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47장 상위 포식자(2)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칠흑의 마력에 현준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건 위험하다.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 본능이 경고했다.
‘이건…….’
검은 마정석의 마력이 분명했다. 최근 들어서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생각하지도 않고 과하게 독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싶었는데, 역시 침략사령부의 인베이더로부터 세뇌를 당했던 모양이었다.
‘세뇌를 당했다, 이거지?’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걸 잘만 활용하면 혈맹과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국가의 대표 헌터를 세뇌시켰으니, 좋아할 리가 없지.’
이제 세뇌당했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검은 마정석의 마력 농도로 보아 크리처 시술까지 받은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몰아붙일 수밖에 없다.
여기 있는 알파팀 헌터들이 블라디미르가 크리처 형태가 되는 걸 보기만 하면 게임은 끝난다.
현준은 차분하게 두 눈에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1차 해방된 리퍼의 가호가 발동되었다.
취약점을 뜻하는 붉은 점이 보여야 정상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완벽에 가까운 방어 자세다.’
공격을 멈추지 말았어야 했나?
‘아냐, 잘못하면 내가 당했을 수도 있다.’
조금 전의 마력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반격당하여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마력 반응이었다.
‘일단은 마법으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마력으로 형성된 마법서가 앞에 펼쳐지고 현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그리고 화염 마법의 강화.
“파이어 스피어.”
부여하는 마력의 양에 따라 고위까지도 수준이 올라가는 마법을 완성했다. 허공에 화염을 머금은 창 10여 개가 생성되었다.
한 번 더 마력을 운용하자 파이어 스피어들이 일제히 블라디미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소용없다.”
블라디미르가 손을 휘젓자 냉기가 일어나 화염의 창을 모조리 얼려 버렸다.
‘3배 강화한 고위 파이어 스피어도 접근조차 못 하는 건가?’
다시 지옥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되면 근접전밖에 방법이 없다. 현준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블라디미르를 향해 몸을 던졌다.
-라이키리의 빛이 당신을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합니다. 빛과 함께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적을 꿰뚫으세요.
다시 한번 라이키리의 가호. 무서울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이 빠져나갔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냉기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고 블라디미르도 더 이상 냉기로는 현준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얼음검을 뽑아 들었다.
“와라!”
블라디미르가 소리쳤다. 얼음검에서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냉기에 대한 절대 지배는 특수 능력에 불과했고 그의 본체는 ‘전투계 헌터’였다.
망설이지 않고 얼음검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근접전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콰앙!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하면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후폭풍으로 충격파가 일어났고 흙먼지가 솟구치면서 지켜보고 있던 알파팀 헌터들의 시야를 가렸다.
“사령관님!”
“저희도 개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몇 명이 불안한 것인지 나서려고 했지만, 조장급 헌터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라. 사령관님이 당하실 리 없다.”
“우린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위치를 고수하도록.”
하지만 흙먼지가 가라앉는 순간 드러난 광경은 알파팀 헌터들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이는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였다.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적지 않게 당황한 것인지 품고 있던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뱉어냈다.
SS급 최상위 헌터인 페트렌코를 죽일 정도니까 어느 정도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예상외였다. 설마 SSS급 중견,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던 자신이 일격에 내상을 입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현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시든밀러와의 1차 해방 이후, 동조율이 더욱 안정되면서 지금에서야 고유 검술을 제대로 펼치게 되었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고유 검술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었다. 상대 오러의 취약점을 공략해 마력의 흐름 자체를 어지럽혀 내상을 입히는 검술이었다.
블라디미르가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분노해서 마력의 흐름이 미약하게 거칠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고유 검술의 효과가 더욱 컸던 것이다.
‘이대로 몰아붙인다.’
현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블라디미르가 일격을 받아내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현준은 땅을 박차고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환영검!”
시동어를 외치는 것과 동시에 12개의 오러 블레이드가 동시에 블라디미르를 노렸다.
단순한 협공이 아닌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공격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얼음검을 휘둘러 모든 공격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냉기를 사용해 반격까지 했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큭!”
고유 검술의 효과로 인해 현준의 오러 블레이드를 받아낸 블라디미르의 내상은 조금씩이지만 깊어갔다.
“쿨럭!”
순식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짧은 시간 만에 수십의 검격을 주고받았을 때였다.
결국 블라디미르는 입 밖으로 붉은 피를 한 웅큼 토해냈다. 겉으로 보이는 부상은 없었지만, 고유 검술에 계속해서 당하면서 내상이 축적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블라디미르가 비틀거리는 순간 현준의 시야에 붉은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깊어진 내상으로 인해 빈틈이 생긴 것.
“놓치지 않는다!”
단숨에 마력을 끌어 올리며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블라디미르 또한 얼음검을 휘둘렀지만.
“어딜!”
“큭!”
현준이 오러 실드를 휘둘러 얼음검을 쳐냈다. 블라디미르의 오른팔이 튕겨 나가며 얼음검이 하늘로 떠올랐다. 지옥참마도는 블라디미르의 심장을 노렸다.
“당할 것 같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블라디미르가 기형적으로 허리를 꺾었다. 척추가 부러질까 싶을 정도로 직각에 가깝게 뒤로 꺾은 것.
헌터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기형적인 움직임이었다.
“제기랄!”
칼날은 갈비뼈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였다.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데우스의 절대적인 의지가 운명에 간섭합니다. 고통의 지배자, 피어의 가호를 강제 발동시킵니다. 발동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마력은 무시합니다.
데우스의 가호가 집중력 소모가 커서 전투 중에는 사용하기 힘들었던 피어의 가호를 강제로 발동시켰다.
“크, 크아아아아악!”
효과는 굉장했다. 인베이더조차 온전히 견디지 못하는 사상 최악의 끔찍한 고통을 블라디미르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SSS급 헌터라고는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신체적으로는 인간을 초월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니었다. 고통의 지배자, 피어가 주관하는 연회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데우스와의 동조율이 1차 해방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이제 마력 잔량의 절반을 소모하는 것으로 운명에 대한 간섭을 강제로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긴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1차 해방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흐허어어억!”
블라디미르는 치명적인 고통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빈틈투성이. 지금이 기회다.
“환영검.”
12방향에서 12개의 환영검이 블라디미르의 전신을 노렸다. 찰나의 순간, 오러의 빛이 번뜩이더니 핏줄기가 솟구쳤다.
“큭!”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은 블라디미르가 방어를 시도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2개의 환영검을 막아내지 못했고, 왼팔과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갔다.
현준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지옥참마도를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연속 공격을 준비했다.
‘최후의 검성’이라는 이명을 가진 시든밀러에게 배운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내가,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다시 블라디미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고 지옥참마도를 휘둘렀지만, 칼날이 목을 베기 직전에 블라디미르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터져 나오는 게 더 빨랐다.
검은 마력이 품은 강한 물리력에 현준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터져 나오려는 짧은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몸을 기형적으로 꺾으며 변형을 시작하는 블라디미르의 모습이 보였다.
“크리처인가…….”
조금 전에 붉은 눈동자를 보고 검은 마정석의 마력을 느끼면서부터 예상하고 있던 전개였기 때문에 현준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알파팀 헌터들은 달랐다.
“사령관님!”
“이건 크리처의 마력이다!”
“접근하지 마라!”
“물러나라! 오염될 수도 있다!”
알파팀에서도 혈맹과의 전선에서 싸웠던 헌터들이 블라디미르에게 접근하려는 동료들을 말렸다.
-크르르.
불과 1초가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이제 블라디미르에게서 ‘인간’이었던 것의 모습은 찾기 힘들 정도였다.
창백한 피부의 얼굴이 그나마 인간의 흔적이었고 신체는 2m 덩치의 차가워 보이는 백색 슬라임이 되어 있었다.
“보이나, 알파팀? 너흰 모두 혈맹의 발아래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현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괴물이 되어버린 블라디미르를 알파팀 헌터들은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눈으로 응시했다.
“크리처가 분명하다…… 대체 왜 사령관님께서…….”
알파팀의 부사령관을 맡고 있는 SS급 최상위의 세르게이는 다른 의미로 인간을 포기한 블라디미르의 몰골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배신인가…….”
“사령관님께서 배신하실 리 없습니다! 세뇌가 분명합니다!”
세르게이의 혼잣말에 그의 부관이 대답했다.
“어느 쪽이든, 우리 알파팀의 수치다. 반드시 만회해야 한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강현준에게 향했다. 현준은 블라디미르를 보며 전투 자세를 정비하고 있었다.
“역시 너도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냐? 블라디미르?”
대답이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크리처도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변형과 동시에 세뇌 술식이 폭주하면서 목소리를 상실한 경우였다.
“그럼, 하나만 묻자.”
한 걸음, 블라디미르를 향해 다가갔다.
“크리처로 변형하면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그아아아아앗!
조롱의 뜻을 알아차린 걸까? 블라디미르가 분노에 찬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슬라임 같은 몸뚱이에서 수십 개의 촉수를 뿜어냈다.
날카로운 촉수의 끝에는 오러가 깃들어 있었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촉수들의 모습에서 현준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널 압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