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21장 마도학자의 은신처(3)
지하로 내려가 낡은 철문을 열자 던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이 밝지는 않았지만, 드론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고, 벽과 바닥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중세 성의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앞장서서 걷고 있던 시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말을 걸어왔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리 확실하게 해두죠?”
시연의 곁으로 밤하늘 길드의 A급 헌터가 모여들었다.
기선 제압을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한석과 규환이 다가왔다.
한석이 움직이는 건 예상했지만 규환은 의외였다. 진아와 석현에게는 미리 힘을 숨기라고 말해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어머나?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느리네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여긴 던전이고, 내가 데려온 애들 수가 더 많아요.”
시연이 말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진아와 석현의 존재를 모르는 입장에서 볼 때는 밤하늘 길드의 전력이 더 우수했다.
‘공식적’으로는 S급 1명에 A급 4명에 불과한 레이스 길드와 달리 밤하늘 길드 측은 S급 1명에 A급이 8명과 짐꾼 역할의 B급 4명까지 모두 대인전에 특화된 집행부 소속이었다.
시연이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파티 리더 권한을 저한테 줬으면 하네요.”
공식적으로 점유권을 가지고 있는 현준이 파티 리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파티 리더 권한이라는 건 공략 지휘권을 말한다.
‘파티를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가?’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연의 속셈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위험한 곳에서 레이스 길드원들을 앞으로 보내서 지치게 만든 다음 처리할 모양이었지만, 현준은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싫다면 어쩔 겁니까?”
“눈치가 없는 걸까요? 아니면 자존심이 센 걸까요?”
시연이 은근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오른손에 들린 창에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뒤에 있는 헌터들도 하나둘씩 무기를 들어 올렸다.
“길드장님. ‘아직은’ 안 됩니다.”
한민이 시연을 말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현준은 조금 전부터 마력으로 청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탓에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개념 없는 동생의 버릇을 고쳐주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죠.”
시연이 마력을 거뒀다.
‘아직은……? 재밌군.’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 넘치는 자신감을 꺾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려 하고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전투를 벌이면 이긴다고 해도 던전 공략은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저희 레이스 길드는 따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마정석도 저희가 루팅 한 것에 대해서만 소유권을 주장하도록 하죠. 불만 없으시죠?”
“그,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시연은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중에 다 죽여 버리면 되니까.’
일단, 제안은 받아들였지만, 시연은 몰래 현준을 기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데리고 온 인원 중 절반 이상이 집행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기습에는 자신이 있었다.
‘적당히 몰래 따라다니다가 보스방을 찾으면 다 죽이면 되는 거야.’
시연은 잔혹한 계획을 완성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현준과 레이스 길드원들을 고기 방패로 쓰다가 보스방을 찾으면 다 죽이고 클리어한다는 계획이었다.
지금 당장 칼부림을 벌여봤자 이득이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잠깐 재정비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세요.”
속이 훤히 보였다. 먼저 움직이면 미행으로 따라붙을 게 뻔했지만, 현준은 파티에 전진을 지시했다.
“미행이 붙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예요?”
검은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진아가 천천히 옆에 다가와 물었다. S급 헌터답게 금방 미행의 존재를 간파했다.
물론 현준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일단, 지금은 놔둘 생각입니다.”
“그래도 될까요?”
“저쪽에서도 쉽게 공격해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아 씨는 공략 참여보다는 힘을 숨기면서 뒤쪽을 감시해 주세요.”
“어쩔 수 없네요.”
진아는 짧은 대답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현준의 지시에 헌터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슬슬 마수가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한수와 함께 앞장서서 움직이고 있던 현준은 마수들의 마력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마수 출현!”
방패를 들어 올리며 위험을 경고했다. 보조 탱커를 맡은 한수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창과 방패를 재정비했다.
한수는 첫 S급 던전 공략이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컸다.
복도 끝에서 붉은 안광이 빛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 개가 넘었다. 감지되는 마력 개체 수만 해도 20기를 넘겼다.
‘이 정도 마력이면 B급 20기 정도에 A급 하나인가?’
현준은 전방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던전치고는 조명이 밝았지만, 복도 끝이라서 어두웠다.
B급 20기에 A급 1기면 강력한 전력은 아니기 때문에 정면 돌파가 어렵지 않지만, 여기는 ‘마도학자의 은신처’라는 이름이 붙은 S급 던전이다.
마법 함정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드론을 앞으로 보낼까요?”
규환이 물었다. 현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형 드론이 앞으로 날아가며 어둠을 밝혔다.
이윽고 20기가 넘는 리빙아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하나는 특이하고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A급 마수인 리빙아머 지휘관이 분명했다.
콰직!
선두의 리빙아머 하나가 창을 휘둘러 드론을 파괴했다.
본래 던전의 마수는 드론을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A급 이상의 난이도에서는 마수들의 지능이 고도로 높아지기 때문에 드론을 선제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 더 보냅니까?”
“아뇨, 대형은 전부 파악했습니다.”
규환의 물음에 현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한석에게 향했다.
“한석 씨. 공격 마법을 부탁합니다.”
“전멸시키는 건 무리입니다.”
“적당히 도발해서 이쪽으로 불러들일 정도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한석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상위급의 공격 마법이 리빙아머들의 진형에 작렬했다.
콰앙! 하는 폭발음과 함께 리빙아머 여럿이 파괴되었다.
철그럭!
갑작스러운 마법 공격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빙아머들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이는 A급 마수, 리빙아머 지휘관이었다.
그는 철 갑옷답지 않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한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든밀러, 카르타고.”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지옥참마도와 방패에 오러가 깃들었다.
-크큭! 힘이 차오른다!
검신에서 피어나는 짙은 오러에 지옥참마도는 힘에 도취된 광전사처럼 중얼거렸다.
휙.
휘둘러진 지옥참마도가 리빙아머 지휘관의 갑옷을 단숨에 쪼개고 들어가 핵을 파괴했다.
뒤이어 한수가 달려 나가 다른 리빙아머들을 상대했다. 그 역시 A급 헌터였고, 오러 사용자였다.
현란하게 휘둘러진 창은 리빙아머들의 핵을 일격에 관통했다.
“윈드 커터.”
마지막으로 한석의 마법이 남은 리빙아머들을 정리했다.
“피해 보고하세요!”
“부상자 없습니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현준은 규환과 대화를 주고받은 뒤, 부상자가 없는 걸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걸음을 멈췄다.
“길드장님?”
“앞에 마법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현준은 마법 함정의 존재를 경고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교묘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S급 마법계 헌터인 진아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현준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력을 일으켜 시선과 함께 주변을 훑었다.
-질드레의 음흉한 시선이 숨어 있는 마력을 찾아냈습니다.
질드레의 가호가 발동하면서 숨어 있던 마법 함정의 술식이 드러났다.
현준은 지옥참마도의 칼날 끝으로 마법 함정을 겨눈 채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올렸다.
-질드레의 어두운 지식이 당신을 보조합니다. 마법 술식의 분석을 시작합니다.
분석 결과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화염계 마법 함정이었다.
만약, 제대로 건드렸다면 넓은 복도 전체에 상위급 마법 불꽃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굳이 해제할 필요가 있을까?’
술식 파괴를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려는 찰나에 든 생각이었다.
뒤의 손님들을 위해서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천천히, 절 따라오세요.”
현준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다른 헌터들도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지금 현준의 눈에는 술식의 흐름이 훤히 보이는 상태였고, 덕분에 무사히 함정 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미행해 오던 밤하늘 길드는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뒤편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올 때 현준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뒤에서 함정을 건드린 것 같습니다.”
“저희는 계속 진행합니다.”
규환이 보고했지만, 현준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전진했다.
이윽고 나타난 방에서는 50기가 넘는 리빙아머와 4기의 리빙아머 지휘관이 공략팀을 맞이했다.
“파이어 캐논!”
한석이 완성한 마법이 선두의 리빙아머들을 휩쓰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현준은 방 안에 설치된 마법 함정들을 해제하느라 제대로 전투에 개입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리빙아머들의 수준은 B급 정예 정도였기 때문에 공략팀의 헌터들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죽는 줄 알았네.”
또 한 번의 전투가 끝나고 현준은 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출현하는 마수들의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사방에 설치되어 있는 마법 함정의 존재는 정신적 피로를 유발하기 충분했다.
전생의 방에서 질드레를 만나지 않았다면 공략팀은 전멸을 피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것도 데우스의 설계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게 되니까.
마법 함정은 점점 교묘해졌고, 해제를 하지 않으면 진행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공략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현준은 마력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지옥참마도에는 피를 흡수하여 마력으로 변환하는 옵션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주로 등장한 리빙아머는 피를 흘리지 않는 놈들이다.
“마수 출현!”
축구장 절반 정도 크기의 공동에 들어서기 무섭게 사방에서 느껴지는 마력 반응에 현준은 황급히 위험을 경고하며 오러를 켰다.
-크큭! 붉게 물들지어다.
지옥참마도의 대사를 듣고 흘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인간과 마수를 이어 붙인 것 같은 괴이한 형상의 괴물들이 달려왔다.
“키메라다!”
한수가 외쳤다. A급 최하위부터 최상위까지 편차가 큰 부류였고, 수도 적지 않았지만, 현준은 그들의 출현이 반가웠다.
“피, 피다!”
마력 공급원의 등장이었다.
-크큭! 주인도 드디어 깨달았군! 피의 광기에 물들었어!
이윽고 충돌, 현준은 지옥참마도를 휘둘렀다. 키메라를 베어 쓰러뜨릴 때마다 마력이 회복되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상당량의 마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다음 방에서 만난 아이언 골렘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시간 정도를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치며 공략을 진행했을까? 보스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준이 질드레의 가호를 사용해 철문 너머의 마법 함정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기척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문 열지 말고 기다려 줄래요?”
예상대로 시연과 밤하늘 길드원들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출현에도 불구하고 진아와 석현, 그리고 레이스 길드원들은 현준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현준은 그들 전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수를 살폈다.
처음에 남겨 놓은 마법 함정 몇 개에 당한 것인지 A급 헌터 1명과 짐꾼 역할로 따라온 B급 헌터 3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정석은 많이 루팅 했나요?”
시연이 물었다. 현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보스방을 공략할 생각이라면 양보하겠습니다. 저흰 모두 지쳐 있어서 최종 공략은 무리라서요.
보스만 잡아주신다면 저희가 루팅한 마정석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요?”
현준의 제안에 시연은 크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현준과 레이스 길드원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정석을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전력의 일부를 잃은 상태라 충돌이 부담스러워진 것이었다.
“마법 함정은 해체해두었습니다. 그냥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
거짓말이다.
“고,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이시연은 바보다. 살인 계획을 세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보니 그녀의 옆에 나한민이 보이지 않았다.
‘나한민이라는 헌터가 사실상 이시연의 머리였던 모양이군.’
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죽었으니 이제 끝났다.
“안심하고 들어가시길. 지금까지 마수들의 상태를 볼 때 보스 또한 약할 겁니다. 마법 함정은 제가 제거했으니, 공략이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저희는 지쳐 있어서 무리겠지만요.”
마법 함정이 제거되었다는 거짓말을 한 번 더 강조했다.
“마법 함정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연이 데려온 A급 마법계 헌터가 확인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존의 마법 함정의 술식 위에 은폐 술식을 더 섞어 넣었으니까. 물론 그 짓을 한 장본인은 현준이었다.
“가자!”
시연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철문을 열고 길드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악!”
“커헉!”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인은 악마야.
지옥참마도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