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42장 전환점(2)
힘없이 고개를 젓는 페트렌코의 목을, 지옥참마도가 꿰뚫었다. 붉은 피가 터져 나왔고 페트렌코의 목이 힘없이 꺾였다.
그리고 은신의 장막을 찢고 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무한의 군단 또한 6백여 명 규모의 러시아 육군을 박살 내고 차원 관문을 통해 귀환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준이 차분히 마력을 끌어 올리자 하사신의 가호가 발동되면서 검은 그림자들이 그와 관련된 모든 증거를 지웠다.
“이제 ‘흡수’를 해볼까?”
수많은 사람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전생의 방에서 겪은 경험 탓에 감정의 상당량이 마모되어 버린 탓이다.
짧은 혼잣말과 함께 베히모스의 가호를 사용하여 시체들에게서 영혼을 흡수했다.
-다수의 강인한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마력의 축복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1차 해방 이전까지는 신체 강화로 축복이 변경됩니다.
축복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마력의 축복은 이제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공허의 눈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현준의 몸에 흡수되면서 신체가 강화되었다.
-주, 주인. 무슨 짓을 한 거냐? 뭔가 엄청나게 변한 것 같다.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대답 대신 선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력이 충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체가 강화된 게 느껴졌다. 전신에 흐르는 마력의 양이 달라졌다.
-피에 젖은 살인귀, 리퍼가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을 처리할 것을 독촉합니다. 선택에 따라 리퍼와의 동조율이 오릅니다.
리퍼의 의자가 느껴졌다.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다.
살아남은 알파팀 헌터들의 진술은 현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테니까.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다. 이기어검.”
도살자 단검이 살아 있는 이들을 추적해 모조리 숨통을 끊어 놓았다.
-피에 젖은 살인귀, 리퍼가 당신의 행동에 크게 만족합니다. 동조율이 소폭 상승합니다.
리퍼가 만족했다. 그리고.
-구국의 혈기사가 당신의 잔혹한 방식에 감탄하여 찬사를 보냅니다.
누군가 또 깨어났다.
* * *
현준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플레임과 함께 귀환했다. 플레임까지 하사신의 은신 장막에 숨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야간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이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밤에 산책이라도 다녀오셨나 보군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지요?”
늦은 밤, 피를 뚝뚝 흘리며 귀환한 두 사람을 향해 던지는 질문치고는 평범했다.
이든과 미국은 이번 일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먼지가 조금 묻은 것 같은데, 여기 청소는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신봉하는 조력자’라는 이든의 진명을 생각해 볼 때, 지금 그의 행동은 ‘조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현준은 플레임을 부축하여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든이 지시를 내려둔 것인지 숙소까지 가는 길은 비어 있었다.
-주인. 저 인간을 믿을 수 있겠나?
숙소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거리에서 지옥참마도가 질문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강한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현준이 대답했다. 분주히 걷다 보니 어느새 숙소로 쓰는 건물 바로 앞에 도달했다.
미리 연락을 받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민이 현준을 발견하고는 달려와 플레임을 부축했다.
“상처가 심하군요. 입이 무거운 회복계 헌터를 부르겠습니다.”
플레임의 상처를 살핀 태민이 말했다.
오면서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현준이 힐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회복계 헌터가 아닌 만큼 어설펐던 것이다.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가 회복계 헌터를 호출한 태민의 시선은 이윽고 현준에게 향했다.
“길드장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플레임이나 잘 챙겨줘요.”
어쨌거나 소환수였고, SS급 수준의 강한 전력이기도 했다. 소환수의 목줄로 지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잘해줘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형님…….”
잘 챙겨달라는 사소한 말 한마디였지만 플레임은 많이 감동한 표정이었다.
숙소 1층 로비에 들어서자 회복계 헌터 3명이 달려와 플레임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A급이었고 다른 2명은 B급으로 보였다.
“플레임은 맡기겠습니다.”
현준은 플레임을 회복계 헌터들에게 맡긴 후,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태민이 날렵하게 뒤로 따라붙었다. 그는 현준의 함정 계획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길드 간부 중 한 명이었다.
“길드장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방에 들어온 현준이 문을 닫기 무섭게 태민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현준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간단하게 요약하여 설명, 전달하면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장비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냉기를 머금은 철제 흉갑이었는데, 태민은 한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떨리는 시선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이건 페트렌코가 착용하고 있던 S급 장비, ‘얼음 흉갑’이군요. 이게 길드장님의 수중에 있다는 건…….”
“페트렌코와 알파팀 헌터 250여 명을 무덤으로 안내해주고 왔습니다.”
“역시 길드장님이십니다!”
250명을 넘는 헌터들을 죽이고 왔다고 태연히 말하는 현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태민은 조금도 꺼림칙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맹신하는 눈먼 기사’다.
그에게 있어서 현준의 적은 몰살 당해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의 맹신은 이제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 보고타에는 알파팀이 몇 명이나 남아 있습니까?”
보고타에서 알파팀과 대적할 생각은 없었지만 남은 숫자를 파악이라도 해두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태민이 다시 무전기를 입가로 가져갔다. 확인에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현재 알파팀이 사용하는 숙소는 텅 비어 있다고 합니다. 저희 측 헌터를 보내서 확인한 결과, 그 넓은 숙소 건물 전체에 인원이 20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250명이 넘는 인원을 습격에 동원했으니 보고타의 숙소가 비어 버린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기뻐할 일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만 했다.
“이걸로 보고타에서 알파팀이 토벌권을 주장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되었네요.”
“네. 브라질에 있는 SSS급 헌터, 서리칼날의 블라디미르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길드장님께서 독립 토벌권을 무리 없이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가 보고타로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브라질에는 잔영의 에릭이 있으니까요.”
브라질은 이번에 남미에서 가장 많은 레이드 게이트가 생성된 곳이었다.
그래서 마정석 획득을 위한 토벌권 지분을 최대한 행사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에릭을 보냈고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를 보냈다.
마정석은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지구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자원이었다. 모든 자원의 대체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헌터 장비의 제작과 수리, 그리고 신기술에도 접목이 가능해서 모든 국가가 욕심을 냈다.
‘마정석은 마약이나 다름없지.’
던전 레이드 시대가 낳은 최고의 마약, 그게 바로 마정석이다.
남미 대륙에 레이드 게이트가 대규모로 열렸을 때도 세계 각국과 헌터들은 돈을 보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남미 대륙에서 이번 레이드로 발생하는 대부분의 마정석이 연합 토벌대의 손에 흘러 들어갈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미국이나 러시아가 하나의 마정석이라도 더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마정석이 돈이 되는 사업이니까.’
그것도 아주 큰 돈이 되는 사업 말이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길드장.”
“예. 길드장님.”
“당분간 브라질에 있는 블라디미르의 동태를 살펴주세요. 위원회의 첩보 자료를 열람하면 편할 겁니다.”
위원회는 혈맹과 관련된 일에만 움직이지만 소속된 위원이나, 허가받은 ‘부관’이라면 UN 특수 기관의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리고 태민은 현준에게 허가받은 위원회 부관이었다.
“24시간 감시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태민의 시선이 얼음 흉갑으로 향했다.
“바로 착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주인’이 죽었으니 귀속이 해제되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지배 의식을 치르면 착용할 수 있겠지만,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당장은 정확한 옵션도 모르고 눈에 띌 것 같아서요. 제가 장비 욕심이 심한 것도 아니고, 우선은 극적인 연출을 위해 아껴두기로 하죠.”
“극적인 연출이라…… 알겠습니다.”
현준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그의 말뜻을 이해한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많은 게 변하겠네요.”
현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페트렌코와 250명이 넘는 알파팀 헌터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으니 변화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저는 아침이 오기 전에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태민이 말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간밤에 알파팀 숙소의 야간 경비를 맡은 조장, 아이반은 그의 상관인 페트렌코가 귀환하지 않은 걸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는 페트렌코의 기습 계획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페트렌코가 돌아오지 않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당한 건가……?”
아이반은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귀환이 늦어지고 있는 탓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250명이나 되는 최정예 헌터들을 끌고 간 터라, 결코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재정비를 하고 오는 건가?”
하지만 그의 행복 회로는 정오를 넘어선 시간, 처참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마수 지역으로 보낸 무인 정찰기가 러시아 알파팀 헌터들의 시체로 가득한 영상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페트렌코가 독단으로 동원한 알파팀 헌터들의 전멸을 의미했다.
“이, 이 사실을 사령관님께 알려야 한다…….”
페트렌코와 250명이 넘는 알파팀 헌터들이 시체로 발견된 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일개 조장에 불과한 그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알파팀 사령관 블라디미르에게 급히 보고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브라질의 알파팀 전진 기지에서 아이반의 보고를 받은 블라디미르는 차분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내면에서는 얼음 폭풍과도 같은 차가운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제 ‘완전 은신’을 알아차리다니……. 역시 전 세계에 4명밖에 없는 SSS급 헌터답습니다.”
기분 나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디 집행부냐?”
“반갑습니다. 서리칼날. 저는 남미 관구의 수석 집행관, 펠리아크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솔깃한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검은 가면 안의 붉은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