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44화 (44/217)
  • # 44

    12장 비열한 그림자(3)

    그들은 여기저기 침투시킨 정보원들을 총동원하여 레이스가 히든 던전을 클리어하고 ‘특별한 뭔가’를 보상으로 얻었다는 헛소문을 사방에 퍼뜨렸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리고 그건 탐욕스러운 자들을 자극했다.

    골드 티어 이상의 길드들은 훌륭한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허황하거나 고의로 퍼진 소문이라는 걸 알고 행동하지 않았지만 실버 티어는 달랐다.

    “집행부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든 던전의 ‘보상’이 뭔지는 모르지만, 저희를 골드 티어로 승격시켜 줄 열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버 티어의 길드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보부도 나쁘지 않았지만 ‘배후’의 존재들이 교묘하게 퍼뜨린 소문의 진위를 파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로 눈치를 보는 가운데, 실버 티어에서도 악명 높은 ‘안데르센’ 길드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집행부를 소집했다.

    늦은 밤, 무장 경비 업체 소속으로 위장한 수송 차량 3대가 수원으로 진입했다.

    안에는 30여 명의 안데르센 길드 집행부 헌터들이 나누어 탑승한 상태였다.

    “우리와 교전할 상대는 고작 브론즈에 불과한 작은 길드의 집행부와 소수의 무장 경비다.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

    첫 번째 차 안에서는 선봉 조장이 조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목표는 ‘전원 생포’해서 확보해라. 상부에서 그걸 원한다.”

    “생포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죽여라. 저쪽에 겁을 줄 필요가 있다.”

    선봉 조장의 말에 집행부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1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목표 중 일부는 ‘어린아이’인 것 같은데…… 동일한 살상 기준을 적용합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선봉 조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앞까지 다가가 정강이를 발로 찼다.

    “윽!”

    “안데르센의 길드 집행부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나?”

    “죄, 죄송합니다.”

    질문을 던졌던 집행부 헌터가 고개를 숙였고 선봉 조장은 수송 칸 내부의 다른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흩뿌리며 입을 열었다.

    “곧 도착한다. 모두 가면 써라.”

    모두 복면을 코까지 올리고 그 위에 가면을 썼다. 이윽고 3대의 수송 차량이 일제히 멈춰 섰다.

    후면의 문이 열리고 30여 명의 집행부 헌터들이 일제히 하차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장악했고 선봉 조장은 지도를 펼쳤다.

    “여기서 북쪽에 목표 지점이 있다. 전속력으로 움직이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선봉 조가 먼저 침투합니까?”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선봉 조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의 한 지점을 지목했다.

    “그렇다. 우리가 침투해서 경계 병력을 1차 제압하고 신호를 보내면 2조가 침투, 합류한다. 그리고 3조는 목표 지점 주변에 분산, 전개하여 퇴로를 차단해라.”

    “2조장, 확인했습니다.”

    “3조장, 확인 완료.”

    전달이 끝나자 그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헌터들답게 일반인의 전력 질주보다 빠르게 달리면서도 은밀함을 유지했다.

    -목표를 확인했습니다.

    선봉 조에서도 먼저 도착한 집행부 헌터의 목소리가 귀에 꽂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선봉 조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경계 병력은?”

    -대문과 담벼락에는 없습니다. 내부에 배치해 둔 것 같은데, 여기서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먼저 침투해라.”

    -알겠습니다. 선봉 조 침투 시작.

    선봉 조에서도 5명이 먼저 담을 넘었다.

    -이상 없음. 무장 경비 셋 제압 완료.

    보고가 들려오기 무섭게 선봉 조장은 곁을 지키고 있는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낸 뒤, 함께 담을 넘었다.

    마당에 검은 옷을 입은 무장 경비 셋이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5명의 안데르센 집행부 헌터가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대부분 건물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2조도 부릅니까?”

    집행부 헌터가 보고했다. 선봉 조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2조 불러. 그리고 안으로 진입한다.”

    “알겠습니다.”

    지시가 전달되었다. 이윽고 2조가 담을 넘었다.

    “2조 전원 합류.”

    “내부로 진입한다.”

    선봉 조와 2조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저택 건물을 포위하듯 전진했고 일부는 날카로운 창처럼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계획 재확인. 목표를 제외한 전원을 사살한다.”

    선두의 집행부 헌터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며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툭.

    오른팔이 잘려나가면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으으으으읍!”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누르며 뒤로 물러났다.

    “고, 공격……?”

    “위치 파악해라.”

    B급 헌터가 일격에 팔이 날아갔다.

    핏줄기가 솟구치기 직전에 어둠 속에서 드러난 창백한 얼굴을 본 것 같았지만 확실치 않았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으니까.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위, 위치 파악 불가.”

    “전혀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선봉 조와 2조, 도합 20여 명의 안데르센 집행부 헌터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컥!”

    “윽!”

    이번에는 2명이 당했다.

    “즈, 즉사입니다. 일격에 급소를 당했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선봉 조장이 달려가서 시신을 살폈다.

    ‘귀신같은 솜씨다. 기척도 전혀 없고.’

    떨리는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살폈지만, A급 헌터인 그의 감각에도 잡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S급 헌터가 개입한 건가?’

    이 정도로 철저하게 기척을 숨길 수 있는 건 고도의 암살 훈련을 받은 A급이나 S급만 가능한 경지였다.

    “2조장.”

    선봉 조장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2조장을 불렀다. 소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2조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다.”

    “함정에 빠졌다는 겁니까?”

    2조장이 물었다. 선봉 조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제대로 엿된 것 같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2명이 또 쓰러졌다.

    둘 다 B급의 숙련된 집행부 헌터였지만, 저항은커녕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의 가슴에서 슬슬 두려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위치 확인 불가!”

    “이대로는 전멸합니다.”

    “내, 내부로 진입한다!”

    안데르센의 집행부 헌터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저택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것보다는 살기 위해 도망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크아아악!”

    “커헉!”

    출입문 가까이 있던 4명이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핏줄기를 내뿜었다.

    모두가 당황해서 멈춰 서자 그들의 앞에서 어둠이 벗겨지면서 검과 방패를 든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 레이스 길드장 강현준?”

    누군가 말했다. 그와의 교전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런 방식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한 탓에 모두가 놀랐다.

    “살아나갈 생각은 버려라.”

    현준이 말했다. 동시에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위대한 수호가 함께하는 한, 당신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연이어 3개의 가호가 발현되었다. 검과 방패에 오러가 깃들고 전신에서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와 춤을 췄다.

    “집행부에게 명령한다!”

    “길드 집행부가 길드장님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깃든 검을 들어 올리며 외치자 저택의 창문과 출입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레이스 길드 집행부 헌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옥상은 물론이고 담 너머에도 무장한 병력이 출현했다.

    “이, 이런……!”

    “처음부터 포위되어 있었던 건가?”

    선봉 조장과 2조장은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단순한 구덩이 함정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낭떠러지였다.

    “미, 미친…… 레이스 놈들이 집행부 전부를 데려온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의 집행부 헌터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스의 집행부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무장 경비들까지 수십 명이 몰려온 탓에 수적으로 너무 많이 차이가 났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10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은 상황이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던 그들은 대량의 적 출현에 더욱 절망하고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한 명도 도망치게 하지 마라!”

    현준이 외쳤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태민과 종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옥상에 자리 잡은 무장 경비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알이 안데르센 병력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헌터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기 때문에 현대 화기로 쉽게 상대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C급 정도의 헌터들은 이렇게 기관총과 자동소총의 대규모 화력을 집중하면 감당 못 한다.

    “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C급 헌터 대부분이 쓰러지고 B급 4명과 A급인 선봉 조장과 2조장이 남았다.

    “3조도 공격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조장이 외쳤다.

    교전이 계속되는 동안 안데르센의 헌터들은 계속해서 쓰러지고 있었지만, 레이스의 헌터들은 쓰러져도 순백의 빛이 터져 나오면 부상을 순식간에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 A급 이상의 회복계 헌터가 저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강현준이라도 죽인다!”

    선봉 조장과 2조장,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목표는 길드장 강현준이었다. 물론 지금은 몰랐지만, 그건 굉장히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현준은 앞으로 나서려는 태민과 종서를 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데르센의 헌터 2명이 먼저 달려들었다.

    한 명은 정면에서 창을 찌르며 빠르게 파고들어 왔고 다른 한 명은 바로 뒤에서 거대한 대검을 들어 올렸다.

    변칙적이면서도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현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다 보여.’

    카르타고와 하사신, 그리고 시든밀러와 같은 훌륭한 스승들과 ‘전생의 방’에서 실전 수준의 훈련을 거듭한 덕분에 그는 살인 병기 수준의 살상 기술과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콰앙!

    방패를 휘둘러 창을 튕겨내는 것과 동시에 오러를 머금은 검을 휘둘렀다.

    “큭!”

    목이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튀었고 창을 든 헌터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현준은 그의 등을 밟고 도약하여 대검을 든 헌터의 뒤에 착지했다.

    “제, 제기랄!”

    섬뜩한 살기에 대검을 든 헌터가 욕설과 함께 몸을 돌렸지만.

    “끝이다.”

    현준의 검은 이미 휘둘러졌고 그의 상체를 대각선으로 깊이 베었다. 핏줄기가 솟구쳤고 그는 힘없이 쓰러졌다.

    뒤이어 선봉 조장과 2조장이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현란하게 휘둘러진 현준의 검 앞에서 두 A급 헌터는 3분을 버티지 못했다.

    “크아아악!”

    “커헉!”

    선봉 조장은 오른팔을 잃었고 2조장은 두 다리가 사라졌다.

    그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린 현준은 이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는 아공간 주머니에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태민을 향해 손짓하여 그를 호출했다.

    “집행부장.”

    “말씀하십시오. 길드장님.”

    “안데르센에 메시지를 보내세요. 그쪽 사람들 몇 명을 우리가 데리고 있다는 내용이면 될 겁니다.”

    “저쪽에서는 부인할 겁니다.”

    태민이 말했다. 그러자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건 어디까지나 ‘경고’를 위한 사전 준비니까요.”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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