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50장 전면전이다(3)
모두 죽였다. 점령당한 중국과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인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시체가 되었다.
“수억이 죽었습니다. 협상이 통할 상대들이 아니에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현준이 기자회견을 했을 때만 해도 협상을 하자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자 각 국가의 수뇌부들은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대학살을 벌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규모의 대학살이다. 태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침략사령부는 이런 놈들입니다. 협상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아요.”
현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일로 저는 물론이고 청와대에서도 침략사령부의 목적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백악관이나 UN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합군을 창설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공격당하면서 단일 국가의 군사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각국 정부들과 UN도 바보는 아니었다. 연합군 계획은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태식이 말했다. 연합군은 약 3일 만에 편성되었지만 군대가 집결할 때까지 281번 부대는 얌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281번 부대의 마도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중국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무리해서 연 차원 관문이 닫히면서 증원군은 부를 수 없게 되었지만 281번 부대의 병력 대부분이 넘어온 상황.
러시아의 점령지에 배치된 이들은 은밀하게 진격을 준비했다.
“러시아 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위원회에서 보내 준 수행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창가에 앉아서 러시아의 상황을 듣고 있던 현준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규모 공격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행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얼마 전 시베리아 쪽에서 광기의 전신, 아레스에 강림한 상태로 다수의 적 병력을 박살 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몰라도 러시아 방면의 적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안일했던 모양.
“연합군의 준비는 어떻습니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저희 병력이 주요 지점에 집결하기 전에 러시아의 적들이 먼저 행동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현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연합군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가서 깽판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3일은 더 필요합니다.”
“적들이 어느 방향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지는 확인되었습니까?”
“동아시아 방향입니다. 대한민국이나 일본 쪽으로 진격해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연합군의 준비 기간은 3일. 하지만 적들은 그전에 움직일 것이다.
“제가 갑니다. 하루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으니, 연합군을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하루 이상을 버티는 건 무리였다.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서 데우스의 운명 개입을 발동했다고는 하지만 광기의 전신, 아레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다.
그런 요행을 2번 바라는 건 사치였다.
‘데우스의 가호는 최후의 보루로 사용해야 한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루! 적들의 규모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저도 무리입니다.”
“연합군 사령부에 전달하겠습니다.”
현준은 바로 행동했다. 소수의 일행들을 선별하여 공중항모를 타고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향했다.
“중국에 비해 러시아의 시베리아는 그나마 인구가 밀집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명 피해가 비교적 크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시베리아 쪽의 지도를 보고 있으니, 레비앙이 찾아왔다.
“‘비교적’ 적다고는 해도 수백만 명 이상이야.”
“설마하니, 진짜로 대규모 학살을 벌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시군요.”
레비앙의 말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만나온 전생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레비앙 또한 몇 마디 했었지만, 점령지에 있는 대부분의 생명을 학살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반쯤은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미친놈들이야.’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짧은 한숨과 함께 지도에서 눈을 뗐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레비앙이 있었다.
“공중항모의 강화는?”
침략사령부의 비행선들과의 교전에서 깨달은 게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금의 공중항모는 침략사령부의 기술로만 건조된 비행선에 비하면 너무나 약하다는 것이었다.
무장과 성능의 강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며칠 전에 공중항모를 강화하라고 레비앙에게 검은 마정석 10개를 주었다.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태로도 예전보다는 전투력이 강해진 게 크게 느껴질 겁니다.”
“상륙선 정도는 격파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확인된 침략사령부의 비행선은 상륙선과 전투선으로 두 종류였다.
전투선에 비해 상륙선의 무장은 빈약한 편이었지만 침략사령부의 기술이 일부만 들어간 공중항모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상륙선조차도 1대1 대결에서 격침시키지 못했었다.
“교전 상황에 돌입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이전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1대 정도의 상륙선과 전투가 발생하게 될 경우, 격침시키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레비앙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서는 확신이 묻어 나왔다. 과하지 않은 적당한 자신감이었다.
“적이 얼마나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시베리아에 있을 적들을 묻는 에것입니까? 아니면…… 침략사령부 전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둘 다.”
현준의 물음에 레비앙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첫 조우 때, 주군께서 시베리아를 휩쓸었으니,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많지는 않을 겁니다.”
솔저급 수만 명의 무덤이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문제는 침략사령부의 본대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침략사령부, 본대의 규모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레비앙이 잠시 말을 멈췄다. 떨리는 눈동자가 그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저희 세계를 공격한 그 대병력이, 본대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네 세계를 공격한 대병력의 규모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
“정확한 규모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진중한 시선을 보내며 레비앙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는 현준.
“전면전이 시작되었을 때, 태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 그거 설마…….”
“그 설마입니다. 비행선들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들려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부디, 그의 기억이 틀렸기를. 오래되어서 희미한 기억이 잘못되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 *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찬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전해지는 듯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레비앙은 근처에서 학살이 있었다고 했다.
‘바람에 살기가 묻어 있다.’
피 냄새는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람에 살기가 섞여 있다. 불과 이틀 전에 있었던 학살에서 흘러나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친위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혈이 불쑥 나타나 보고했다. 이번에는 50명 정도 되는 숫자의 친위대가 동행했다.
가능하면 그들을 길드 사무소 단지의 방어 병력으로 남겨두고 싶었지만, 길드원들을 동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들을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경 15㎞를 정찰한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면 즉시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사혈과 친위대원들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반인들이라면 항의할 정도의 정찰 규모였지만 수준 높은 헌터들이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데다가 현준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그들은 군말 없이 명령에 따랐다.
1시간이 지났다. 현준도 정찰에 동참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현준은 답답한 마음에 무전기를 꺼내 입가로 가져갔다.
“레비앙. 이 근처에서 마력 반응이 잡힌다고 하지 않았었나?”
마력 레이더가 반응하지 않았다면 굳이 여기 내려서 정밀 정찰을 시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미하지만…… 분명 마력 반응이 잡혔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알 수는 없나?”
-불가능합니다. 강화된 마력 레이더로도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지만, 현준은 고개를 젓고는 탐색을 재개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제 폐하! 의심스러운 마력 반응을 찾았습니다!”
친위대장, 사혈이 달려와 보고했다. 드디어 성과를 볼 수 있는 것일까? 현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안내해.”
“예!”
사혈은 의심스러운 마력 반응이 포착된 곳으로 현준을 안내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희미하지만 불온한 마력이 조금씩 느껴졌다.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면 모르고 스쳐 지나갔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두었다.
‘최소한 레비앙 수준의 은폐 술식인 것 같은데…….’
사혈이 말한 좌표에 상당히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의 반응이 희미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
‘저 너머에…… 적이 있다…….’
마력 반응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이 경고했다. 현준이 걸음을 멈추고 지옥참마도로 손을 가져가자 사혈도 검을 뽑아 들었다.
“온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천 개의 창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알아서 피해라.”
“제 걱정은 하지 마시옵소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검은 창이 우르르 쏟아져 꽂혔고 이어서 허공이 갈라지면서 칠흑의 제복을 입은 인베이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솔저급은 보이지 않았다. 인베이더들만 여섯.
-SS급 넷에 S급이 둘.
지옥참마도가 스캔을 끝마치고 보고했다.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와라.”
마력을 끌어 올렸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시작부터 시든밀러와 듀렌달의 가호를 사용했다. 단숨에 끝낼 생각이었다. 땅을 박차고 깊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날카롭고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가장 먼저 달려들어 오는 인베이더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오러 블레이드 간의 충돌과 함께 인베이더 쪽의 검이 오러 채 절단되었다.
“이, 이럴 수가!”
인베이더가 경악했다. 이제 현준의 오러 블레이드는 인베이더의 목을 베었다.
핏물이 튀고 쓰러지는 인베이더의 어깨너머로 다른 인베이더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