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145화 (145/217)
  • # 145

    42장 전환점(3)

    혈맹 남미 관구의 수석 집행관 펠리아크가 러시아 알파팀 사령관, 블라디미르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는 동안 현준은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전생의 홀’인가…….”

    수많은 문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현준이 눈을 떴다. 이제는 익숙해진 ‘전생의 홀’이었다.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들을 정리한 직후, 구국의 혈기사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조만간에 전생의 홀에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했었다.

    “예상대로네.”

    눈앞에 있는 피가 튀어 있는 철문의 중앙에는 ‘구국의 혈기사’라는 이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번에 날 부른 건 구국의 혈기사인가…….”

    현준은 짧은 중얼거림을 끝내며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조금은 어둡다고 느껴질 정도의 조명 아래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갑옷 조각들이 보였다. 핏자국 등 거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갑옷 조각들을 지나치자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의 넓은 벽면에는 찢어지고 피가 묻어 있는 국기가 걸려 있었다. 사연을 간직한 것 같은 국기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던 판금 갑옷의 기사가 몸을 돌렸다.

    “환영한다. 나의 환생이여. 나는 구국을 위해 명예를 버리고 잔혹한 피의 길을 걸은 기사, 게슈타인이라고 한다.”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 나왔다. 면갑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갑옷은 여기저기 붉은 피가 묻어 있었고 거친 전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반갑습니다. 게슈타인.”

    현준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예의가 바르군. 마음에 든다. 이쪽으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게슈타인이 옆으로 비켜서자 현준은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에 다가가 섰다. 벽면에 걸려 있는 국기의 정면이었다.

    “멋지지 않은가? 내가 지키고자 했던 왕국의 국기다.”

    슬픈 목소리로 말하는 게슈타인. 그가 ‘전생’이 되어 현준의 눈앞에 나타난 것만 봐도 이 짧은 이야기의 끝을 알 수 있었다.

    “지키기 위해서 모든 불명예를 감수했다. 나는 기사였지만 구국을 위하여 그 어떤 잔혹한 수단도 피하지 않았다.”

    왕국의 국기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게슈타인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 나왔다.

    면갑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지키지 못했다.”

    게슈타인이 고개를 숙였다.

    “절망의 역사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환생이여. 내가 네게 힘을 주겠다.”

    “조건은 뭡니까?”

    이번에는 또 어떤 방법으로 고문을 당할지 궁금했다. 운이 좋다면 이미 ‘조건’을 충족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큰 희망을 가지지는 않기로 했다.

    “자네는 이미 내 가호를 받기 충분한 동조율을 확보했다.”

    “정말입니까?”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현준의 목소리에서 활기가 흘렀다.

    “구국을 위한 행동으로 나와의 동조율을 올릴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국 행위가 뭔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게슈타인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구국 행위는 침략사령부를 척살하는 걸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내 가호는 전해졌다. 그 어떤 더러운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구국이라는 이름이 함께하는 한, 윤리가 앞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게슈타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비록 추앙받는 영웅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피의 길을 걷다 보면 끝내는 구국에 도달할 것이다!”

    날카로운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의식이 암전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보고타의 숙소였다.

    “끝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전생의 마력이 느껴졌다.

    -게슈타인과 구국의 의지가 함께합니다. 구국의 이름하에 잔혹한 수단이 묵인될 것입니다.

    -동조율에 따른 현재 해방도는 1단계입니다. 비윤리적인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구국의 이름이 함께한다면 주변인들은 당신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목소리의 설명대로라면 혈맹이나 침략사령부가 관련된 일이라면 다소 잔혹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주변인이 적대관계로 돌아설 걱정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해방도가 1단계라고 말하는 걸 보니 동조율이 오를 때마다 해방 단계가 오를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가호의 효율도 더욱 좋아질 게 분명했다.

    “나쁘지 않아.”

    전투에 도움이 되는 가호를 얻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보조적인 지원이 가능한 가호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현준은 간단하게 샤워를 끝내고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창가에 나가 바람을 쐬며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오전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정오에 일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눈살을 찌푸리며 스마트폰 메모장을 켰다. 그의 기억대로 정오에 보고타 토벌 지휘부에서 현재의 콜롬비아 상황에 대한 짧은 브리핑이 예정되어 있었다.

    현준은 독립 토벌권이 있기도 하고 위원회의 자료실에서 언제든지 정보를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참석할 필요는 없었지만 잔류한 러시아 알파팀 헌터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수행하겠습니다.”

    위원회의 정보망에 접속하여 브라질의 블라디미르의 동태를 살피는 태민을 대신해 길드의 집행부장, 이규환이 수행원으로 따라붙었다.

    브리핑이 예정된 토벌 지휘부는 멀지 않았다. 분주히 발걸음을 옮겨 브리핑룸으로 들어서는 현준을 향해 헌터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사람이 한국의 SS급 헌터 강현준인가?”

    “러시아의 페트렌코를 묻어버렸다고 하던데…….”

    “쉿. 말조심해.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헌터들도 바보가 아니다. 현준과 페트렌코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있었다는 건 어느새 보고타에 모인 헌터들 사이에 소문이 완전히 퍼져 있었다.

    이번에 러시아의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 250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역시 보고타에서는 모르는 헌터가 없을 정도였다.

    과장하기 좋아하는 몇 명은 페트렌코가 이끄는 알파팀 헌터들이 외부에서 강현준과 재충돌이 있었고 교전 끝에 알파팀이 전멸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소문을 퍼뜨렸지만.

    “강현준이 초신성이라고는 하지만 SS급 하위에 불과한데, 동급의 최상위 경지에 오른 페트렌코를 어떻게 제압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페트렌코가 패배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알파팀 헌터 250명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강현준과 동행한 길드원들은 다 멀쩡한 것 같은데요?”

    대부분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현준이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 250명을 죽였다는 소문은 그저 허황된 것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어.’

    브리핑룸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앉은 현준은 헌터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이든이 방패가 되어주기로 약속을 했지만, 여론이 악화되면 귀찮아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보고타에 모인 헌터들은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들을 전멸시킨 용의자를 현준이 아닌 제3의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시선이 모여서 귀찮아지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준과 달리 일부 헌터들은 현준을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이었다.

    ‘강현준…… 힘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SS급 하위? 웃기지 마라. 교묘하게 마력 있는 게 분명하다. 정확히는 알기 힘들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해.’

    ‘초신성의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페트렌코가 살해당해도 이상할 건 없지. 문제는 어떻게 살해당했느냐다. SS급 최상위와 250명의 최정예 헌터들을 어떻게 도륙한 거지?’

    50명 정도의 헌터가 모여 있는 브리핑룸. 그중에서도 S급 상위 이상의 헌터 몇 명의 시선이 현준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강현준 또한 의식했지만 의심하는 속내까지 읽지는 못했다.

    ‘한국의 초신성…… 조심해야겠군.’

    ‘경계할 필요가 있다.’

    몇 명은 현준을 향해 경계심을 품었다. 그런 이들 중에서는 러시아 알파팀의 잔류 인원들도 있었다.

    ‘강현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이반은 태연하게 행동하는 현준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이윽고 이든이 단상으로 이동하자 헌터들은 현준에게 향했던 시선을 조심스럽게 거뒀다.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강현준 씨의 활약 덕분에 보고타 사수에 성공했고 주변도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상태입니다만, 콜롬비아 전체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이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모컨을 들어 올려 버튼을 누르자 등 뒤의 커다란 모니터가 켜지면서 콜롬비아의 지도가 나타났다.

    절반 이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붉은 구역이 마수들의 땅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러시아의 알파팀은 다 어디로 간 겁니까?”

    누군가 손을 들고서 이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페트렌코와 러시아의 알파팀 헌터 대부분이 살해당했다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건 순수한 질문의 의도가 아니라, 미국의 공식적인 발표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보고타 남쪽에서 무인 정찰기가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독단적으로 토벌을 시도하다가 마수들에게 살해당했거나 혈맹의 공작으로 의심되는 부분입니다.”

    지금 이든이 하는 말은 곧 미국의 발언이었다.

    ‘미국이 이쪽 편을 들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알파팀.’

    현준의 시선이 향한 곳에 러시아 알파팀의 S급 헌터, 아이반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강현준의 편에 서기로 한 것입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아이반 씨. 저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뿐, 그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미국이 강현준의 뒤에 있는 겁니까?”

    “아이반 씨. 강현준 씨가 없었다면 보고타는 마수 구역이 되었을 겁니다. 실례되는 언행은 자제해 주세요.”

    차분하게 대응하는 이든의 모습에 아이반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브리핑룸을 떠났다.

    “러시아에서는 짐작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규환이 말했다. 현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알파팀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헌터들 간의 소문에서는 절 지목하지 않고 있지만, 저쪽에서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범인은 접니다.”

    “적대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까요?”

    러시아는 던전 레이드 시대가 시작되고, S급 이상의 헌터 전력 다수를 확보하면서 강대국의 위치로 떠올랐다.

    이런 국가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건 위험하다고 규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준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적대관계가 형성되겠지만 대놓고 적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 위원회에 소속된 현준을 상대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경우 미국과 UN 특수 기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컸다.

    “희박하지만 러시아가 전면전을 선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국가와 개인의 전면전.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경우의 수는 아니다.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높은 확률로 암살자 정도는 보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수의 암살자를.

    하지만.

    ‘전부 시체가 되겠지.’

    현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내 앞길을 막는다면, 박살 내주마. 설령 국가라고 해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