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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만 전생이 날 도와줘-62화 (62/217)
  • # 62

    18장 검은 의도(2)

    희미한 조명 아래 2명의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클럽이나 바(Bar)의 룸으로 보이는 풍경에 테이블 위에는 고급스러운 술병과 과일 안주가 보였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술과 안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희미했던 조명이 조금 더 밝아지면서 두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블레이드 길드장 강기준과 지옥불 길드장 한정우였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면서 룸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악령 길드장 조승현이었다.

    “조금 늦으셨네요.”

    “겨우 5분인데…… 좀 봐주세요.”

    정우가 핀잔을 주었지만, 승현은 가볍게 넘기며 중앙에 앉았다.

    은밀하게 모인 세 사람의 공통점은 수원 팔달구를 담당 레이드 특구로 있으며 대악마의 파벌에 속해 있다는 것이었다.

    “조승현 씨. 알아보셨습니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이는 블레이드 길드장 강기준이었다.

    “예, 물론이죠. 정산 센터에 있는 간부 한 명이랑 친한데, 그 사람한테 물어봤어요.”

    “어떻습니까?”

    기준의 두 눈이 빛났다. 정우도 관심 없는 척하면서 슬쩍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레이스에서 이번에 독점권으로 받은 정산금이 수백억 원 규모라고 하네요.”

    “아이고…… 그걸 다 혼자 처먹다니!”

    승현의 말에 기준은 한탄을 토해냈고 정우도 눈살을 찌푸렸다. 속이 상했다.

    만약 지옥불이나 블레이드 같은 길드들이 우선권을 행사했다면 같이 나눠 먹었을 수 있었던 정산이었기 때문에 더 배가 아팠다.

    “참고로 길드 순이익을 말하는 겁니다.”

    레이드를 클리어하면 길드 단위의 포상도 주어진다. 거기다가 길드원들의 정산금 일부를 길드에 보내는 비율 상납까지 더해지니까 독점권을 발동한 레이스는 수백억 규모의 이익을 보게 되었다.

    승현의 말에 정우는 고개를 저었고 기준은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준이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런데 주혜리 씨는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건지.”

    기준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흘러넘쳤다.

    “따지고 보면 저희가 우선권을 포기하고 레이스에서 다 처먹은 건 주혜리 씨 때문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기준이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뒤에 있는 문이 열리고 거대한 체격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키는 2m 가까이 되고 곰과 같은 체격을 한 그는 대악마 길드장 주형근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정우와 승현이 시선을 피하자 기준은 한발 늦게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로 몸을 돌렸다.

    주형근이 그곳에서 기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 주형근 씨…….”

    “내 동생은 행방불명되었는데, 뒷담화나 하고 있으니까 좋냐?”

    목소리에서 살기가 묻어 나왔다. 기준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살고 싶으면 입 닥치고 있어.”

    “알겠습니다.”

    실버 티어 길드인 블레이드의 길드장이긴 했지만, 기준의 헌터 등급은 B급에 불과했다. A급 최상위 헌터가 마음먹고 뿜어대는 위압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정우와 승현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불똥이 튀는 건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형근에게 말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등장에 적지 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세 사람을 보며 형근은 씨익 웃었다.

    “너희들한테 줄 선물을 가지고 왔지.”

    말을 마치며 형근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머금은 마정석이었다.

    * * *

    “강현준 씨! 접니다! 최한석이요!”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한석이 뛰어 들어왔다.

    1시간 전에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등장에 현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석은 처음 만났을 때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지만 술잔을 기울이면서 친해지자 솔직하면서도 유쾌한 성격이 드러났다.

    다행히 현준은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최한석 : 정의를 믿는 신봉자.]

    진명을 통해 엿본 성향도 나쁘지 않았다. 곁에 둬서 나쁠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실제로 한석과 정규 공략팀 에이스는 이번 레이드에서 현준과 레이스 길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제가 왔습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현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Bar)에서 술을 마시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자신이 술을 산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찾아올 줄 알았다.

    “하하하! 강현준 씨가 보고 싶어서 말이죠.”

    남자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한석은 이번 술 약속을 기회로 삼아 현준과 친분을 다질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현준이 S급 하위의 헌터가 되었다는 사실은 헌터 사회에서 비밀이 아니었다.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A급 헌터도 대한민국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막강하지만, 초월자라고 불리는 S급 헌터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특수능력을 각성하게 되면서 S급 헌터의 경지에 오른다. 그들은 설령 최하위에 있다고 해도 일부 사법 절차에서 면책 특권이 있으며 감세 등 여러 특권과 혜택을 누리게 된다.

    “제 지갑을 털러 온 건 아니고요?”

    “사실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한석은 솔직하게 말했다.

    “저번에 갔던 거기 괜찮죠?”

    “예. 분위기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거기로 가죠.”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 이윽고 바(Bar)에 도착한 두 사람은 룸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양주가 세팅되기 무섭게 한석이 술잔을 채우고 얼음을 하나 집어넣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빈 술잔이 채워지기를 여러 번. 마력 탓에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은 취기가 감돌기 시작할 때 한석이 조심스럽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었는데 현준의 제안 덕분에 많이 회복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우연의 일치였지만 그래서 한석은 현준에게 마음을 열고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술자리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결제를 끝낸 현준은 한석과 함께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요일이었고 번화가라서 근처에 주차할 곳이 없었던 탓에 한석의 수행원이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차량을 주차해 둔 모양이다.

    “그놈의 불금이 뭔지 나 원 참 …….”

    “불금에 불러낸 건 최한석 씨 아닙니까?”

    “아? 그렇긴 하네요. 하하하!”

    현준의 지적에 불평을 흘리던 한석은 머쓱한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현준도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름길로 가시죠.”

    근처 지리는 알고 있었다.

    “좋지요.”

    “골목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죠?”

    “여기 S급 헌터님이 계신 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하하하!”

    던전 레이드 시대의 개막과 함께 대한민국 또한 다른 나라들처럼 치안 사정이 악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한석의 말대로 S급 헌터를 위협할 만한 ‘강도’는 없을 것이다.

    “가죠.”

    먼저 골목에 들어섰다. 그리고.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근처에서 사악한 음모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사신의 경고에 현준은 마력을 끌어 올려 주변을 광범위하게 훑었다. 강력한 마력 반응이 뭉쳐 있었다.

    마력을 숨기려고 했지만, 현준의 예리한 탐색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냥 조용히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마력으로 탐색을 펼친 탓에 저쪽에서도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경고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악한 음모를 언급했지만, 이번에는 누군가 심장을 노리고 있다고 직접적인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최한석 씨.”

    “알고 있습니다.”

    A급 중견 헌터답게 은밀하게 다가오는 적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매직 미사일!”

    하위 마법이었지만 시동어와 함께 생성된 매직 미사일의 숫자는 20개가 넘었다.

    “가라.”

    한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직 미사일이 폭풍처럼 사방에 휘몰아쳤다.

    “큭!”

    “으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검은 복면을 쓴 남자 셋이 추락했다. 그 모습을 본 현준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닌자냐…….”

    그것도 아니면 무협에서나 볼 법한 살수 같은 복장이었다. 상관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무협 소설에 빠져 깊게 읽은 게 분명했다.

    “더 옵니다.”

    현준이 말했다. 어느새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빼든 상태였다.

    “요격하겠습니다. 매직 미사일!”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다시 한번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푸른 빛을 머금은 수십의 매직 미사일이 일제히 검은 불꽃에 먹혀 소멸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소 A급입니다!”

    한석이 경고했지만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현준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A급 헌터는 최상위를 제외하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을 치를 제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상외의 대어가 걸렸군요.”

    플라이 마법을 사용한 것인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사뿐히 착지한 남자는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상의는 하얀 셔츠였는데, 조금 전까지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붉은 피가 잔뜩 뭍어 있었다.

    그가 어느 길드의 집행부 소속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중요한 건 ‘의식’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로 보아 제정신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악마 숭배자인가?”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치안 악화와 함께 괴상한 사이비 종교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악마교도 그런 부류의 하나였다.

    “아뇨. 저는 그런 천박한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답니다.”

    “말투 봐라. 완전 중2병 환자 말기네.”

    눈살을 찌푸리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방패를 꺼냈다. 마법계로 보이니 접근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엄호를 부탁하겠습니다.”

    “맡겨주세요.”

    한석의 대답을 듣기 무섭게 땅을 박차고 가면을 쓴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윈드 커터!”

    뒤에서는 한석이 시동어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고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은 가면남의 목을 노렸다.

    “흩날려라!”

    검은 불꽃이 흩날렸다. 마치 꽃잎이 흩어져 퍼지는 것 같았다. 현준은 잽싸게 뒤로 물러났고 4개의 윈드 커터는 불꽃을 뚫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당신들은 강하군요. 제 ‘본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가면에 손을 올리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 불길한 느낌에 현준 또한 마력을 운용하며 도살자 단검을 뽑았다.

    “이기어검!”

    마력을 머금은 도살자 단검이 가면남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분께 허락받은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도살자 단검이 닿기 전에 검은 불꽃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불꽃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 피 묻은 셔츠를 입은 가면남은 없었고 괴이한 모습을 한 ‘괴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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