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47장 상위 포식자(3)
폭풍처럼 쏟아지는 검격에 블라디미르는 무력하게 당했다. 크리처로 변형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지옥참마도의 흡혈 능력으로 소량이지만 마력을 계속 수급하고 있던 현준은 마력이 일정선을 회복하자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가호를 아끼지 않고 쏟아붓자 블라디미르는 결국 치명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크리처 형태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변형을 한 게 약점이 되고 말았다.
‘덩치가 커진다고 해서 유리해지는 건 아니지.’
특히나 여러 포인트를 공격하는 ‘환영검’과도 같은 기술을 구사하는 현준에게 덩치 큰 적은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크르르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10분이 흐르자 블라디미르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이었던 흔적인 얼굴을 들어 알파팀 헌터들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냈지만 크리처가 된 그를 도와줄 헌터는 없었다.
처음에는 명령에 의해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알파팀 헌터들조차 철저하게 블라디미르를 외면했다.
“네 편은 이제 없다. 블라디미르.”
현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떨궜다. 이제 남은 마력이 없었다.
세뇌 술식은 계속해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 블라디미르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사면초가야.”
차갑게 내뱉으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러 목을 베었다. 재생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목이 날아가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크리처 형태의 블라디미르는 머리를 잃고 숨이 끊어지기 무섭게 흑염에 타올라 소멸했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검은 마정석 하나만이 남았다.
“너희들은 어쩔 생각이야?”
블라디미르가 남긴 검은 마정석을 회수한 현준은 알파팀 헌터들을 보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느냐에 따라, 피를 더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알파팀 헌터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에게 대답을 미뤘고 결국에는 블라디미르를 대신할 수 있는 최종 결정권자인 부사령관 세르게이가 나섰다.
“저희는 더 이상의 교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너는?”
현준의 물음에 단정한 외모에 안경을 끼고 있는 남자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파팀의 부사령관을 맡고 있는 세르게이라고 합니다. 혈맹과의 연관점이 발견된 현시점부터 블라디미르는 더 이상 저희 알파팀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 점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르게이의 말에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듣고 있다 보니 말이 이상했다.
“내가 만만해 보이냐?”
기세를 끌어 올렸다. 블라디미르를 상대하면서 마력을 많이 소모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큭…….”
날카로운 폭풍과도 같은 기세를 받아낸 세르게이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블라디미르와 페트렌코를 이긴 게 단순 운은 아니라는 건가?’
세르게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블라디미르가 무너지는 모습은 두 눈으로 봤지만, 미약한 불신이 남아 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묻는다. 내가 만만해 보여?”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강현준 씨.”
“그런데 그딴 식으로 말해?”
통역 술식 덕분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다. 현준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남의 나라까지 와서 학살을 벌여 놓고서, 이제 와서 모르는 일이라 하고 잡아떼면 끝이야?”
오늘 이곳에서만 2천여 명이 죽었다. 이게 말이 되나? 2천여 명을 죽이고 꼬리 자르기를 하겠다고? 자기네들만 발을 빼겠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이건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충분해. 그렇게 생각 안 하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오늘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사죄와 배상을 할 것입니다. 제가 성급하게 발언한 걸 용서하시지요.”
세르게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러시아를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인 SSS급 헌터, 블라디미르를 잃었으니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배상이 없으면…… 알지?”
“물론입니다.”
“가 봐.”
“감사합니다.”
알파팀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군용 수송기에 탑승을 시작했고 세르게이 또한 마지막으로 탑승을 위해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현준이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널 보내주는 의미를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세르게이.”
일이 어긋나면 어디에 있든 단숨에 찾아가서 죽일 수 있다는 뜻. 숨겨진 의미가 잘 전달된 것인지 세르게이는 잠깐 발걸음을 멈춘 뒤, 현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제가 최선을 다해 해결하겠습니다.”
현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뒤에서야 세르게이는 군용 수송기에 탑승을 끝마칠 수 있었다.
‘경고는 했지만, 보험을 들어두는 것도 좋겠지.’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마력을 끌어올려 가호를 발동했다.
-하사신의 교활한 그림자가 당신의 적을 향해 손짓합니다. 충직한 어둠은 당신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겁니다.
검은 그림자 분신이 생겨나 군용 수송기로 숨어들었다. 그림자 분신은 장거리 이동에는 한계가 있지만, 정보 전달 거리에는 제한이 없었다. 복귀시킬 때는 소멸을 시키면 되는 것이니, 지금 붙여두면 분명 유용하게 쓰인다.
“형님.”
군용 수송기가 이륙하고 플레임이 상공에서 내려왔다.
“이대로 보내줘도 괜찮은 겁니까?”
“그림자를 붙여뒀으니까, 상관없어.”
그림자 분신이 붙었으니, 세르게이가 단순히 다른 마음을 품는 것까지는 간파하는 건 무리라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알 수 있다.
“그나저나 특수 경찰국이 조금 늦네.”
따로 연락받은 건 없었지만, 러시아의 SSS급 헌터, 블라디미르가 예고 없이 찾아와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걸 보고 받았을 것이다.
특수 경찰국장 송태식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지원 병력을 편성해서 보냈을 확률이 높았다.
-주인. 멀리서 다수의 마력 반응이 접근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옥참마도가 다수의 헌터 병력이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차량들에서 특수 경찰국 병력이 내렸다.
“맙소사, 이게 대체…….”
가장 먼저 시위대와 함께 경장갑차에서 내린 S급 보조계 헌터, 이선우는 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할 말을 잃었다.
“조금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정예 병력 소집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뒤이어 차량에서 내린 특수 경찰국장, 송태식을 보며 현준이 질책하듯 물었다. 태식은 크게 변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블라디미르가 보이지 않는군요.”
태식이 말했다. 설마 세계 최강의 남자, 러시아의 SSS급 헌터 블라디미르가 현준에게 당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제가 처리했습니다.”
“네…….? 블라디미르를요…….?”
현준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의 여파는 엄청났다. 태식은 깜짝 놀랐다. 그만큼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무거웠다.
“그거 때문에 할 말이 많습니다. 여기 수습은 부하한테 맡기고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태식은 부하를 불러 현장의 뒷수습을 맡긴 뒤, 현준과 함께 가까운 특수 경찰국 지부로 향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하나 있었다. 태식이 특수 경찰국장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회의실 하나를 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현준은 블라디미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블라디미르가 혈맹과 관련되어 있었다니…….”
“아마 세뇌당했을 겁니다. 러시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고요.”
“SSS급 헌터를 세뇌할 정도의 마법 기술력을 혈맹이 보유하고 있다는 건 상당히 위협적인데…… 큰일이군요.”
좋지 않았다.
“아무튼, 제가 해야 할 일은 끝냈습니다. 남은 건 외교적인 문제 같은데 이 부분은 알아서 처리하실 거라 믿습니다. 세르게이한테도 잘 말해두었으니까요.”
알파팀 부사령관, 세르게이는 처음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현준의 경고에 결국 태도를 바꿨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인사를 받으며 회의실을 벗어났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플레임이 따라붙었다.
그는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본체로 돌아갔다. 현준은 흑염룡을 타고 수원의 길드 사무소 단지로 돌아갔다.
* * *
길드 사무소 단지로 돌아온 현준은 곧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침실에 들어선 그는 지옥참마도를 옆에 놓아두고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전투 중에 들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데우스와의 동조율이 상승하면서 1차 해방을 했다는 목소리를 들은 건 확실했다.
1차 해방의 효과는.
‘이제는 운명 간섭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
절반이라는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하겠지.’
지금까지 데우스의 가호인 ‘운명 간섭’ 덕분에 넘길 수 있었던 위기가 적지 않았다. 현재 현준이 사용할 수 있는 전생의 가호 중에서 가장 초월적인 힘을 지닌 가호를 묻는다면 당연 데우스의 ‘운명 간섭’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다만 그 효과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설정할 수 없다는 게 한 가지 흠이었다. 그야말로 도박이나 다름없는 기술이다.
‘남용하면 안 될 것 같다.’
현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소모 역시 부담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현준은 일단 이 가호를 자주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데우스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호랑이다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있었던가?
그날 현준은 일찍 잠에 빠져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생의 홀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붉은 가죽이 덮여 있는 철문이 보였다.
문의 중앙에는 ‘운명을 거스르는 자’라는 이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데우스…….”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그는 우주라는 느낌이 드는 칠흑의 공간 위에 서 있었다.
-환영한다.
묵직하면서도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데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여전히 검은 그림자에 가려져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데우스.”
전생들과의 만남은 익숙해졌다. 현준은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데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있겠지. 질문에 답해주겠다.
“우선, 첫 번째로 당신과의 동조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보통 동조율을 올린다는 건,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가호를 사용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 즉, 정해진 운명에 거스를수록 동조율이 올라간다.
설명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대강 이해하는 데는 충분했다.
-강현준. 너는 잘하고 있다. 운명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 멸망의 운명이라는 것도 변했습니까?”
현준의 날카로운 질문에 데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절망적인가 보네요.”
-희망을 가져라, 네겐 재능이 있고 운명은 변할 것이다.
“재능이라…….”
-99만의 전생이 있었다. 99만 번의 멸망이 반복될 동안, 우리는 전생 시스템을 구축했고 서로의 재능을 공유했다.
갑자기 시작된 설명. 일단 들어보자.
-하지만 모든 재능을 공유할 수는 없었다. 서로 충돌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강현준.
데우스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네겐 모든 재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까지의 환생들과는 다른 재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