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56장 차원 방랑자(3)
현준은 희미한 조명 술식 하나에 의지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오는 곳이 분명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든밀러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 흔적과 공명하는 마력이 길잡이가 되었다.
“찾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첨탑의 최상층이었다. 앞에는 오래된 철문이 있었고 그 옆의 협탁에는 낡고 부서진 자물쇠가 놓여 있었다. 철문을 잠그고 있던 것 같은데, 누군가 박살 낸 모양이다.
부서져 있는 자물쇠를 보고 있자면 불안한 심리가 들 법도 했지만, 현준 그렇지 않았다. 문틈으로 시든밀러의 잔존 마력이 분명하게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현준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서 낡은 철문을 열어젖혔다.
내부는 20평 남짓한 하나의 공간이었다.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난잡한 방 안에는 유리 조각이나 벽돌 파편 같은 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시든밀러가 남겼다고 하는 휘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가장 눈에 띄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잡동사니로 보일 정도로 엉망이었고 낡아 있었지만, 현준의 눈에는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시든밀러의 마력이 반응합니다.
목소리가 재촉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시든밀러의 휘장’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지의 끝이 휘장에 닿은 순간, 휘장은 현준이 품고 있던 마력을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 당황해서 손을 거두려고 했다.
하지만 휘장은 손에 접착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함정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생의 의지가 반응한 걸 보면 침략사령부의 함정은 아닌 것 같았다.
현준은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다. 다행히 휘장은 많은 양의 마력을 흡수하지 않았다.
마력 흡수가 끝났을 땐 휘장이 녹이 슨 옷을 벗어 던지고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시든밀러가 남긴 휘장을 얻었습니다. 그가 남긴 힘이 최후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전생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해당 전생과의 동조율이 올라갑니다.
휘장에서 다량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목소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시든밀러와의 동조율이 2차 해방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최후의 검성이 당신에게 초월검을 전수합니다. 이제 당신의 앞에 한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휘장을 얻음으로 인해서 2차 해방의 조건까지 달성했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터져 나오듯 방출되었다.
‘됐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미 짧은 두통과 함께 초월검을 사용하는 방법이 머릿속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 잡은 뒤였다.
-강현준 경, 적이 나타났습니다.
차분하게 기억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무전기에서 레빌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지옥참마도가 반응하지 않았지만 레빌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그의 탐색 술식이 정교하기 때문에 의심 없이 첨탑에서 나왔다.
적이 나타났다고 하길래, 근처까지 왔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첨탑 앞에는 레빌과 이시리아밖에 없었다.
적은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레빌이 손가락 끝으로 북쪽 하늘을 가리켰다.
현준은 고개를 돌렸고 침략사령부의 비행선단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순찰 중이던 병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해 술식을 자신 있게 소개했기에 그를 믿었지만 아쉽게도 그 역시 순찰 병력의 존재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이시리아는 말이 없었고 레빌은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풀이 죽어 있는 모양을 보니 조금 전까지 이시리아에게 심하게 깨진 모양이다.
“어쩔 수 없죠.”
“교전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새로운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요.”
어느새 그의 손에는 지옥참마도가 들려 있었다.
“지하에서 대기하고 있는 지상군 정도는 감당할 수 있죠?”
지원군이 접근 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지 지하 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반격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지하의 주둔 병력은 우리가 맡을게요, 제가 마력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없어요.”
이시리아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하긴, 차원 도약에 마력을 많이 소진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악몽급 신격이었다.
SSS급과 신격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건 가장 최근에 신격에 오른 현준이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다.
게다가 SSS급 중견 수준의 무력을 지닌 레빌이 경호원으로 붙어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현준은 말을 마치며 지옥참마도를 뽑아 들며 마력을 일으켰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눈앞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마법서가 펼쳐졌고.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5배 강화합니다. 고등 다중 영창을 사용합니다.
현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파이어 캐논.”
일백이 넘는 거대한 화염구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3배 강화와 5배 강화는 위력부터가 달랐다.
파이어 캐논 세례에 두들겨 맞은 상륙선 3척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추락했다.
선두의 상륙선들이 무너지자 바로 뒤에 있던 전투선들이 마력 광선을 쏟아냈다.
이시리아가 방어 마법진을 펼치는 걸 본 현준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이스텔의 가호를 거두고 대신 지옥참마도에 마력을 집중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시든밀러의 가호가 발동되면서 지옥참마도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하지만 현준은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전투선의 두꺼운 장갑과 방어 마법을 꿰뚫기에는 시든밀러의 가호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듀렌달의 가호가 발동되면서 지옥참마도의 오러 블레이드가 강화되었다.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휘둘러 전투선의 장갑을 찢고 함교로 침투했다. 침략사령부를 상대하면서 비행선의 구조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 적이 침투했다!”
“막아!”
함교에 있던 인베이더들이 현준에게 달려들었지만 모두 일격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단 한 명, 검격을 버텨낸 자가 있었다.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회수하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 오러를 머금은 창을 든 인베이더의 모습이 보였다.
-SSS급 최상위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서 인베이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제9주둔군단 소속 90번 부대의 대전사, 알링켈이다.”
인베이더는 스스로를 소개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함교의 조명이 비추는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묻어 나왔다.
아직 현준이 신격의 힘을 해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아래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되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신격의 힘을 쓰지 않고 초월검만 사용해 볼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의 무력은 신격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SSS급 상위에서 최상위이다.
‘그렇다면 초월검을 쓴다면 이 상태에서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생각 정리가 끝났다. 현준은 알링켈을 향해 지옥참마도를 겨눈 채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시든밀러의 이름으로 검 끝에 초월을 맹세합니다. 이제 당신에게 한계란 없습니다. 시든밀러의 모든 검술의 숙련도가 일시적으로 증가합니다.
지옥참마도에 깃든 오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 압도적인 마력에 짓눌린 듯 알링켈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크, 크윽...!”
예상치 못한 강력한 마력의 파동에 알링켈은 크게 당황했다. 기껏해야 동급 정도의 무력을 가졌을 거로 생각했던 적이 지금은 악몽급 신격 수준의 마력을 분사하고 있었다.
놀란 건 현준도 마찬가지였다.
‘황금의 검을 쓰지도 않았는데, 신격의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될 줄이야.’
지금까지 들어온 설명과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신격의 힘은 평소에는 잠자고 있다가 방아쇠 역할을 하는 뭔가를 발동할 때 깨어난다고 한다.
현준의 경우에는 그것이 ‘황금의 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황금의 검을 꺼내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격의 힘이 느껴졌다.
‘황금의 검을 꺼내든 상태에서 시든밀러의 초월검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잠깐이나마 재난급 신격의 경지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신격의 경지가 악몽급, 재난급, 재앙급, 종말급, 그리고 주신격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건 얼마 전에 레빌에게 설명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알링켈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럽다는 감정이 강하게 묻어 나왔다. 동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갑자기 신격의 마력을 쏟아내니 당황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제기랄!”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벌써 느껴졌고 알링켈은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러면서도 아직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
그는 창을 휘두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현준의 머리 위에서는 알링켈이 완성한 권능, 흑염이 쏟아져 내렸다.
현준은 민첩한 움직임으로 흑염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다가오는 알링켈을 향해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초월검의 보정을 받은 검격은 알링켈이 그 접근을 인식한 순간 이미 팔과 다리가 절단되고 있었다.
“아?”
알링켈이 의문 섞인 단말마를 내뱉었다.
그의 팔과 다리에서 피가 솟구치는 순간, 현준은 이미 지옥참마도의 회수를 끝내고 다음 검격을 휘두르고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권능을 사용할 수도 없다.
욕설을 내뱉으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지옥참마도가 이미 그의 몸통을 절단하고 있었다.
“커, 커헉!”
욕설 대신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체라는 지지대를 잃은 상체가 힘없이 무너졌고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알링켈의 목에 꽂아 넣음으로 확인 사살을 했다.
초월검은 황금의 검을 꺼내서 신격을 해방하는 것에 비해 마력 소모가 적었다. 그래서 현준은 효율성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직후, 초월의 마력이 사라지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부작용이 있었다.
“큭…….”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투가 더 이어졌다면 집중을 방해할 정도로 거슬리는 수준이었다.
신격의 힘을 다룰 때보다 마력의 힘이 적은 대신에 신체에 무리가 가는 구조인 것 같았다.
고통쯤이야 고통의 지배자를 만난 적도 있으니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이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하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싸울 수 없다.
그건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가능하면 사용을 자제해야겠어.’
생각을 정리하며 전장에서 벗어나니 멀리서 달려오는 이시리아와 레빌의 모습이 보였다.
“휘장을 확보했고 적들도 전멸했습니다. 지구로 돌아가죠.”
그들을 보며 현준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