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55장 접촉(3)
차원 관문이 생성된 곳은 지하실이 아니라 지상이었다. 덕분에 현준과 레비앙은 막대한 마력의 유동을 느끼고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숙소 앞에서 차원이 갈라지고 있었다.
이를 본 위원들이 달려와 갈라지는 허공을 향해 무기를 겨눈 채 마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현준은 그들에게 침략사령부의 공격이 아니라는 걸 5분 동안 설명해야만 했다.
“경계를 확실하게 하도록.”
사혈이 차가운 목소리로 친위대원들에게 지시했다.
위원들이 안전을 확인하고 해산했다고는 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친위대를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친위대는 무기를 뽑지는 않았지만, 기세를 가다듬은 채 균열을 주시했다.
그리고 10분 정도 시간이 더 흘렀다.
균열이 옆으로 쩌억 하고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붉은 제복을 입은 남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엘프?”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친위대는 아니고 구경꾼 중 한 명이 목소리 조절을 잘못한 것 같았다.
균열에서 걸어 나온 이들의 중앙에 있는 이는 ‘엘프’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단순히 미모가 아름다워서 그런 게 아니다. 정말 귀가 길었다.
인간이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엘프의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도착한 것 같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이내 시선이 현준에게 닿았다.
그 순간 그녀는 현준에게서 뭔가를 감지했고 씨익 미소를 짓더니 그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반가워요, 적격자.”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차원 동맹에서 파견한 집정관, 이시리아라고 해요.”
“강현준입니다.”
마땅히 소개할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름만 밝히며 악수에 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은 충분한 것인지 이시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가죠. 보는 눈이 많습니다.”
침략사령부 때문에 이계의 존재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대화를 나누려면 시선이 적은 곳으로 가야 했다.
현준은 그들을 숙소의 지하실로 안내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들의 복장을 살폈다. 붉은색이라 눈에 띄기는 했지만 헌터들이 입는 장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복만 보고선 이계인이라는 사실을 특정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침략사령부 때문에 이계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나 보네요.”
그녀는 숙소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 멀리서부터 시작된 적대감 섞인 시선이 닿는 걸 느꼈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솔직히 말하면 침략이 시작된 이후로, 이계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각국 정부가 부정해 왔던 그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났지만, 시작이 좋지 않았다.
“힘을 숨기고 있군요.”
“한 번에 알아보시네요?”
이시리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현준의 말대로 그녀는 힘을 숨기고 있었다. 꽤 수준 높은 술식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준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한 번에 알아볼 줄이야…….’
미소를 머금은 채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를 보며 현준이 입을 열었다.
“저를 시험할 생각이면 그만두시죠. 우리끼리 다퉈봤자 이득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험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단지 저희가 어느 정도까지 도와줘야 하는지 알고 싶었거든요.”
생각보다 비협조적인 것 같다.
현준의 눈매가 살짝 꿈틀했다. 본래 성격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언행은 썩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집정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지구의 상황은 차원 동맹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습니다.”
제13 침략군단이 상륙했다고는 하지만 차원 도약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력을 소실했고 현재 균열이 확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침략사령부의 지원 병력은 없을 확률이 높았다.
상황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소규모 지원을 받고 갑질을 견뎌내야 할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런 소규모 인원을 지원해놓고 생색내면서 갑질하려면 그냥 돌아가세요, 집정관.”
지금 이곳에는 어린아이 같은 생색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현준이 강하게 나오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이시리아의 표정이 굳었고 그녀의 옆에 있던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강현준 경, 저는 이시리아 집정관님의 부관을 맡고 있는 고위 기사 레빌이라고 합니다.”
레빌은 이시리아와는 다른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집정관님께서 차원 도약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으셔서 말투가 조금 날카로웠던 것 같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이시리아가 조금 삐딱한 태도로 나와서 그렇지 차원 동맹은 적격자, 강현준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싶어 했다.
레빌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나선 것이다.
이시리아가 예민한 성격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을 보일 줄은 레빌은 물론이고 차원 동맹 수뇌부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레빌 경, 지금…….”
“집정관님.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앞을 막아서며 레빌이 이시리아에게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파견되기 전에 차원 동맹 수뇌부로부터 최대한 성격을 죽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시리아, 그녀는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소수 인원이라면 균열이 불안정해도 차원 도약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특수 능력 때문에 이번 원정에 나선 것이었다.
수뇌부에서도 비슷한 특수 능력을 가진 다른 집정관들의 부재로 그녀를 쓸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많은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이시리아가 이 정도로 시비를 걸 줄이야, 레빌은 답답한 마음이었다.
“레빌 경, 집정관님은 우리가 모시겠네.”
“부탁하네.”
두 고위 기사의 대화를 엿들은 현준은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제 친위대장이 임시 숙소로 안내할 겁니다.”
말을 마치며 손을 들어 올리자 사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안내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이시리아와 고위 기사들이 현준의 수하들과 함께 지하실을 떠났다. 이제 안에는 현준과 레빌만 남았다.
레빌은 이시리아가 동행한 이유와 차원 동맹의 사정을 설명했다.
“차원 동맹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침략사령부의 군단이 상륙한 상황에서 차원 동맹과 사이가 멀어져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현준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제야 레빌은 조금 안심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확실히 해둬야 할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이시리아가 사라지니 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곳에 집정관을 포함한 고위 기사들을 파견한 이유가 뭡니까? 워낙 소수 인원이라 군사적인 지원 목적은 아닌 것 같아서요.”
고위 기사들의 수준이 높다고 하지만 그 수가 적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차원 동맹이 거창하게 지원을 약속할 때만 해도 대규모는 무리라도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병력의 지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유물을 찾는 걸 도와드릴 겁니다.”
“다른 차원에서 흘러들어 온 물건을 말하는 거죠?”
“그런 뜻도 있지만 지금 말하는 유물의 정의는 다른 겁니다.”
“다른 뜻도 있습니까?”
현준의 물음에 레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하는 유물은 당신의 전생, 그들이 남긴 물건을 말하는 겁니다.”
레빌의 말에 현준은 얼마 전에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석판을 찾았던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지금까지 몇 세대에 걸쳐서 여러 명의 적격자와 함께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적격자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지 잘 알죠.”
침략사령부와 차원 동맹의 대립 역사는 길다.
지금까지 수많은 차원에서 무수히 많은 적격자가 선택되었고 침략사령부와 싸웠다. 그들 중 극소수는 차원 동맹과 접촉하여 공동 전선을 펼치기도 했다.
차원 동맹은 그간 적격자들과 함께했던 역사가 깊기 때문에 침략사령부보다 그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최단 기간으로 성장시키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강현준 경께서 자리를 비우시게 됩니다.”
“제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방어선이 무너질 겁니다.”
“차원 동맹의 고위 기사들이 방어선을 지킬 겁니다.”
레빌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현준의 눈으로 볼 땐 그들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고위 기사들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파견된 인원이 너무 적었다.
“저희가 전부는 아닙니다, 저희 측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대로 고위 기사들의 추가 파견이 있을 예정입니다.”
“전선이 안정된다라……. 그러니까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네요?”
현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레빌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곧 생각의 정리를 끝내고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부에 연락을 해서 즉시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예비대를 아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빠른 지원을 약속받았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일주일이 안 걸릴 겁니다.”
“좋습니다. 이제 저도 협조할 마음이 생기네요.”
모든 게 해결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활짝 웃는 현준의 모습에 레빌은 혀를 내둘렀다. 변화무쌍한 감정의 기복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는 눈치였다.
“그러면 유물을 찾으러 가볼까요?”
얼마 전에 침략사령부의 공격이 있었고 크게 물리쳤다. 당분간 그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유물 탐색에 나선다면 지금이 적기다.
“우선, 탐색에 나서기 전에 드릴 게 있습니다.”
레빌이 아공간 주머니를 열고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그는 검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꺼낸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덮개를 열자 고급스러운 포장 안에 담긴 작은 유리병이 보였다. 그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저희가 얼마 전에 발견한 유물입니다.”
마력이 반응하는 것 같았다.
“피에 젖은 살인귀, 리퍼의 피입니다.”
처음에는 몸이 반응했다. 그리고 레빌이 설명을 끝낸 순간에는 허리에 걸려 있는 도살자 단검이 반응했다.
-도살자 단검이 한때 자신을 사용했던 주인의 피를 알아보고 갈망합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것 같네요.”
도살자 단검을 뽑아 들고 유리병에 담긴 리퍼의 피를 뿌렸다. 그러자 도살자 단검이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도살자 단검이 주인의 혈액을 흡수합니다. 가장 많은 이를 죽인 학살자의 피가 도살자 단검을 강화합니다. 이제 도살자 단검은 그 어떤 존재라도 상관없으니, 혈액만 묻어 있다면 오러 블레이드를 쓴 것과 동일한 절삭력을 지니게 됩니다.
굳이 목소리의 설명이 아니라도 느껴졌다.
도살자 단검이 더욱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