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23장 음모의 파편(2)
사람이었던 무언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에 규환은 두 눈을 의심했다.
괴인으로 변한 형근의 앞을 막아선 특수경찰국의 헌터들의 몸이, 형근이 그저 손을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 폭죽처럼 터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규환도 강한 마력의 간섭을 느꼈다. 마력을 일으켜 방어하지 않았다면 내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접근하지 마라! 내가 상대한다!”
규환은 다른 헌터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체내에 마력을 주입하여 폭발시키는 종류의 마법이나 술식인 것 같았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마력을 압도한다면 이론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복잡한 캐스팅 없이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헌터들의 몸이 터졌다는 건 괴인으로 변한 주형근의 수준이 아득히 높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환에게 유감스러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르르.
-키에엑.
괴인들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와라!”
규환이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외치자 주형근을 제외한 괴인들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커, 커헉!”
그의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었다. 반응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왼쪽 옆구리가 한 움큼 뜯겨 있었다.
“제, 제기랄…… 블리자드!”
스태프를 위로 들어 올리며 규환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주위로 치명적인 얼음 폭풍이 소환되었다.
-키에에엑!
-그아아앗!
시전자의 수준에 따라 대마법급 위력을 낼 수도 있는 강력한 광역 공격 마법은 순식간에 괴인 절반을 얼려 버렸다.
나머지 절반은 날카로운 얼음 칼날 세례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졌다.
-낮은 등급이었다고는 하지만 혈맹의 의식을 치른 헌터들인데 한 번에 쓸어버리다니…… S급의 자질이있군.
규환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칭찬을 받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형근은 그 모습을 보며 뼈 형태의 대검이 붙어 있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오늘 죽을 테지만.
그리고 사라졌다.
“이, 이런!”
일순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규환은 황급히 방어 마법을 펼치려고 했지만 늦었다. 뼈 대검은 목을 날려버릴 기세로 휘둘러졌으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콰앙!
강한 풍압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본능적으로 눈을 뜨고 앞을 살피니 어디선가 날아온 방패가 형근의 안면에 꽂히는 게 보였다.
“괜찮습니까?”
어느새 규환의 옆에 현준이 서 있었다.
“예, 길드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뒤로 물러나서 회복계 헌터의 치료를 받으세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규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현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괴인을 상대로 지금 부상입은 몸으로는 오히려 현준에게 방해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강현준.
악역 같은 대사는 없었다. 형근은 현준의 이름을 낮게 부르며 살기를 흘렸다.
당장이라도 현준에게 달려들어서 몸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현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기세에 밀리고 있다고……?’
형근은 흉측하게 변한 입술을 깨물었다. 혈맹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식을 치르고 초월의 경지라고 불리는 S급의 문턱을 넘었다.
강현준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착각이었다.
‘이건…… 괴물이다…….’
동수를 이루거나 약한 자의 기세를 보면 그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게 보통이지만 눈앞에 있는 강현준의 기세는 읽을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심연과도 같았다.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 같았다.
아니, 상대나 할 수 있을까? 절망이 다가왔지만 형근은 폐인이 되어버린 주혜리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외면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붉게 물든 형근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빛났다.
“와라.”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든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벼운 도발이었기에 형근은 넘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거대한 덩치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주인! 블링크다!
지옥참마도가 경고했다. 소멸했다고 생각한 기척이 머리 위에서 감지되었다.
현준은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하는 것과 동시에 떨어져 있던 방패를 집어 들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오러가 방패를 덮었다.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크아악!”
“커헉!”
특수경찰국의 헌터 몇 명이 휩쓸렸지만, 현준은 오러 실드 덕분에 무사했다.
-크아아아!
괴성을 쏟아내며 달려오는 형근을 보며 현준은 방어 자세를 취했다.
쿠웅!
괴인으로 변해 형근의 육중한 몸과 현준의 방패가 충돌했다.
쾅! 쾅! 쾅!
휘둘러진 뼈 대검이 연신 방패를 강타했다.
-죽어라! 죽어!
검은 오러 블레이드는 현준의 오러 실드를 박살 내지 못했다. 전해지는 충격조차 현준은 카르타고와의 수련으로 깨달은 방법을 통해 부드럽게 흘려냈다.
형근은 타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뒤로 물러나며 검은 불꽃을 토해냈다.
화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코앞까지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준은 여유로웠다. 그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스텔의 가혹한 불꽃이 함께합니다. 화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검은 화염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재롱잔치는 끝났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갔다. 그 모습을 본 형근은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과 마주했다.
처음 S급 던전을 공략했을 때도. 혈맹으로부터 끔찍한 고통이 동반되는 의식을 치를 때조차 이토록 어두운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오, 오지 마…….
몸이 경련하듯 떨려오고 시선이 어지럽다. 본능이 경고했다. 당장 도망쳐라. 눈앞의 남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
“도망가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리퍼의 가호를 발현했다.
-컥!
치명적인 살기를 받아낸 형근이 비틀거렸다. 내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망가고자 하려는 의지를 꺾고 움직임을 잠시 막기에는 충분했다.
“뒤다.”
철쇄처럼 몸을 옭아매는 살기를 떨쳐냈을 때 눈앞에 있던 현준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올 때는 늦었다.
이미 지옥참마도가 형근의 두꺼운 가죽을 뚫고 심장을 관통한 뒤였으니까.
“보이지 않았지?”
-어, 어느새…….
“들리지도 않았을 거야.”
현준의 말에 형근은 대답하지 못했다. 억울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라는 거다.”
현준은 형근의 몸에 꽂힌 지옥참마도를 비틀어서 심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크, 큭…….
낮은 신음을 흘릴 뿐,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형적으로 팔을 꺾어서 현준을 구속했다.
갑작스러운 반전에도 현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심장을 파괴해도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정체불명의 촉수로 구속당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지옥참마도를 휘둘렀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촉수에는 작은 상처밖에 내지 못했다.
-크하하하! 겨우 그 정도냐?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현준은 대답과 함께 마력을 일으켰다.
-피어와 위험한 협력을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고통은 당신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촉수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비틀었다. 고통을 지배하는 피어의 힘이 형근에게 작용했다.
-크아아아악!
끔찍한 고통이 형근을 덮쳤다. 촉수가 순간 수축하면서 현준의 전신의 뼈를 박살 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단치히의 가호가 전신의 뼈가 박살 난 상태에서도 움직일 수 있게 해줬다.
그는 형근과 거리를 벌려 재정비한 뒤, 다시 그에게 달려들며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커헉!
촉수와 달리 강화되어 있지 않았던 팔이 잘렸다. 남은 팔로 뼈 대검을 휘둘렀지만, 현준은 여유롭게 피했다.
“힐!”
뒤쪽에서 소진이 맑은 목소리로 외치며 힐을 사용했다. 백색의 마력이 현준의 몸에 닿으면서 부러진 뼈들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이게 2차 각성한 A급 회복계 헌터의 힐인가?’
불과 몇 초 만에 박살 난 뼈가 다 붙었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단치히의 가호 없이도 싸울 수 있다.
-그아아아!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형근이 괴성을 내지르며 마력을 일으켰다. 그의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강화 마법이군. 저 정도면 일반적인 오러 블레이드로는 어림도 없겠어.
“‘일반적인’ 오러 블레이드라면 말이지…….”
지옥참마도가 우려를 표했지만, 현준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마력을 일으키며 검을 들어 올리자 전생이 응답했다.
-듀렌달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찬란한 광휘가 정의로운 검에 깃듭니다.
푸른색의 오러가 점점 진해지더니 이내 짙은 청색이 되었다.
-오, 오러 강화라고? 도대체 네 놈은 재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것이냐!
보통은 초월 각성이나 2차 각성을 해도 하나밖에 없는 특수 능력을 여러개 가지고 있는 모습에 형근은 경악했다.
기껏 마력으로 피부를 강화했지만,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저 정도로 강화된 오러 블레이드라면 강화된 피부조차 허무하게 찢겨 나갈 게 분명했다.
-제, 제기랄…… 혈맹의 의식까지 받은 내가…… 떨고 있다고?
형근은 이를 악물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두려움에 침식되어 경련하듯 떨려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라고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으아아아!
하지만 거부한다. 형근의 몸이 총탄처럼 쏘아졌다. 그는 순식간에 현준을 지나쳐 그의 뒤로 이동했다.
배후를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현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형근은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게 나의 전속이다! 고작 이 정도였느냐!
들어 올린 뼈 대검에서 칠흑의 오러가 솟구쳤다.
-죽어라!
휘둘러진 뼈 대검. 하지만 현준의 목에 닿지 못했다. 지옥참마도가 뼈 대검을 가로막았고 두 색깔의 오러가 충돌하면서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섬광처럼 내찔러진 지옥참마도를 막지 못했다.
-커헉!
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형근이 피를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지만, 현준이 가만히 보내줄 리가 없었다.
“반응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현준은 차갑게 내뱉으며 지옥참마도를 뽑아냈다. 핏줄기가 솟구치고 형근이 비틀거렸다.
“벌써 심장이 재생된 건가? 재생력은 무서울 정도군.”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고통의 주박!”
진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동어와 함께 속박 계열의 고위 마법이 완성되었다. 푸른 마력의 사슬이 형근을 구속했다.
-이, 이 정도는…….
“풀게 놔두지 않을 거다.”
말을 끝맺으며 형근에게 다가가 마력 사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질드레에게 배운 마도학자의 술식을 사용하여 구속 마법을 강화했다.
-이, 이렇게 된 이상…….
형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의 머리에 마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자폭이라도 하려고?”
뻔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당황하겠지만 질드레로부터 술식을 익힌 지금은 아니었다.
-질드레의 어두운 지식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마법 술식의 분석을 시작합니다.
-질드레의 마력이 마법 술식을 침식합니다. 어두운 진리의 이름으로 마력의 강제 해산을 명령합니다.
자폭 술식이 파괴되고 형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를 보며 현준은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자유의 몸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