을 개방합니다. 무한의 군단을 호출합니다.
검은 마정석의 마력까지 사용하여 차원 관문을 열었다.
-군단, 철갑무장 기병대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군단, 국민 무장 돌격대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군단, 화력 저격수 여단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군단, 왕립 전투비행단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영웅, 소나기 검성이 소환에 응합니다.
-영웅, 칠흑 기사가 소환에 응합니다.
차원 관문이 열리고 무한의 군단이 소환에 응했다. 검은 마정석을 50여 개 나 사용해서 그런지 응답한 군단의 수가 많았다.
철갑으로 무장한 군마를 탄 기병대와 국민 무장 돌격대가 먼저 차원 관문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왕립 전투비행단의 전투기들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장총을 사용하는 화력 저격수 여단까지 합류하자 10만을 넘는 대군세가 대열을 갖췄다.
‘아직 영웅이 남았다.’
군단이 진형을 갖췄지만, 소환이 끝난 건 아니었다. 영웅 2명이 남았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차원 관문이 닫히기 직전에 녹색 망토를 입은 소나기 검성과 검은 갑옷을 입은 칠흑 기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백두산 방어선으로 물러나세요,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현준이 제13침략군단의 비행선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잘된 일이다. 이선우의 버프가 위력적이라고는 하지만 블러드 레이지까지 사용한 탓에 지친 그가 남아 있어봤자 무한의 군단의 전투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이시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차원 도약을 펼치느라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한 상태였기에 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직속 부대인가……?”
유물을 찾으러 떠나기 직전에 제13침략군단의 직속 부대가 움직인다는 소식은 들었다.
‘직속 부대라면 정예로 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지금 현준은 10만이 넘는 무한의 군단과 함께였으니까.
그는 천천히 지옥참마도를 적의 비행선단을 향해 겨누며 입을 열었다.
“군단, 앞으로.”
현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자 철갑무장 기병대와 국민 무장 돌격대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왕립 전투비행단의 전투기들이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 고도를 높여 전투선단에 접근했다.
콰앙!
화력 저격수 여단에서 대형 박격포를 격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현준도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후방 지휘관보다는 전진하여 싸우는 선봉대장 타입이었다.
무한의 군단이 함께하고 있기에 황금의 검을 꺼내 들고 신격의 힘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SSS급 최상위의 전투력으로도 충분히 적들을 몰아세울 수 있었다.
“이 정예 병력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다는 말이냐!”
제13침략군단 소속, 11번 부대 책임 지휘관을 맡고 있는 라인켈이 지휘선 함교에서 목이 터져라 한탄했다.
승전과 백두산 방어선을 향한 진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10만이 넘는 대군세가 어디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적격자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저희도 전력 손실이 큽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부관들이 후퇴를 종용했으나 라인켈은 조금 더 버텨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결단을 내려야 했다.
“후퇴한다!”
무한의 군단이 가진 전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결국, 11번 부대는 물러나기 시작했다. 현준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마력의 기척이 느껴졌다.
-연이은 승전에 역전의 사령관이 열렬한 찬사를 보냅니다.
오랜만에 누군가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