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32장 영원한 공허(3)
정신을 차려 보니 또다시 ‘전생의 홀’에 있었다.
‘몰아서 나오네.’
어떠한 방해가 있기라도 했던 것인지 일정 기간 나타나지 않았던 전생들이 최근 연이어 초대장을 보내왔다.
강해질 수 있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었지만, 연이어 전생의 방을 출입한다는 건 정신력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조차 시험일지도 모른다.’
두 눈에서 굳은 의지가 빛났다. 현준은 짧게 땅을 응시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문은 조금 특이했다.
특이하게도 유리문이었는데 내부가 훤히 보이지 않았다. 불투명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유리 너머는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심연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
‘영원한 공허.’
유리문에 각인된 이명.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전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현준은 힘차게 문을 열고,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서 오게.”
어둠 속에서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배경이 어둡다 보니 로브의 색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드러난 피부는 로브의 색깔처럼 하얗다.
“내 이름은 베히모스, 공허를 삼킨 신관이라네.”
“반갑습니다. 베히모스, 당신은 제게 어떤 가호를 줄 수 있습니까?”
“이번 환생은 실리적이라서 좋군. 나는 이런 게 싫지는 않다네, 아니, 오히려 권장하지.”
만나자마자 대뜸 내게 어떤 힘을 줄 수 있는지 묻는 모습은 불쾌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지만, 베히모스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선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눈동자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의 절반은 호기심. 나머지는 대견함이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현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나는 그대에게 공허의 가호를 선물해줄 수 있다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대가 공허를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공허는 그대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네.”
“축복이라면 여러 종류입니까?”
현준이 질문했다.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 하나, 그게 충족될 때까지 같은 보상만 있을 것이라네.”
“그렇다면 충족이 된다면 또다시 새로운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군요.”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로군. 그대가 마력을 원한다면 마력을 선사할 것이오. 그 마력이 충족된다면 그대가 갈망하는 또 다른 뭔가를 채우기 위해 축복을 내릴 것이네. 공허를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말이지.”
베히모스의 설명을 들은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욕심나는 능력이었다.
‘이거, 완전 개인 트레이너 아니야?’
‘균형 잡힌 트레이닝을 약속드립니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공허를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준이 질문을 던졌다. 베히모스가 고개를 들었다. 후드 아래의 그늘에서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영혼을 바치게나.”
잠깐만요, 뭐라고요? 영혼? 어이없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린 순간.
“그대의 영혼을 바치라는 게 아니라네. 감히, 99만의 의지를 막아선 적의 영혼을 바치라는 말이지.”
이건 좀 솔깃한데? 다시 베히모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적을 죽이고, 그 시체에서 영혼을 취하여 공허께 보내는 것이네. 다만, 영혼의 상태가 안 좋으면 많은 수를 바쳐야만 공허께서 만족하실 것이야.”
“상태가 좋은 영혼이라는 건 강한 자의 영혼을 말하는 겁니까?”
“바로 맞췄다네.”
정리하자면 강한 자의 영혼 소수 혹은 약한 자의 영혼 다수를 공허에게 제물로 바치면 축복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부작용은 없습니까? 영화나 소설 같은 걸 보면 ‘공허’라는 이름이 붙은 존재는 성격이 좋지 않던데요.”
만족하지 못했다고 꼬장을 부리면 답도 없다. 특히, 그 꼬장을 부리는 존재가 신격이라면 더더욱.
“크큭. 그대는 재미있는 환생이군. 침략에 대비하여 전생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수십만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하였다네. 이 ‘공허’ 역시도 처음에는 ‘저주’라고 평가될 정도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지금은 안심해도 좋다네.”
베히모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의 ‘공허’는 우리 99만의 의자 앞에 굴복했으니까.”
그의 말을 들은 현준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한마디로 말 안 들으니까 들이패서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는 건데…….
깡패가 따로 없다.
* * *
익숙한 천장이다.
-크큭. 좋은 아침이다.
침대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지옥참마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준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인, 왜 그러는 것이지? 이 몸의 아침 인사가 그렇게 싫은가?
“깨자마자 처음 듣는 목소리의 주인이 남자라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하고 싶어서 그래.”
-내가 남자로 보이는 건가?
“그럼, 여자냐?”
-그건, 훗날의 재미를 위해 비밀로 남겨두도록 하지.
지옥참마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현준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중이병 대사를 툭툭 내뱉는 자의식 과잉의 환자가 여성체일 리가.
“오늘 일정이 길드 총괄국 방문이었나……?”
샤워를 끝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옷을 입고 외투와 지옥참마도를 집어 들었다.
차고에 도착하자 일정이 생각났다. 오늘은 던전 관리국에 방문해서 간단한 조사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아수라 길드와 함께 공략했던 던전 내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조사였는데 다른 이들의 차례는 전부 끝났고, 이제 현준의 2차 조사가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쪽에서 조사관을 보내준다고 했었지만, 현준은 바람도 쐴 겸 출석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었다.
“오셨습니까?”
차고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서가 계단으로 내려오는 현준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플래티넘 티어의 길드장, 그것도 대한민국 유일이자 최강의 SS급 헌터가 움직이는 길이다. 당연히 수행이 따라붙는다.
현준은 이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태민은 유사시에 쓸 수 있는 인력이 많으면 편할 것이라고 수행팀을 편성했었다.
“길드 총괄국까지 모시겠습니다.”
종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길드 총괄국으로 이동했다. 검은 세단 1대가 경호를 위해 같이 출발했다.
조사는 별거 없었다. 던전 관리국을 비롯한 정부 기관들은 이미 현준을 대한민국 헌터 사회의 실세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는 철저히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2차 조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진행 상황에 따라서 추가 조사가 요구될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고 또 조사를 한다고 해도 별일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조사를 맡은 던전 관리국의 간부가 말하는 내용으로 볼 때 이미 윗선에서는 결론이 난 모양이다.
“가능하면 조사는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건의하겠습니다.”
현준의 말에 조사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서류를 정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두 손을 비비며 비굴한 미소를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모시겠습니다.”
‘조사 중’이라는 전광이 끝나기 무섭게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종서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현준은 조사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종서가 뒤따랐다.
정문 앞에 검은 세단 2대가 정차해 있었다. 종서가 앞서가서 문을 열었다.
현준이 탑승하자 2대의 세단이 출발했다. 뒷좌석에 앉아서 종서의 업무 보고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수원까지 아무 일 없을 것이리라. 하지만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경고에 두 눈을 떴다.
“적이다!”
“경호팀! 전투 대기!”
현준의 외침에 종서가 재빨리 무전기를 집어 들고 경호팀에 지시를 내렸다.
운전대를 잡은 집행부 헌터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정보부장님! 전방에 RPG입니다!”
RPG를 들고 있는 무장 병력이 보인다.
“쫄지 마! 이거 방탄유리야!”
“바, 밟겠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RPG라고?
“차 세워! 섬멸한다!”
“경호팀! 현 위치에서 적을 섬멸한다!”
세단이 정차한 순간 사방에서 로켓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실드!”
굳이 가호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경호 차량에서 내린 집행부 헌터 2명이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20여 발의 로켓탄이 방어 마법에 막혔다. 하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빌딩 사이에서 수십 명의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RPG 공격은 우리를 멈추게 하려는 의도였군.
지옥참마도를 뽑아 들었다.
-A급이 20명에 B급이 50명 정도.
수가 적지 않다. 아수라 길드? 아니면 혈맹 쪽인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친위대까지 소환할 필요는 없겠네.’
SS급 헌터를 습격하는데 S급 헌터가 동원되지 않았다는 건 ‘사살’을 목적으로 한 공격보다는 ‘위력 정찰’일 가능성이 크다.
‘위력 정찰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70명을 동원하다니 미친놈들이야.’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적들이 가까워졌다.
-온다.
지옥참마도가 경고했다. 하늘에서 다수의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현준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질드레의 마력이 마법 술식을 침식합니다. 어두운 진리의 이름으로 마력의 강제 해산을 명령합니다.
마법 파괴. 머리 위를 노리던 수십의 마법이 허공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게 신호였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현준이 사라졌다.
“사, 사라졌다!”
“적은 ‘완전 은신’을 사용할 수 있다! 사주 경계를…… 컥!”
경고를 전하던 헌터의 목을 뚫고 단검이 튀어나왔다. 은신이 걷어지면서 현준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어느새……!”
“은신 상태로 이동이 이렇게 빠르다니!”
“이 새끼들아! 상황 설명하지 말고 공격해!”
헌터들이 땅을 박차고 현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비티!”
중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고위 마법. 질드레의 가호가 있는 이상 통할 리가 없다.
손을 휘저으며 가호를 발현하자 고위 마법은 허망하게 사라졌다.
“고, 고위 마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야. 고위 마법 파괴는 마력 소모가 적지 않거든.
“마법계는 경호원들을 상대한다! 보조계는 버프를! 그리고 전투계는 초신성을 사냥해라!”
“헤이스트!”
보조계 헌터가 버프를 전개했다. 현준의 괴물 같은 가속을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한 ‘헤이스트’였다. 가속 버프를 받은 헌터들이 이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스텔.”
다수를 상대할 때는 광역 마법이 최고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파이어 브레스.”
전방에 화염이 쏟아졌다.
“으아아악!”
화염에 휩쓸린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회피하여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다.
공격 마법을 넘었고, 거리도 가까우니 합공으로 현준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품은 것이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화염이 번졌다. 한 번의 손짓에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크아아아아악!”
“사, 살려…… 끄르르륵!”
B급 이상의 헌터 수십 명이 한꺼번에 휩쓸렸다.
“이, 이럴 수가…….”
“우리만 남은 거야?”
증발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남은 이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경호원들을 상대하던 이들도 전멸했고, 이제 보조계와 회복계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옥참마도가 물었다. 현준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비는 없다.”
그러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가 적들의 중앙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주위에 있던 헌터들이 ‘푸확!’ 하고 피 분수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잠들어 있던 공허가 눈을 뜹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새로운 가호를 익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베히모스가 공허한 입을 열고 죽은 자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 손아귀로 모여들었다.
-다량의 영혼이 영원한 공허를 만족시켰습니다. 당신에게 마력의 축복이 선사됩니다.
마력 한계가 5% 정도 늘어났다. 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효율이 나쁘지 않았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종서가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현준은 소진이 떠올랐다.
그녀도 아수라 길드와 분쟁 문제로 오늘 길드 총괄국 방문 일정이 있었다.
만약 이게 위력 정찰이 아니라 양동 작전이라면? 처음부터 소진을 노린 거라면?
“정보부장! 지금 당장 집행부장한테 전화해서 그쪽의 상황을 파악하세요!”
베히모스의 가호가 준 마력의 축복을 느긋하게 만끽할 겨를도 없다. 현준의 다급한 목소리에 종서는 스마트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약 30초 후,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현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집행부장 이규환 씨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규환은 오늘 소진의 경호 책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