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3장 죽고 싶으면 와라(2)
“증거는 어떻게 하지……?”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목격자는 없다고 하지만 다른 증거가 남아서 귀찮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사신이 사악한 계략을 시작합니다. 배후의 그림자가 당신과 관련된 흔적을 지웁니다.
다시 한번 가호가 발현되었다.
그의 소매 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그림자들이 현준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 칼부림이 있었던 현장을 한 차례 훑었다.
옷이 말끔해진 것을 본 현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죽은 이들에게서 아이템을 챙기지는 않았다. 매각했을 때 덜미가 붙잡힐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집행부 헌터들을 보낸 길드에서는 그들이 생환하지 않은 순간부터 현준이 범인이라는 걸 예상하겠지만, 물증을 남기지 않아야 귀찮은 경찰 조사 같은 걸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갈까.”
그 모습은 마치 소풍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죽음이라고 해도 좋을 상황을 수천 번 이상 겪은 탓일까? 그의 정신 어딘가가 마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원룸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아침이 밝았다. 현준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샤워를 하고 나온 뒤, 택시를 타고 던전 관리국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헌터님. 자격증을 제시해주시겠습니까?”
대기 순번이 되자 안내 창구 앞에 앉았다. 그러자 사무원이 밝은 미소와 함께 반겨왔다.
현준은 품속에서 C급 헌터 자격증을 꺼내서 사무원에게 보여주었다. 사무원은 자격증을 빠르게 훑은 뒤, 전산망에 조회를 끝냈다.
“확인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강현준 헌터님. 오늘은 무슨 일로 던전 관리국에 찾아오셨나요?”
밝은 미소의 여자 사무원이었다. C급 헌터의 자격을 얻으니, 그를 대하는 사무원의 태도부터가 남달랐다.
과거 F급 헌터 시절에는 무시당했던 기억 때문에 친구이자 던전 관리국의 직원인 석규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서 부탁하고는 했었다.
“네, 매칭 때문에 왔어요.”
“매칭을 신청하실 난이도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C급이요.”
헌터는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짐꾼을 제외하면 동급 이하의 던전만 파티 매칭을 신청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 도전하고 싶지만, 단독 진입은 A급 이상의 헌터에게만 허용되었다.
“신청되었습니다. 매칭이 완료되면 저희 쪽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C급 던전의 파티 매칭은 처음 신청해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르는 게 많았다.
“길면 3일 정도 걸리겠지만 빠르면 오늘 안에 연락이 갈 겁니다.”
사무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던전 관리국을 나왔다.
‘아공간을 살 때까지는 돈을 모으자.’
마음속으로 작은 다짐을 했다. 열심히 던전을 공략한다면 금방 5천만 원 상당의 아공간을 구입할 수 있을 터였다. F급 헌터 시절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늑한 원룸으로 돌아갔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던전 관리국의 연락을 받았다.
-강현준 헌터님이십니까?
이번에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네, 제가 강현준입니다.”
-신청하신 C급 던전의 매칭이 완료되었습니다. 일정과 집결 장소를 메시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 통화가 끝나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략 일정은 다음 날로 조금 빠른 편이었지만 현준은 상관없었다.
그는 승낙 의사를 답신으로 전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자 저녁을 해결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꿈을 꿨다.
* * *
[정의로운 방패]
이번에는 카르타고였다. 현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 크기의 넓은 방 중앙에 카르타고가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갑옷에 투구까지 쓴 완전무장 상태였다.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준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카르타고와의 거리를 좁혔다. 발치에는 방패와 검이 놓여 있었다.
“그동안 너를 지켜봤다. 전투 방식을 보니까, 창보다는 검이 어울릴 것 같더군. 그래서 준비했다.”
카르타고가 말했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과 방패를 집어 들었다. 곧 수련이 시작될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수련입니까?”
“나와 대련한다. 내가 상처를 입을 때까지.”
“네?”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준은 무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지만, 카르타고의 수준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한 번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대련이 성립될 리가 없었다.
“걱정 마라. ‘전력’을 다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창으로 현준을 겨눴다.
“하사신을 만났으니, 조금은 더 성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바로 간다.”
카르타고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가호가 발동했다.
-카르타고의 정의로운 방패가 당신을 수호합니다.
-하사신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오러 실드가 생성되었고 모든 감각이 강화되었다.
‘보인다!’
움직임을 완벽하게 읽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잔상이 아닌 실체가 보였다.
카르타고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성장이었다.
콰앙!
“크아아아악!”
오러가 깃든 두 방패가 충돌했다. 사방에 마력 파편이 튀었다.
현준은 방패를 들고 있는 왼팔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는 비명을 내뱉으며 뒤로 밀려났다.
아니나 다를까 왼팔이 완전히 으스러져서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내 일격을 막다니, 훌륭하다!”
카르타고는 감탄하면서도 창으로 현준의 목을 노렸다.
‘검으로 막는다!’
왼팔이 박살 났다. 방패는 쓸 수 없다. 그렇다면 검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다. 현준은 서둘러 검을 들어 올려 목을 방어했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창은 현준의 검을 교묘하게 흘려 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을 꿰뚫었다.
“큭!”
현준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지만, 관통상을 입은 목과 뼈가 박살 난 왼팔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대단하군. 솔직히 너의 그 경이로운 성장 속도에 감탄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네 경지에 맞추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걸 막다니…….”
카르타고가 말했다. 현준은 이미 회복을 끝내고 전투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고통을 수천 번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익숙했다.
“감사합니다.”
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절대적인 무력을 지닌 강자한테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계속 간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다시 대련이 시작되었다.
“크윽!”
현준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냉혹하게도 자비를 두지 않는 카르타고 덕분에 현준은 다양한 방법으로 쓰러졌다.
“굉장히 빠른 성장 속도다. 대단하군.”
카르타고는 현준이 쓰러질 때마다 감탄했다. 대련이 이어지면서 현준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보인다, 보여.’
현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시야에서 카르타고의 움직임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그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준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카르타고와 하사신의 가호가 함께하면서 머릿속에 남은 그들의 경험을 최대한 이끌어 냈다.
“크아아악!”
어깨를 관통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피하기만 해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물러나는 대신 고통을 참고 카르타고의 몸으로 파고드는 것을 선택했다.
“으아아아!”
“이런!”
정의로운 방패, 카르타고. 그는 방패술의 달인이었지만 대련을 위해 본신의 힘을 제약하고 있는 데다가 현준의 예상치 못한 돌격 전술에 정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창을 뽑아내려 했지만, 현준이 다가오면서 그의 몸에 더욱 깊숙이 박힌 상태라 쉽게 뽑히지 않았다.
‘창을 포기한다!’
결단은 빨랐다. 창대를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방패 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준이 조금 더 빨랐다. 그가 내찌른 검이 카르타고의 뺨을 스쳤다. 그의 뺨에 붉은 핏물이 맺혔다.
“스쳤나?”
카르타고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으로 현준에게서 창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크윽!”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카르타고가 손을 휘젓자 현준의 상처가 회복되었다.
“축하한다.”
“끝난 겁니까?”
“그래, 솔직히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500번은 더 쓰러질 거라 생각했었지.”
카르타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현준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카르타고.”
그 말을 끝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여느 때처럼 원룸의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곧 C급 던전 공략을 위한 집결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방패와 검을 챙긴 뒤, 집결 장소로 이동했다.
예전 같았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겠지만, 큰돈이 생긴 데다가 더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탓에 자가용을 사지는 못하더라도 ‘택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요.”
검과 방패로 무장한 현준의 모습은 헌터, 그 자체였다. 집결 장소 근처에 다다르자 마찬가지로 헌터의 복장을 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현준을 불렀다.
현준의 시선이 남자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 4명이 모여 있었다.
‘내가 마지막인가 보네.’
공략 인원은 총 5명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했지만, 집결 시간은 10분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반갑습니다. 파티장을 맡게 된 박세준이라고 합니다.”
“강현준입니다.”
파티원들과의 통성명이 끝났다. 세준은 파티의 유일한 B급 헌터였다.
“다 모였으니까, 괜찮으시다면 바로 진입하겠습니다. 괜찮죠?”
세준이 물었다. 현준도 고개를 끄덕였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좋습니다. 강현준 씨? 탱커를 부탁해도 될까요?”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믿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네. 제가 맡을게요.”
현준은 흔쾌히 승낙했다.
“던전 입구를 열겠습니다.”
문이 열렸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