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38장 선봉지휘부(4)
“섣불리 나서지 마세요. 죽습니다.”
태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의 존재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다들 조심…… 허억!”
사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경고를 하려는 찰나의 순간 경계가 흐트러진 틈에 알자스가 깊숙이 파고 들어온 것이다.
휙.
휘둘러진 검에 사혈의 허리를 베었다.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혈은 정신을 놓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서 알자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크윽! 안 놓친다!”
“아니, 이놈이?”
“네놈은 황제 폐하의 적!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거한다!”
사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특수 능력인 전격을 사용하여 알자스의 몸을 순간 경직시켰다. 경직까지 겹치니 순간 알자스는 당황했고 그 틈에 태민이 단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의 특수 능력은 극독. 조금이라도 체내에 침투하면 치명적이지만 그것도 공격이 성공해야 가능한 일. 알자스는 그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찢겨 죽어라.”
바람의 칼날. 날카롭게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알자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크아악!”
“커어억!”
사혈과 태민이 끔찍한 몰골로 쓰러졌다. 배후에서 달려들려던 태희도 황급히 은신술을 펼쳤고 소진은 ‘힐’을 사용했다.
S급 회복계의 ‘힐’은 사혈과 태민의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회복 계열인가? 그렇다면 먼저 죽여주마.”
알자스의 시선이 소진에게 닿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소검을 들어 올렸다.
“너 같은 거 안 무서워.”
그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조금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곧은 시선은 알자스에게 향했고 전신에서는 투기에 가까운 마력이 흘러나왔다.
“인베이더에게 검을 겨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군. 네년은 성한 꼴로 저승 문턱을 넘는 건 힘들 것이야.”
알자스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다.”
태민이 비틀거리며 앞을 막아섰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 검을 들어 올렸다. 둘은 알자스에게 치명상을 입었지만, 소진의 ‘힐’로 간신히 구명했을 뿐이었다.
전투를 이어가기 적합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망설임 없이 소진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황제 폐하께서 저분을 지키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길드장님께서 내게 지시하셨다. 물러날 수 없다.’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며 알자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태민 등이 S급이라고는 하지만 중견 이하. SS급인 알자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S급 상위에 해당하는 13급 인베이더, 이지크도 있었다.
“그렇게 명을 재촉한다면 어쩔 수 없지.”
“커헉!”
알자스가 손을 뻗자 무형의 갈고리가 튀어나와 태민의 몸에 꽂혔다. 일순간에 그의 몸이 끌어 당겨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알자스의 코앞이었고 대응하기 위해 단검을 투척하기도 전에 알자스의 장검이 복부를 꿰뚫었다.
“쿠, 쿨럭!”
태민이 붉은 피를 토했다. 사혈과 태희가 엄호하려고 했지만 이지크가 조금 더 빨랐다.
휙.
“큭!”
“꺄아악!”
짧은 전투 끝에 사혈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태희도 이지크가 휘두른 주먹에 맞고 아스팔트 도로에 머리가 처박혔다.
인간의 신체를 초월한 헌터라서 머리통이 쉽게 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별거 아니군.”
이지크 역시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사혈과 태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 네년만 남았다.”
이지크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소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소검을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빛이여!”
성기사가 강림했다.
백색의 마력으로 구성된 갑주가 몸을 뒤덮었다. 일순간에 기세가 변하자 이지크 또한 잠시나마 긴장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겨우 이 정도의 마력으로 자신만만하게 행동했던 건가? 어리석군.”
“내가 마무리하겠네. 이지크 경. 자네는 뒤로 물러나게.”
“예, 알자스 경.”
알자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홀리 스피어!”
백색의 마력으로 형성된 창이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소진이 땅을 박찼다. 두 줄기의 하얀 섬광이 알자스를 노렸다.
“무다.”
“꺄아악!”
홀리 스피어는 허공에서 소멸하고 소진이 비명을 질렀다. 붉은 핏줄기가 솟구쳤고 알자스는 왼손을 뻗어 소진의 목을 붙잡았다.
“커, 컥!”
숨이 턱 막혔다.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힘이 빠졌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선명한 백색의 마력도 약해졌다.
“이 가련한 생명을 어떻게 짓밟아야 적격자에게 좋은 경고가 될까?”
알자스의 말에 소진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저 이 일로 인해 현준에게 짐이 될까 싶은 마음에 흘리는 눈물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알자스는 갑자기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 계획이 떠올랐는데, 들어보겠나?”
“좋은 말로 할 때 그 입 닥치고 손 떼라.”
두 눈이 탐욕에 젖어 드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공기를 차갑게 물들이는 살기.
“마, 마력 반응?”
“끄아아아악!”
뒤늦게 마력을 감지했을 땐 늦었다. 이미 소진의 목을 붙잡고 있던 오른팔이 절단되고 있었으니.
“알자스 경!”
이지크 역시 흑염을 펼쳤으나,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지크 경! 적격자가 나타난 게 분명하네! ‘가호’로 파괴할 수 없는 흑염 이상의 ‘권능’을 사용하게나!”
“아, 알겠습니다! 알자스 경! 물러나라!”
방어를 위해 역장의 권능을 사용하는 이지크.
“흑염 이상의 권능은 질드레의 가호로도 파괴가 힘드네.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고맙다.”
듀렌달의 가호로 강화된 오러 블레이드가 마력 역장을 찢었다. 현준은 그 공간으로 쉽게 진입하며 차갑게 내뱉었다.
질드레와 다시 한번 만나서 술식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 방법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인베이더가 사용하는 권능 중에서도 ‘흑염’ 이상의 것은 쉽게 파괴되지 않는 저항이 느껴졌다.
“인베이더인 내가 직접 사용한 권능이 뚫렸다고?”
아르센 주교와 같은 반응이다. 당황한 그를 보며 현준은 무심하게 강화된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를 뿐이다.
서걱.
소름 끼치는 절삭음과 함께 이지크의 목이 베였다. 알자스가 황급히 움직였을 땐 이미 이지크의 잘린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이지크 경! 이런 제기랄!”
알자스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침착하게 잘린 팔에 마력을 집중했다. 재생의 권능이 순식간에 새로운 팔이 솟아나게 만들었다.
“적격자……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길드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가운 분노가 차올랐다. 이성은 냉정하게 살아있었지만,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인베이더. 이걸로 너희는 나에게 자격을 주었다.”
“무슨…….”
“너희에게 진정한 공포를 선사할 자격을.”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인 순간 그의 몸이 알자스를 향해 총탄처럼 쏘아졌다.
동시에 휘둘러진 오러 블레이드는 알자스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복부를 깊게 베어 버렸다.
“큭! 꿰뚫어라!”
보이지 않는 창이 현준을 노렸다. 기척을 느끼고 급히 몸을 틀었다. 복부가 관통당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단치히의 가호가 활성화된 상태였다.
콰앙!
“크, 크으윽!”
알자스가 신음을 흘렸다. 지옥참마도를 막아냈지만 밟고 있는 땅이 움푹 파일 정도로 큰 충격이 전해졌다.
내장 기관이 전부 뒤흔들리는 느낌. 울컥! 하고 뭔가 올라오면서 혀끝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환영검!”
시동어와 함께 지옥참마도를 휘두른 순간, 12방향에서 12개의 검격이 알자스를 노렸다.
S급은 물론이고 SS급 헌터도 쉽게 막지 못하는 일격필살의 기술이 발현된 것이다.
“이, 이 기술은!”
짧은 순간, 빠르게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12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알자스는 떠올랐다.
교육 과정 중에 배운, 적격자와 전투가 발생했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기술 중 하나라는 것을.
“큭! 블링크!”
당연히 전부 막아내는 것은 실패했고 알자스는 신음을 흘리는 것을 참으며 블링크로 거리를 벌렸다.
오러 블레이드가 닿기 직전에 피부를 강화하고 오러 아머를 발동시켜서 간신히 신체가 조각나는 것은 막았지만 치명상만 다섯 곳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설마 적격자 중에서도 소수만 사용할 수 있다는 ‘환영검’까지 익혔을 줄이야…… 이건 조금 위험하군.”
거리가 벌어지면서 서로를 경계하는 잠깐의 소강상태. 알자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사실을 침략사령부에 알려야 한다.”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긴장한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땐 어느새 현준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 어느새!”
기척도 없었다.
“내 부하들을!”
휘둘러진 지옥참마도. 피하려 했지만.
쿠우웅!
굉음과 함께 발현된 리퍼의 가호. 혹한처럼 차가운 살기가 일순간 알자스의 몸을 경직시켰다. 움직일 수 없다.
서걱.
오른팔이 또다시 잘렸다.
“잘도 이렇게!”
현준이 지옥참마도를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 내찔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알자스의 복부를 꿰뚫었다.
“커헉!”
“만들었겠다?”
“제기라아알! 이 거리라면 피할 수 없겠지! 찢겨 죽어라!”
바람의 칼날이 터져 나와 휘몰아쳤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을 현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히죽 웃는 알자스.
그의 머릿속에는 진급에 대한 행복회로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고작 이 정도냐?”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현준의 모습이 드러났다. 푸른색의 오러 실드가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방패라는 매개체 없이 오러 실드를 만들었다고?”
알자스는 경악했다. 높은 오러 응용력이 필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놀라기엔 이르다.”
“사라졌어?”
현준이 모습을 감췄다. 알자스는 초고속 재생을 사용할 여유도 없이 불안한 시선을 흩뿌렸다.
“뒤다.”
오감을 찌릿하게 만드는 섬뜩한 목소리. 몸을 돌렸을 땐 이미 늦었다. 지옥참마도가 복부를 꿰뚫고 있었으니까.
“커헉!”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뱀파이어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인베이더’라고는 하지만 오른팔이 잘리고 전신이 난도질당한 상태라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장검마저 놓치고 말았다. 알자스는 그야말로 무방비한 상태였다. 현준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이, 이건…….”
“질드레에게 배운 구속 술식이다. 이걸로 마력 사용은 물론이고 반항할 수 없을 거다.”
복잡한 술식이라 전투 중에는 사용하기 힘들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 아니었다.
“안심해라. 인베이더. 지금 ‘당장은’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니까.”
“서, 설마…….”
“고통의 지배자가 너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거든.”
피어가 나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