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만 전생이 날 도와줘-21화 (21/217)

# 21

6장 지키지 못한 자(2)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문을 열었다.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윽!”

문을 열기 무섭게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의 근원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시체들이었다.

“대, 대체…….”

대학살의 폭풍이 지나간 듯한 광경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방을 많이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늦지 않았군.”

현준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체의 산 위에 창백한 안색의 기사가 앉아 있었다.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던 것인지 눈동자는 붉었고 속눈썹은 젖어 있었다.

“내 이름은 단치히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정규 공략팀 에이스와 함께 던전을 공략할 때 그의 가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지키지 못했고, 모든 것을 잃었다.”

공허한 눈동자가 현준에게 향했다.

“넌 그래서는 안 된다.”

단치히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시체의 산에서 내려와 현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의 환생이여, 나의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네게 소중한 이들을 지킬 힘을 주겠다.”

“감당하겠습니다.”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현준의 대답에 단치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견뎌내 봐라. 내가 겪었던 지옥을.”

단치히가 마력을 일으켰다. 다량의 마력이 팔을 통해 현준에게 주입된 순간이었다. 현준은 전혀 새로운 곳에서 눈을 떴다.

주변에는 꽃이 많았다. 어느 정원의 중심인 것 같다.

‘여, 여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이다. 네게 통제권은 없다. 그저 가만히 나의 감정과 고통을 느끼면 된다.”

옆에서 단치히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빠!”

8살쯤 되었을까? 아주 작은 꼬마 숙녀가 다가와 안겼다. 분명 처음 보는 꼬마였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지금 내 감정과 완벽하게 동화된 상태니까.”

단치히가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현준은 꼬마 숙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우와아앙! 아빠!”

“하하하!”

불평하는 꼬마 숙녀를 보며 현준은 기쁨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에리나가 싫어하잖아요.”

정원에 모습을 드러낸 미모의 여인이 말했다. 분위기상 단치히의 아내인 것 같았다.

“안나, 너무 에리나 편만 드는 거 아니야?”

“피이, 엄마는 딸 편이네요.”

안나의 말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점이 바뀌었다.

‘벌써 1년인가…….’

단치히의 기억 속에서 그의 감정을 느끼며 1년을 생활했다.

‘단치히가 된 기분이군.’

안나와 에리나뿐만 아니라, 단치히의 주변 인물들과도 정이 든 기분이다.

“기사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크레이그.”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크레이그는 거친 숨을 한차례 몰아쉬더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침략 사령부가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왕국이 목표가 된 것 같습니다.”

절망의 시작이었다.

“이제 지옥이 시작될 거다.”

단치히가 옆에서 속삭였다. 그리고 시점이 바뀌었다. 그는 폐허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사방이 시체였다.

모두 기억 속에 있는 이들이었다. 쓰러진 이들을 향해 느껴지는 슬픈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에리나와 안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24시간 동안 가해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것이다.

현준은 온몸이 포박되어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다.

“침략 사령관님의 뜻에 따라 이곳은 우리가 점령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신체를 통제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기억 속의 단치히도 지쳐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짓을…….”

단치히의 기억에 깃든 현준이 물었다. 스스로도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참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단치히의 감정은 고요한 폭풍과도 같았다. 소리 없이 내면을 파괴하고 있었다.

“침략 사령관님의 뜻이다. 깊게 알려고 하지 마라.”

“넌…… 내가 반드시 죽인다.”

단치히의 기억이 외쳤지만, 현준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에리나와 안나는 이미 그의 기억 속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기대하고 있으마.”

그 말을 끝으로 창이 심장에 꽂히면서 의식은 전생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알겠나?”

단치히가 물었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힘은 전해졌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느끼고 있는 증오는 방아쇠가 되어서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줄 거다.”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치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가리켰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당장 가고 싶지?”

“잘 아시네요.”

차분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가라. 가서 보여줘라. ‘우리’의 힘을.”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문으로 달려갔다. 문고리에 손이 닿기 무섭게 힘차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빛이 찾아왔다.

* * *

-반드시 지켜내라!

하늘에서 섬광이 내리꽂혔다.

“뭐야!”

“대, 대마법?”

현준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몰려들었던 헌터들이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힘이 넘친다.’

얼마 전에 에이스와 함께 던전을 공략할 때 단치히가 처음 내려준 가호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키지 못한 자, 단치히의 의지가 깃듭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한, 당신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느 때와 같은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준은 들어 올린 검에 다시 마력을 주입했다.

-시든밀러의 용맹한 검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정의로운 용기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쓰러지면서 잠시 사라졌던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저렇게 걸레짝이 되고도…….”

“미친 괴물 새끼!”

자신을 보며 괴물이라고 욕하는 헌터들을 보며 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괴물? 원한다면 기꺼이 괴물이 되어주마.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마력을 끌어 올렸다.

-리퍼의 잔혹한 살의가 깨어납니다. 치명적인 살기의 일부가 해방됩니다.

쿠웅!

“크, 크윽!”

“또, 이런!”

살기에 노출된 헌터들이 신음을 흘렸다.

리퍼의 가호는 결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단치히의 가호가 함께해서 그런지 발현이 어렵지 않았다.

“그거 넘으면 다 죽는다고.”

“커헉!”

현란하게 휘둘러진 검이 가까운 곳에 있던 헌터의 목을 쳤다.

일격에 머리통을 날려 버리지는 못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인지 그는 피를 쏟아내는 목을 부여잡고 거리를 벌렸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버려라. 난 아무도 살려주지 않을 거다.”

후환을 남길 생각은 없었다.

“다 죽어가는 시체 새끼가 입만 살았군! 저 새끼 죽여 버려!”

팀장이 명령하자 헌터들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은 뒤, 현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에서는 전격이 내리꽂혔다.

너무나 순식간이라 피하지 못했다. 그대로 직격당했다. 하지만 현준은 쓰러지지 않았다.

거목처럼 우뚝 서서 그 자리를 지켰다.

-반드시 지켜내라!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단치히의 목소리가 정신을 깨워주었다.

“상위 마법을 맨몸으로 견뎌냈다고?”

“신체 강화 갑니다! 블레…… 컥!”

블레스 버프를 사용하려던 보조계 헌터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풀썩 무너졌다. 그의 이마에는 현준이 던진 단검이 꽂혀 있었다.

“버프 쓰지 마.”

차가운 말을 남긴 채 검을 휘둘러 다른 헌터의 팔을 잘라낸다.

흩뿌려지는 피의 분수 속에서 냉정하게 하나씩 목숨을 챙기는 그 모습은 마치 사신과도 같았다.

“괴, 괴물 새끼…….”

이제 3명 남았다. 팀장으로 보이는 전투계 헌터 하나와 마법계 헌터 2명. 다른 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사신의 경고도 없는 걸로 보아 이게 전부인 모양이다.

“파이어 캐논!”

“라이트닝 볼트!”

현준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공격 마법이 완성되었고 팀장이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죽어라!”

팀장이 살기를 흩뿌리는 것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는 없었지만, 위협적인 베기였다.

현준은 검을 회수하여 팀장의 공격을 방어했다.

현준의 검에는 오러 블레이드가 있었지만, 팀장의 검에도 마력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검신이 절단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와 맞붙어 있는 것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하다.

팀장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태세를 정비했다. 그가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화염구와 전격 줄기가 현준을 노렸다.

“크윽!”

화염구는 검으로 막아냈지만, 전격은 피하지 못했다. 일순간 감전되면서 근육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팀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혀, 현준아!”

-반드시 지켜내라!

뒤에서 들려오는 소진의 목소리와 단치히의 일갈이 희미해지던 정신을 다시 깨웠다.

“미, 미친!”

들어 올린 검이 팀장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렸다. 시든밀러에게 가르침을 받은 현준은 검술로 팀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제기랄!”

멀리 나아간 검을 회수하기에는 늦었다. 팀장은 욕설과 함께 단검을 뽑아 들어 현준의 연속 공격을 방어하려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은 방어했지만, 문제는 세 번째였다.

그건 검을 이용한 공격이 아니었다. 검을 회수하는 순간 드러난 하체의 빈틈을 노린 다리 걸기였다.

“크윽!”

넘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하체가 흔들리면서 자세가 무너졌고 그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잘 가라.”

“마, 마법계! 뭐 하고 있나!”

그는 황급히 지원을 요청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뒤에 있는 마법계 헌터 2명은 아직도 캐스팅 중이었다.

거의 끝을 보이긴 했지만 당장 도움이 되지는 못했고 현준의 검은 팀장의 흉부를 꿰뚫었다.

“너, 너 이 새끼! 우리 에코 길드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일격에 심장을 찌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발악을 한 탓에 빗나간 모양이다.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현준은 흔들림 없이 검을 뽑은 뒤, 팀장의 목을 쳤다.

“너희야말로 잘못 건드렸어.”

이윽고 시선은 마법계 헌터들에게 향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현준은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법계 헌터 남녀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현준은 보았다. 남자 쪽의 소매에서 작은 단검이 스르륵 나오는 것을!

“커헉!”

“꺄아아아악!”

용서는 없다. 무자비한 공격에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여자는 비명을 내질렀다.

“사, 살려주세요! 저 여자라고요!”

“그래서? 네가 날 죽이려고 한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

“그, 그건…… 아악!”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검을 휘둘러 그녀의 목숨을 취했다.

“다 끝났어요…….”

단치히의 가호가 끝나면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현준은 힘없이 쓰러졌고 소진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손을 뻗었다.

“히, 힐!”

하지만 치유의 빛은 생성되지 않았다. 마력이 바닥난 것이다.

“아, 안 돼…… 제발…… 현준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현준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상의를 벗어서 피를 쏟아내는 상처를 지혈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 설마…….”

또 다른 적이 있었나 싶은 마음에 소진은 절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단검을 들어 올렸다.

“누나가 지켜줄게.”

떨리는 두 손으로 단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10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한 명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스 길드의 집행부장 김태민입니다. 안심하세요. 우리는 강현준 씨의 적이 아닙니다.”

그제야 소진은 단검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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