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49장 대격변(4)
에릭과 플레임이 함교로 합류한 것은 하빈스의 숨이 끊어진 직후였다.
“레비앙. 함교를 장악했다. 공격을 중단해도 돼.”
현준은 공중항모의 함교와 연결된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무전기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행이군요. 실드가 박살 나고 동체도 꽤 손상을 입은 상태라…… 조금 불안해하던 찰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유지했던 탓에 레비앙의 목소리는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지상에는 여전히 적이 많습니다. 대공 방어는 무력화시켰지만, 아직 저항 수단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간을 벌어 봐. 나는 이 비행선의 제어 권한을 장악해볼 테니까.”
술식을 해킹할 생각이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질드레에게서 여러 술식을 배운 현준은 자신감이 충분했다.
-초정밀 폭격으로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초정밀 폭격 술식을 사용하려면 많은 집중력이 소모되고 마력 소모도 부담스러울 정도지만 레비앙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통신을 끝낸 현준은 통제단으로 갔다. 바로 술식 해킹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제기랄.’
실패했다. 현준은 욕설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공중항모와 달리 이 비행선은 모든 기술이 침략사령부의 것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제어 권한을 빼앗는 게 힘들었다. 불가능한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자폭 정도는…….’
마력을 조금만 더 소모하면 자폭 절차 정도는 강제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쓸 수 없다면 파괴한다.’
자폭을 진행하는 건 많은 마력을 소모했지만,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폭 절차를 밟고 에릭, 그리고 플레임과 합류하여 지상으로 내려갔다.
지상의 도시에도 적지 않은 수의 적들이 있었지만 현준과 에릭, 그리고 플레임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도시의 정리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강현준 위원. 큰일 났습니다.”
에릭이 황급히 다가왔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심각한 일이 터진 것 같았다.
“중국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요?”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러시아와는 달리 8개 도시가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는군요.”
남미 대륙에서 은밀히 빠져나간 인베이더들이 소수가 아니었던 모양. 아니면, 대규모 레이드 게이트를 열 수 있을 만한 실력의 차원 마법 능력자가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아직 중국에서 지원 요청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전투 지역이 빠르게 확산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중국으로 이동하자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강현준 위원.”
현준의 물음에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당연히 흔쾌히 응할 줄 알았던 현준이 고개를 젓자 에릭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현준 위원. 중국이 ‘필드’가 되면 아시아가 위험합니다. 러시아의 상황이 그나마 양호하니…… 우리는 중국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아뇨.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짧은 한숨과 함께 현준이 손가락으로 남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위원장.”
에릭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맙소사…….”
검붉게 물들고 갈라진 하늘에서 거대한 비행선이 하나씩 내려오고 있었다.
“차원 관문이 열렸습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동서남북의 하늘이 모두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것처럼 하늘이 갈라지고 그 속에서 칠흑의 비행선이 거대한 동체를 슬쩍 내밀고 있다.
“이럴 수가…… 러시아마저…….”
“비행선 크기가 다 다르긴 하지만, ‘하나’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방금 전에 해봐서 알지요? 저런 게 지금 최소 5척 이상 튀어나왔습니다. 러시아에서도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에릭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현준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비행선 하나와 그 휘하의 지상 병력을 정리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한 번에 쏟아져 나온다면 대응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2척이 이쪽으로 오고 있네요.”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제기랄…….”
욕설이 튀어나왔다. 에릭은 말없이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고 현준은 공중항모와 연결된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레비앙. 비행선 2척이 여기로 오고 있는데, 보여?”
-예. 주시 중에 있습니다. 둘 다 방금 전에 상대했던 비행선에 비해서는 조금 작지만 지금 이 공중항모의 스펙으로는 상대하기 힘들 겁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정확한 측정 자료가 없어서 장담하기 힘들지만, 조금 전의 전투로 짐작해 볼 때, 지원 없이 2시간 이상 버티는 건 무립니다.
타임 리미트가 2시간이라…… 그동안 저 2척의 비행선을 파괴해야 한다.
“조금 빡세네…….”
다시 플레임을 타고 비행선까지 접근할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일까? 비행선들이 천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레비앙. 보고 있나? 아무래도 전투선이 아니라 상륙선인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상륙선 수준의 무장이라면 이 공중전함으로도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합니다.
전투선 2척이 붙었다면 레비앙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륙선이 온 것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 동안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지상에 착륙한 상륙선에서 쏟아지는 적들의 수를 본 순간 현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릭이 말했다. 현재 SSS급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적의 수가 많았다.
-최소 1만이군.
지옥참마도가 짧은 탐색을 끝마쳤다.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가 많아 보이기는 했는데, 설마 1만이나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레이드 게이트가 아니라 상륙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최소 솔저급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최소 A급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 병력이라는 걸 의미했다. 일반적인 마수와는 다르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걸…… 위원장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강현준 위원…… 그건 그렇지만 이건 자살행위입니다. 공중항모가 지원해 준다고는 하지만 저희들 만으로는 저 대병력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겨우 셋이라는 말입니다!”
정의로운 성격의 에릭마저 절망할 정도로 적의 규모는 엄청났다. 하지만 현준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겨우 셋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조금 전에 전투선을 공략하면서 플레임이 에릭과 함께 창고를 털고 루팅한 것들이었다.
수는 총 6개.
검은 마정석 1개를 사용했을 때도 적지 않은 수의 군단이 호출에 응했으니, 이번에도 기대를 걸어볼 법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뒤에는 군단이 있으니…….”
마력을 일으켰다.
“물량은 저도 자신 있다 이겁니다.”
이제 무한의 군단을 소환할 차례다.
-아콘이 위대한 명령으로 차원 관문을 개방합니다. 무한의 군단을 호출합니다.
차원 관문이 열렸다.
-군단, 혈십자 연맹 기사단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군단, 특수전 경보병 여단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군단, 높은나무 저격 여단의 일부가 소환에 응합니다.
-영웅, 얼음 검성이 소환에 응합니다.
붉은 십자가를 내세운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교적 가벼운 무장의 보병들이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궁병대와 얼음 검성이 나타났다.
“소, 소환까지…….”
5천이 넘어 보이는 대병력의 출현에 에릭이 경악했다. 설마 소환 능력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전진하라!”
무한의 군단 병력은 침략사령부의 솔저들을 향해 전진했고 얼음 검성은 현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음 검성, 하이펠입니다.”
백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그는 외모는 달랐지만, 블라디미르가 생각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마력 반응으로 볼 때 최소 SSS급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군단 소환사님의 명령에 따라, 적들을 섬멸하겠습니다.”
하이펠이 전선에 합류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충분한 수가 소환되었다면 뒤에서 구경만 해도 되겠지만 5천이라는 숫자는 분명 적지는 않은 수였으나, 1만이라는 적들의 수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다.
“이걸로 밀리지는 않을 겁니다. 위원장.”
“강현준 위원…… 당신에게 한계라는 게 존재하기는 합니까?”
에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현준은 대답 대신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에릭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검을 뽑으며 앞으로 향했다. 플레임은 본체 상태로 하늘에 날아올랐다.
교전이 시작되었다. 얼음 검성, 하이펠은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혼란을 유도했고 플레임은 흑염을 쏟아내면서 군단을 엄호했다.
상륙선에서는 비행 병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플레임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로 전투가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적의 비행 병력이 출현했다!”
혈십자 연맹 기사단의 누군가 외쳤다. 상륙선에서 전투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수가 아주 많았다. 순식간에 제공권을 상실했고 플레임은 수세에 몰렸다. 공중 병력의 지원에 힘입어 솔저들이 진격해왔다.
공중항모의 지원을 기대하는 것도 힘들었다. 레비앙은 상륙선 2척을 상대하고 있었다.
전투선에 비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상륙선도 만만치 않은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레비앙도 밀리지 않는 상황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왼쪽을 맡아줄 수 있겠습니까?”
현준이 에릭을 슬쩍 보며 말했다. 오른쪽은 정예화된 적들이 많았다. SSS급이라고는 하지만 에릭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왼쪽을 맡긴 것이다.
에릭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왼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주인아.
“그렇다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전장의 오른편을 응시하는 현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우선은 지휘관 계급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적의 수가 많고 마력 반응이 널려 있다고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마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찾았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준은 마력을 일으켜 가호를 호출했다.
-라이키리의 빛이 당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합니다. 빛과 함께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적을 꿰뚫으세요.
하나의 빛줄기가 적진을 관통했다. 전격의 랜스가 지휘를 하고 있던 인베이더의 복부를 찔렀다.
꿰뚫는 것과 동시에 전격이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일격에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현준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드러나 버렸다.
“이기어검!”
그리고 도살자 단검이 위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