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32장 영원한 공허(1)
“황제 폐하께서 참전하셨다!”
“친위대는 공세를 멈추지 마라! 황제 폐하께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황명을 받들라!”
현준이 전장에 합류하자 친위대의 사기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높아졌다.
그에 비해 아수라 길드 진영은 사기가 바닥을 쳤다. 그들은 SS급 한진우와 S급 강진명을 잃었다.
길드 내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헌터 2명을 잃은 것이다.
재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강현준이 전장에 합류하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전투의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아아악!”
지옥참마도를 휘두를 때마다 A급 헌터가 한 명씩 쓰러졌다. 현준이 참전할 때 이미 14명밖에 없었던 아수라 길드원은 순식간에 수가 줄어들어 5명밖에 남지 않았다.
“항복하겠다!”
“사, 살려줘!”
남은 아수라 길드원들이 뒤로 물러나며 황급히 무기를 버렸다.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레이스 길드원들은 물론이고, 친위대 역시 잠시 공세를 멈추고 현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환을 남겨둘 생각은 없다. 모두 죽여라.”
레이스 길드원들이 아니라 친위대에 직접 내린 명령. 친위대는 즉각 따랐다. 그들의 서슬 퍼런 칼끝이 아수라 길드원들에게 향했다.
“크아악!”
“제, 제발!”
애원해도 소용없다. 친위대 술식까지 각인이 끝난 쉐이드는 철저히 현준의 명령만 따르는 충신들이다.
남은 아수라 길드원은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고, 친위 대장을 맡은 사혈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낸 뒤, 현준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황명에 따라 적을 섬멸했습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봤던 ‘황제’나 ‘황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은 손발이 사라질 정도의 오글거림이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언제나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잠시 대기해.”
더 대화를 하다가는 손발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대기 명령을 내리고 서둘러 태민과 규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소진과 함께 길드원들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친위대를 소환하긴 했지만, 레이스 길드의 피해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아수라 길드는 여러 면에서 열세였지만, 대한민국 1위 길드의 최정예답게 싸웠다.
“절반 이상이 부상을 입었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사망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규환이 보고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회복계 헌터들의 적절한 보조 덕분입니다. 특히, 한소진 씨의 역할이 컸습니다.”
회복계가 활약한다고 해도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규환이 소진의 역할이 컸다고 말하는 걸 보면 소진이 무리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2차 각성자의 특수 능력으로 ‘성기사’를 얻어낸 그녀의 힐량은 동급의 회복계를 압도할 정도였지만, 마력 소모가 적지 않았다.
‘이, 바보 누나가 진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소진의 옆모습을 본 순간 현준은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안색이 너무 창백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적지 않은 마력을 소모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누나, 괜찮아요?”
“응? 나는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마요.”
“나는 괜찮아.”
너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말을 삼키며 소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도 너는 달리고 있잖아.’
앞서 달려 나가는 현준과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면 그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 손 떨고 있죠?”
“응? 난 괜찮아.”
백색의 빛을 내뿜고 있는 소진의 손이 떨리는 것을 현준은 놓치지 않았다.
이건, 마력 탈진의 극초기 증상이다. 여기서 더 진행되면 마력 탈진, 더 심해지면 마력 폭주가 터질 수도 있다.
“여긴, 다른 회복계 헌터들한테 맡기고 쉬어요.”
“맞아요, 조장님.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조장님은 너무 무리하셨어요.”
현준의 말에 회복계 헌터 2명이 동조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소진은 지금까지 과하게 마력을 소모했다.
그녀 덕분에 사망자가 없는 것만 봐도 얼마나 마력을 퍼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누나, 30분 만 쉬어요.”
30분이면 소모된 마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준의 배려에 소진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눈을 떼면 다시 부상자들을 돌볼 것 같았다.
결국,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소진의 옆에 앉았다.
“쉬세요. 길드장 명령입니다.”
“응, 현준이가 시키는 대로 할게.”
소진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긴장을 놓기 무섭게 쌓여 있던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내 그녀의 호흡이 안정되었고, 안색이 편안해졌다. 잠에 빠져든 것이다.
“길드장님.”
“쉿.”
규환이 천천히 다가왔다. 현준은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규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척을 죽였다.
소진이 잠에서 깰까 봐 암살을 할 때나 쓰는 은밀 보행까지 사용하는 모습에 현준은 피식 웃었다.
“부상자는 1시간 안에 전원 회복 가능합니다.”
“휴식 시간도 필요할 테니 2시간만 쉬었다가 이동하죠.”
아수라 길드와의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던전의 보스를 잡지 못했다.
‘징후’가 있다고 했으니 레이스 길드가 물러나면 꼼짝없이 던전 아웃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솔직히 말해서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S급 최상위 던전을 공략하면 길드가 다이아몬드 티어에 오를 수 있는 실적에도 추가되고, 마정석을 루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추가적인 보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움직이는 것이다.
이번, 던전 공략에서 아수라 길드의 한진우와 강진명을 죽이고, 증거를 없애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니 일거양득.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또, 이왕 던전에 들어왔는데 클리어하고 나와야지.’
자신의 커리어에 낙오 경험을 쌓고 싶지는 않았다.
“슬슬 시간이 되었나?”
현준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길드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싶었는데, 역시나 약속한 휴식 시간인 2시간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누나, 일어나세요.”
“으응? 내가 잤니?”
소진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겨우 2시간 잠들어 있을 뿐이었지만 머리카락이 꽤 엉망이었다.
“풋.”
슬며시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웃는 현준의 모습을 본 소진은 그제야 자신의 몰골이 엉망이라는 걸 깨닫고 손거울을 꺼내 단정하게 정리했다.
“조금만 더 쉬고 있어요. 전, 진형 재정비 때문에 집행부장이랑 합류할게요.”
“응.”
현준은 규환과 합류하기 전에 소진의 안색을 살폈다. 2시간 동안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휴식을 취해서 그런지 낯빛이 좋아졌다.
‘안심이야.’
마력 탈진이나 폭주의 징후는 안 보였다. 안심하고 규환과 합류했다.
“공략을 계속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파티원들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규환의 옆에는 레이스 길드 공략 팀장을 맡고 있는 한수가 서 있었다.
그는 들고 있는 보고서를 재확인하며 파티의 상태를 보고했다.
“마음 같아서는 휴식 시간을 더 주고 싶지만 던전 아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현준의 말에 규환과 한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길드 간부 중 한 명이 말했다. 파티는 전진했다. 현준이 선봉에 섰고, 중앙을 태민이 맡았다.
아수라 길드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중간 지점을 넘어간 지점이었다.
3시간 정도 차분하게 공략하며 전진하자 보스방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보스방입니다.”
S급 최상위의 던전이다. 최악의 경우 SS급의 보스가 출현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수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긴장했을 뿐 겁먹지는 않았다. 이 파티에는 대한민국 ‘최강’의 이름을 손에 넣은 SS급 헌터 강현준이 있으니까.
“휴식은 충분합니까?”
현준이 물었다. 한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길드원들을 살폈다.
적절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와서 그런지 장시간의 던전 공략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밝았다.
“문을 열겠습니다.”
보스방의 철문에 다가선 순간.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사신의 가호가 경고했다.
‘매복? 아니면 기습?’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오냐, 오거라.’
부하 길드원들에게 뒤로 물러날 것을 손짓으로 지시하며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파바바박!
어둠을 뚫고 나온 수십 개의 암기가 현준의 발치에 꽂혔다. 기척을 느끼고 빠르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고슴도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크큭.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로군.
지옥참마도가 말했다. 현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공감했다.
내부는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조명을 장착한 드론을 앞으로 보냈지만 모두 요격당했다.
높은 등급의 마수들은 ‘지능’이 높기 때문에 드론을 요격하는 전략적인 행동이 가능했다.
“S급 상위 마수가 최소 다섯입니다.”
감지 능력이 뛰어난 헌터가 보고했다. 현준은 공허의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생각을 정리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는 S급 상위 마수라면 정령계의 ‘무영 살객’일 것이다.
-겁먹었느냐?
-어서 들어오거라.
-망설이는 꼴이라니 한심하군.
이계어로 도발이 들어왔다. 질드레의 통역 술식 덕분에 현준은 그들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었다.
“나도 다 방법이 있지.”
마력을 일으켰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저쪽이 암흑 속에 숨어 있는다면 그 어둠을 걷어내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마력을 일으키자 정면에 수십 개의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성인 남성의 머리 정도의 크기였던 화염구가 3배는 커졌다. 그런 게 수십 개다.
한 차례 손을 휘젓자 수십 개의 화염구가 보스방 안으로 쏟아졌다.
-크하하하! 불의 심판이다!
지옥참마도가 신나서 떠들었다.
“아직이다.”
내부는 아직 붉게 물들지 않았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한 움큼의 마력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보스방 안의 불꽃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크아아아악!
-끄으으으윽!
무영 살객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화염이 보스방 안을 완전히 삼켰다.
그 뜨거운 열기는 화산 분화구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력 반응 소실! 던전 클리어 확인!”
이걸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