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26장 혈맹은 피를 원한다(1)
“일본 교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랫동안 교류가 없어서 조금 늦어졌습니다. 부디 용서를.”
남한 교구장이 인베이더 하렌의 뒤편에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혈맹은 교구 단위로 나누어진 점조직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래서 교류가 없었지만, 침략사령부, 인베이더들의 지시가 있다면 언제든지 협력할 자세가 갖춰져 있었다.
“그 문제로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다. 이곳의 사정은 인지하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이런 데 신경 쓸 여력이 있다면 이번 공격에 집중하라.”
“동북아시아 관구에 소속된 모든 교구에 연락을 시도하고는 있습니다만, 시간에 맞추려면 일본 교구의 협력이 한계일 것 같습니다.”
“지원받을 수 있는 병력의 수준은?”
하렌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아군의 전력을 확인하는 건 필요한 절차였다.
“공중항모 ‘아카기’와 그 승무원들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남한 교구장의 보고에 하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중항모 아카기는 침략사령부의 기술로 제작된 공중함으로 승무원의 수만 해도 1,000명 정도다.
물론 침략사령부 소속의 솔저급들이 아닌, 마력을 지닌 헌터들이 승무원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아카기가 강력한 공중항모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공중항모의 지원이 있다면 ‘도쿄’ 정도를 쓸어버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희 교구의 상륙 부대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S급 6명에 A급 100명. 그리고 B급 100명입니다. 그 이하 사병 전력은 1,000명 정도가 완전 무장하고 대기 중입니다.”
“상륙 계획은?”
“공중항모가 일본에서 출발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공중항모를 타고 도쿄 상공까지 이동할 계획입니다.”
남한 교구장의 설명에 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침략사령부에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첫 번째 작전이다. 반드시 적격자를 척살하고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솔저 1명의 수행도 없이 홀로 지구에 파견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상부의 지령대로 암약하며 혈맹의 세력을 키워왔다. 그러다 얼마 전에 제 13침략군 소속 281번 침략부대의 책임 지휘관 로스칼로부터 적격자를 처단하라는 특별 지령이 당도했고 하렌은 마침내 자신의 존재의의를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남한 교구장의 목소리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 * *
파밍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통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레이드 상황이 종료되면서 발생한 마정석 정산금은 엄청났지만, 특수경찰국에서는 현준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런지 뒷말 없이 전체 정산금의 절반을 현준에게 ‘먼저’ 입금시켜 주었다.
보통 레이드 상황이 종료되더라도 정산은 금방 끝나도 입금까지는 며칠 걸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특수경찰국의 간부는 고위 간부의 요청이 있었다면서 최선을 다해서 입금했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요청이라는 이름의 압박을 넣은 고위 간부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선우가 뻔하지.’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돈이 급한 건 아니었지만 1천억에 가까운 돈을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금을 해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선우의 압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특수경찰국에서도 현준과의 우호적인 관계 구축을 위해 신경을 썼을 것이다.
기분 좋게 헬기장으로 돌아온 현준은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타고 온 헬기가 마수의 공격에 당해 파손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대로는 비행이 힘들어요.”
조종사가 말했다.
“수리에는 얼마나 걸립니까?”
현준이 수리 기술자를 보며 물었다. 최근 가장 잘나가는 S급 헌터의 시선을 받은 수리 기술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법계 헌터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3시간은 걸릴 것 같습니다.”
마법의 도움을 받아도 3시간이면 파손의 상태가 가볍지 않다는 거다. 수리 기술자의 어깨너머로 헬기의 상태를 힐끗 살핀 현준은 이내 납득했다. 뭔가에 관통당한 것 같은 기체는 물론이고 꼬리 날개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알겠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비용 걱정 말고 말끔하게 고쳐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아한테 빌린 헬기라서 심하게 파손된 모양을 보니 수리비를 전액 부담할 생각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리 기술자를 격려하고는 발걸음을 옮기는 현준의 앞에 특수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특수경찰국 평택 지부 소속 이영호 경위입니다. 강현준 헌터님 되시지요?”
“네, 제가 강현준입니다.”
“조금 전에 무전 요청으로 지원을 요청했던 게 접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나네요.”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무전기를 통해서 들은 것과 비슷했다.
“드랍된 장비의 정산 문제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그건 천천히 해도 됩니다.”
급한 일도 아니었고 장비 정산은 시간이 조금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현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준이 화를 내지 않아서 영호는 안도했다.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눈에 현준의 어깨너머로 작지 않은 손상을 입은 헬기의 모습이 보였다.
“타고 오신 헬기입니까?”
“네. 제가 레이드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마수의 공격을 받은 것 같네요.”
2차 저지선까지 붕괴 된 상황이었으니 어디선가 피격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영호는 현준의 어깨너머로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다.
“상태가 좋지 않네요. 비행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마법계 헌터의 힘을 빌려도 몇 시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괜찮으시다면 특수경찰 헬기로 이동하시겠습니까? 현장 수습을 위한 인력과 장비가 과잉 공급되어서 놀고 있는 헬기가 하나 있습니다.”
헬기를 빌려주는 건 영호의 권한이 아니었지만, 특수경찰국에서는 S급 헌터 중에서도 2차 각성자인 현준을 떠오르는 한국의 유망주로 보고 있어서 전화통화 한 번이면 해결될 문제였다.
특수경찰국과 국가 헌터 진영의 전력 강화를 위해 그를 포섭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히 현준의 편의를 봐주는 노선으로 가고 있었다. 몇몇 고위층은 F급 헌터 출신에 벼락출세한 현준을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
그건 시기심이나 헌터들의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빌려준다면 고맙게 타고 가죠.”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영호의 행동에서 특수경찰국이 어떤 노선을 주력적으로 밀고 있는지 현준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송태식이랑 이선우가 내 편이다.’
태식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고 선우는 이번 레이드를 기점으로 빚을 만들어두었다.
특수경찰국 소속이며 한국육위의 헌터 2명이 지지를 보내고 있으니 특수경찰이나 정부의 고위 관계자라고 해도 명분이 없으면 현준에 대한 적의를 쉽게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현준은 영호와 함께 바로 옆의 헬기착륙장으로 이동했다. 특수경찰국 소속의 헬기 몇 대가 착륙한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영호는 그중에서도 세련된 디자인의 검은색 헬기 앞으로 현준을 안내했다.
-이 몸이 타게 될 비룡인가? 칠흑은 밤의 상징이지. 나쁘지 않군.
지옥참마도의 의미 없는 중얼거림을 한 뒤로 듣고 흘렸다. 그리고 영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국내에 많지 않은 마정석 기술을 사용한 고속 헬기입니다. 목적지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짧게 설명하는 영호의 목소리에서 특수경찰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마정석 기술을 사용한 고속 헬기는 제작 단가가 높기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군에서도 정예 부대만 운용하고 있었고 민간은 재벌들이나 보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종사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출발할 준비가 갖춰질 수 있었다.
이륙하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평택에서 멀어졌다. 고속 헬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속도였다.
수원의 레이스 길드 사무소 헬기착륙장에 금방 도착했다.
“길드장님. 실력 좋은 감정사를 섭외했습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30분 전부터 헬기착륙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길드장 김태민이 다가와 헬기 문을 열며 말했다. 프로펠러 소리가 컸지만, S급 헌터의 청각은 차분하고 작은 목소리마저 선명하게 잡아냈다.
“감정사를 불렀다고요?”
헬기 안에서 감정사가 필요하다고 메시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설마 길드 사무소까지 부를 줄은 몰랐다.
현준의 물음에 태민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굳이 길드장님께서 찾아가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잘했어요.”
태민이 눈치 빠르게 수고해준 덕분에 시간을 아끼게 되었다.
“본관 응접실입니다. 길드장님의 위치에 맞는 사람으로 준비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를 하고 태민은 업무에 복귀하기 위해 별관 4층의 부길드장 집무실로 갔고 현준은 그가 말한 대로 감정사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정장 차림의 감정사가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강현준 헌터님. 장비 감정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제야 태민이 말한 ‘위치에 맞는 사람’의 뜻을 눈치챘다. 옷차림과 언행으로 볼 때 헌터 중에서도 고위층을 상대하는 감정사로 보였다.
“지금 바로 시작하죠.”
“예, 감정받고자 하는 장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감정사가 정중하게 요청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패 형태의 장비를 꺼냈다.
공허 성기사가 드랍한 장비로 원형 방패 모양이다.
“감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정사의 마력이 방패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가는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났다.
“제가 설명도 드리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감정서 외에도 간단하게 옵션을 요약 정리해서 적어드리겠습니다.”
감정사가 말했다. 감정서 양식에 맞춰서 쓰면 보기 불편해하는 헌터들도 있기 때문에 배려한 것이었다.
“감정서를 작성할 동안 이걸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거에요.”
[공허의 방패]
-A급 장비.
기본 옵션.
-A급 오러 전도율.
-B급 신체 강화.
-B급 충격 흡수율.
-A급 장비 강도.
특수 옵션.
-B급 블라인드.
방패와 적의 신체가 접촉 시 발동.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니까 읽고 이해하기 편했다. 솔직히 감정서는 필요 없는 미사여구가 너무 많았다.
“혹시 다른 장비도 이렇게 감정해줄 수 있습니까?”
현준이 물었다. 가능하다고 하면 비교 분석을 위해 ‘원한이 깃든 방패’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프리미엄 감정사면 일정이 바쁠 것이다. 갑자기 예정에 없던 일이 늘어났지만, 감정사는 귀찮은 기색 없는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능합니다. 장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현준은 ‘원한이 깃든 방패’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감정이 끝났습니다. 금방 작성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정사가 다시 약식 감정서를 작성해서 건네주었다.
[원한이 깃든 방패.]
-B급 장비.
기본 옵션.
-B급 오러 전도율.
-C급 충격 흡수.
-B급 장비 강도.
B급 장비치고는 나쁘지는 않지만 ‘공허의 방패’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한 옵션이었다.
“감정서 작성이 끝났습니다.”
“명함 있습니까?”
세부 감정서를 받아든 현준이 물었다. 일 처리가 마음에 들어서 계속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감정사는 흔쾌히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정사가 떠나고 현준은 명함을 확인했다.
[프리미엄 감정사 : 이우석.]
예상대로 수준 높은 감정사였다.
“업무가 얼마나 밀려 있으려나…….”
공허 성기사 토벌은 갑작스러운 일정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업무가 밀려 있을지 걱정이었다.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자투리 시간을 달래기 위해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인터넷을 켜기 무섭게 들어온 뉴스 코너에는 한 가지 토픽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도쿄 상공에 의문의 비행체 출현.]
그것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