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88화 (88/217)
  • # 88

    25장 그건 제 겁니다(3)

    ‘저지선 안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면 알아서 지원 요청을 하겠지.’

    계획은 간단했다. 특수경찰국에서 지원 요청이 있을 때까지 저지선에서 마수를 때려잡는 것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태민이 전한 보고에 의하면 S급 헌터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특수경찰국의 병력도 부족한 것 같고 상황도 좋지 않으니 지원 요청이 들어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특수경찰국에서 지원 요청이 접수되었습니다. 연결할까요?

    어깨에 걸어둔 무전기에서 태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연결해주세요.”

    -지금 연결하겠습니다.

    잠시 무전 통신이 중단되었다. 5분 정도 흘렀을까? 무전기가 침묵을 깨고 잡음을 토해냈다.

    -치직…… 특수경찰국 이영호입니다.

    “강현준입니다.”

    -저지선 안에 강한 마력 반응이 느껴져서 조회했는데, 역시 강현준 씨였군요. 다행입니다.

    “서론 길게 할 상황이 아닐 텐데요?”

    현준이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지선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위로 공격 헬기 편대가 쉬지 않고 격전지로 향하는 것만 봐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번 레이드에서 드랍되는 장비에 대한 우선권과 마정석 절반의 점유권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자원봉사를 강요할 줄 알았는데, 특수경찰국이 생각보다 융통성 있게 움직였다. 어쩌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동하겠습니다.”

    무전을 끝내며 땅을 박차고 총탄처럼 달렸다. S급 헌터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과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건 기본이었다.

    5분 정도 전속력으로 달렸다. 시야를 가로막는 거대한 건물 잔해를 뛰어넘자 2m 정도 되는 거대한 갑옷 형태의 공허 성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10여 명의 헌터들이 쓰러져 있었고 10여 명의 헌터들이 공허 성기사와 맞서고 있었다.

    “저게 네임드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공허 성기사를 살폈다. 그가 펼치는 검술과 보법은 동조율이 올라가면서 선명해진 시든밀러의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했을 때 상당한 고수의 수준이었다.

    “꽤 강한 것 같은데…….”

    -걱정할 필요 없다. 주인이여. 그 누구도 흑염룡을 막을 수는 없다.

    “가자.”

    헌터들이 무너지는 속도를 봤을 때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뽑아 들고서 전방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마력을 끌어 올리자 전생들이 반응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방패가 없어서 카르타고의 가호를 사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든 채 전신에서 희미한 마력을 흘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즈, 증원이 왔다!”

    “S급 헌터 강현준 씨야! 우린 이제 살았어!”

    시위대 헌터들이 환호했다.

    “뒤로 물러나세요.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현준의 말에 시위대 헌터들은 황급히 부상자를 챙겨서 뒤로 물러났다.

    공허 성기사는 현준을 향해 붉은 안광을 빛냈는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처형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항의하는 것 같았다.

    “협력에 감사한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감문위 이선우가 있었다. 현준은 눈동자에 마력을 끌어 올려 로마노프의 가호를 발동했다.

    -로마노프의 눈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절대적인 통찰을 담은 시선은 모든 존재를 꿰뚫어 봅니다.

    그리고 진명이 떠올랐다.

    [이선우 : 정의로운 군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진명을 보지 않더라도 이 피바다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시간을 벌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짜는 아닙니다.”

    “상관없다. 방금 너는 나와 내 시위대원들을 살려줬다. 이건 반드시 갚는다.”

    선우의 목소리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현준은 선우가 생각보다 올곧고 정의로운 성격이라는 것에 감탄했다.

    보통 S급 이상의 헌터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S급 헌터들이 전부 당신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현준,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위 헌터들의 협력도 필요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S급 이상 헌터들의 성격은 개차반이다.

    그나마 태식과 선우 같은 성격의 헌터들은 무력 집단의 중심을 맡기에 적합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칭찬 고맙다. 내가 전력을 다해 서포트해 주마.”

    선우는 있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며 말했다. S급 보조계 헌터 정도의 수준이면 마력이 폭주하지 않는 선에서 버프의 최대 출력을 넘어서는 것도 가능했다.

    “블레스.”

    캐스팅이 끝낸 선우고 시동어를 읊었다. 그러자 강력한 버프가 현준에게 깃들었다.

    -데우스의 절대적인 의지가 운명에 간섭합니다. 신체가 일시적으로 변화하여 강화 효과를 최대로 받아들입니다.

    데우스의 가호까지 겹쳤다.

    ‘이게 S급 헌터의 버프인가?’

    가호가 있다고는 하지만 버프의 수준이 달랐다. 평소보다 2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최대 출력을 넘어선 것 같군.’

    선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S급 보조계 헌터라고 해도 동급의 헌터의 신체 능력을 2배 가까이 올리는 건 힘들다.

    현준의 예상대로 지금 선우는 분노를 제물로 최대 출력을 넘어선 버프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넌 강해졌다! 돌격해!”

    공허 성기사를 향해 총탄처럼 튀어 나가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콰앙!

    방패로 검격을 받아낸 공허 성기사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가 서 있는 아스팔트 도로가 움푹 꺼졌다.

    -이런 괴물 같은!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한 자신의 방어 자세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는 S급 네임드 마수였기 때문에 이계어지만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헌터들 중에서는 마법계를 제외하면 이계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현준도 예외는 아니라서 공허 성기사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일격에는 무리였나?”

    -주인! 양심이 있어야지! 상대는 S급 버프를 받은 A급 다수를 쓸어버린 마수라고!

    지옥참마도의 중얼거림을 들은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가?”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반쯤 자세가 무너진 하단을 노렸다.

    -이런 신묘한 검술이 있나!

    상단을 노리는 듯하면서 결국에는 하단으로 향하는 변칙적인 움직임 탓에 공허 성기사는 적절한 타이밍에 방어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

    -오러 아머!

    결국 그는 하단에 마력을 집중시켜 오러를 형성했다. 오러 아머는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실드나 블레이드에 비해 효율이 극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과 집중력을 소모한다.

    서걱!

    전력을 다해 오러 아머를 펼쳤지만, S급 헌터의 최대 출력 버프로 강화된 현준의 오러 블레이드를 완전 방어하는 건 무리였다.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가 오러 아머를 뚫고 허벅지 부위의 관절을 깊이 베었다.

    생명체가 아닌 리빙아머에게 있어서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관절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움직임에 지장이 생긴 건 분명했다.

    -어떻게 이 세계의 인간이 이런 신묘한 검술을…….

    공허 성기사는 거듭 경악했다. 이곳은 각성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검술가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 현준과 아주 짧게나마 검격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더 재밌는 거 보여줄까?”

    공허 성기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스럽다는 몸짓을 보이고 있었기에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동시에 마력을 끌어 올렸다.

    -하사신의 음험한 발걸음이 당신을 완전한 어둠으로 안내합니다. 찬란한 빛 속에서도 당신은 그림자가 됩니다.

    완전 은신. 현준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렇게 완벽한 은신이라고?

    공허 성기사는 주위에 마력을 풀어서 추적에 힘썼지만, 그의 탐색 능력으로는 완전 은신한 그림자를 찾는 건 무리였다.

    -대체 어디에…….

    그렇게 말을 뱉기 무섭게 좌측에서 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땐 이미 지옥참마도의 칼날이 흉갑 부분을 꿰뚫고 있었다.

    -허억!

    황급히 몸을 틀지 않았다면 핵이 파괴당했을 것이다. 공허 성기사는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방패로 몸을 가렸다.

    동시에 그의 주위로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어 회전했다. 방어 자세가 취약한 부분을 커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지옥참마도.”

    -불렀는가? 흑염의 주인이여.

    지옥참마도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명을 부르며 응답했다.

    “오러 블레이드는 못 막지?”

    -그건 이 몸의 마법 저항력이라고 해도 무리다.

    “오케이. 알겠어.”

    -어쩔 생각이지? 완벽에 가까운 방어 자세인데?

    “정면에서 박살 낼 생각이다.”

    현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스텔이 붉은 마법서를 펼칩니다. 일시적으로 화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이스텔이 가진 붉은 마법사의 권능을 행사합니다. 화염계 마법의 위력을 3배 강화합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파이어 캐논.”

    거대한 화염구가 포탄처럼 날아가 공허 성기사의 방패에 작렬했다.

    콰앙!

    완벽하게 방어한 걸로 보였다. 그러나 폭발음과 함께 화염과 검붉은 연기가 안개처럼 공허 성기사의 시야를 가렸다.

    “듀렌달.”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선명한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그 어떤 강력한 방패라도 일격에 잘라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하앗!”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찼다. 일순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공허 성기사는 방패를 집어 던지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리고 둘의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한 순간, 공허 성기사의 오러 블레이드가 처참하게 박살 나면서 동시에 장검이 두 동강 났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흉갑을 베고 들어가 ‘핵’을 파괴했다. 붉은 안광이 빛을 잃었고 공허 성기사는 힘없이 무너졌다.

    그가 서 있던 바닥에는 갑옷 조각이 엉망으로 널브러졌다. 그것마저도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소멸하고 남은 것은 마정석과 하나의 장비뿐이었다.

    운이 좋게도 마침 필요했던 방패 형태의 장비였다.

    ‘아주 좋아.’

    현준은 만족했다. 네임드와 보스 보정까지 받았으니 최소 동급의 장비일 확률이 높았다.

    -S급 상위에 해당하는 네임드 마수를 이렇게 압도하다니 역시 이 몸의 주인답군.

    현준은 감탄사를 내뱉는 지옥참마도를 말없이 검집에 집어넣었다.

    “맙소사. 2차 각성자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선우가 현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자신의 버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시위대의 정예들이 낙엽처럼 쓸어버린 공허 성기사를 압도하는 모습은 충격을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부상이 심하지 않은 시위대 헌터들에게 동료들의 수습을 지시하고는 현준을 향해 더욱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S급 헌터가 되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S급 상위에 네임드와 보스 보정을 받은 마수를 이렇게 압도한 건 한진우 이후로 처음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의 SS급 헌터, 한진우 이후로 처음이라는 말.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했다.

    “과찬입니다.”

    “나는 빚지고는 못산다. 나와 시위대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좋다. 연락해라. 가장 먼저 달려가서 네 곁에 서겠다.”

    선우는 그 말을 끝으로 시위대를 수습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공허 성기사를 물리쳤으나 게이트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걸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현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한진우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그를 초월할 생각이다. 아수라 길드와는 악연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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