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세기 천마실록-21화 (22/29)

제 21화 청도(靑島)로 가는 길

"말을 한 필이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편해졌을텐데 말입죠."

절반의 짐을 짊어진 허유가 투덜거렸다. 비가 온지 얼마나 됐다고 푹푹 쪄지는 듯한 기온에, 습한 공기까지 버무려진 탓이다.

짐꾼은 그에 눈치없이 말했다. 그것도 부러진 왼팔 대신 오른쪽에만 짐을 잔뜩 든 채로.

확실히 힘이 장사이긴 했다.

"마산호는 인근 강과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찾기 힘들겠네요. 세 분께서 거쳐오신 제녕에는 많았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에 설화가 제가 알고 있는 지리 지식을 뽐내며 받아쳤다.

"그래도 힘들었을 겁니다. 산동은 예로부터 강이나 호숫가가 많았으니 말입니다. 제녕에서 곡부(曲阜)로 이어지는 관도가 아니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마산에도 관도가 있긴 하지만 뱃길 때문에 관리가 잘 안되니 밀압니다."

저런 자세한 지리 정보는 군부에선 중요하게 관리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신나서 막 내뱉어 버리는 것에 가까울까.

분명 꽤 신뢰를 받는 듯한 군부의 밀정이건만, 무진은 어째서인지 그녀가 기밀 정보를 마구 떠벌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보여준 멍청한 모습들이 영향을 미쳤겠지.

'잠깐, 설마 계책인가?'

순간 설화가 지금껏 보인 모습이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꾸며낸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아니, 짐을 다 쏟으시면 어떡합니까. 거기에 들어있는 옷이 몇 벌인데!"

"그럼 아가씨가 들던가, 왜 나한테 지랄이요. 낸들 저기에 돌뿌리가 튀어나와 있을지 알았겠습니까요?"

어느새 허유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무진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설령 연기라 한들 저 정도면 속아주는 것도 예의가 아닐까.

게다가 자신에게 모습을 숨겨서 얻어낼 이득이 그리 많지 않았다. 무진은 격화되어 가는 둘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다가간다.

* * *

해가 진 숲 속의 공터에서 일행은 짐을 내려놓고 모닥불을 땠다.

장작 타는 소리가 은은한 열기와 함께 퍼졌다. 그러기를 벌써 몇 시진째. 설화와 허유는 자리를 펴고서 진즉 잠에 들은 상태였다.

가만히 불멍을 때리는 것도 슬슬 지루했던 바. 무진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소년을 떠보았다.

"자네. 엊그제 무예 대회에 참가한 걸 보았는데."

"…보셨군요."

"인상깊었지. 특히 마지막에 창을 막아내는 장법. 옛 소림의 무학을 떠올리게 하는 공부였어. 혹시 그쪽에 연이 있나?"

무진의 말에 소년의 눈이 크게 떠진다.

"어… 고인(雇人)도 무인이셨습니까?"

그 말에 무진은 잠시 사색에 빠졌다.

"무인(武人)이라…"

"아니십니까?"

"맞을거다."

아마도 라고.

끝에 붙였어야 할 뒷말은 흐리면서다.

무인이란 단순히 무예를 익힌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수도(修道)의 길을 걷는 자들을 말하는가. 무진은 이따금씩 그러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한동안 장작 타는 소리만이 숲 속을 울렸다. 그러다 문뜩 정적이 길어졌음을 깨닫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생각이 너무 길었구나."

"아, 아닙니다. 그런데 고인께선 양복을 차려입으셔서 무인은 아니신줄 알았는데…"

"무인이라고 죄다 도복을 차려입고, 산 위에 틀어박혀 벽곡이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안 그런가?"

"그런가요… 지금껏 계속 등봉현에 살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소림의 옆에 붙어있던 마을이군. 이번에 소림이 봉문했다 하여 피해가 막심할 터인데."

"저도 그래서 내려왔습니다. 본래 숭산을 오르는 짐꾼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봉문 직후 일이 뚝 끊겨서요."

"저런…."

무진의 결정 하나가 많은 이들의 삶을 틀어놓은 셈이다. 더러는 하루아침에 땅바닥 인생으로 쳐박히고 말았겠지.

솔직히 생각해서 모두를 책임질 수는 없다. 무진은 협객은 아니며, 성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애당초 자신과 소림도 은원으로 묶인 사이 아니던가.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타협을 한다. 무진의 경우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생각이다.

허나 한둘 정도는. 지금처럼 어찌하여 손이 닿는 거리라면 뻗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민을 마친 무진은 말했다.

"그럼 혹시, 자네가 익힌 무공도 소림의 것인가?"

"예? 아, 예. 무려 칠십이절예라 하며 비싼 값에 비서를 팔기에, 사서 익혔습니다."

"그럼 혹시, 그것이 가짜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는가?"

"......"

소년이 침묵한다. 모르고 있었던 눈치일까. 고개를 돌리고 있어 쉽게 판별이 가질 않는다.

다만 그가 무진으로부터 속내를 숨기려 하는것은 알겠다. 필시 밝히기 껄끄러운 생각이겠지. 무진이 덧붙여 말했다.

"소림의 칠십이절예는 전설 상으로 내려오는 신공이지. 하나같이 세간에 명예가 드높아. 정작 무림에서는 근 백년간 익혀낸 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어요."

무진이 더욱 강하게 쏘아붙인다.

"문파는 어지간해서는 비급을 풀어내지 않아. 하다못해 자신들의 기본공인 육합권과 정좌심법을 풀어낸 것마저 특이한 사례로 손꼽히지.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알아요. 다 알고 있었다니까요. 옆 집 최씨 아저씨도. 윗 집 명이 할아버지도."

무진의 말을 들은 소년이 축 늘어졌다. 그 태도에서 왠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소년이 진실을 깨닫고 경악하는 모양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불편한 마음 한 켠 구석을 들쑤시는 듯한 표정.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걸까. 감히 상상할수 없는 무언가라는 것은 잘 알았다.

소년은 한참을 주저했다. 입술을 달싹이다, 마른 침을 꿀떡 넘기기도 하며.

타닥ㅡ. 탁ㅡ.

장작 타는 소리가 애처롭다. 심경을 훌륭히 대변하는 듯하다.

무진은 조용히 기다렸다. 소년이 스스로 입을 열기 까지. 그리하여 일 다경의 시간을 침묵한 후 마침내.

굳게 닫겨있던 입술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는, 병신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지?"

"등봉현은 병신들이 아닙니다 어르신. 글귀를 몰라도 사는 법을 알았고, 복잡한 계산은 못해도 제 식구 먹여살릴 셈어림은 할 줄 압니다. 다들 그러지요. 아무리 반푼이 새끼랄지라도."

"그렇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같으니."

"그럼, 저희가 왜 칠십이절예를 샀다고 생각하십니까. 멍청해서? 아닙니다. 책자 한 권 살 돈이면 한 달을 먹고사는걸 다들 압니다."

"......"

소년은 지금 말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모두 알고 있었노라고.

소림이 등봉현의 주민들을 등쳐 먹으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알고 있었음에도 속아 주었다고.

"그렇군… 너희들은 믿었던 게야."

속아 줌으로써 믿었던 거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소림이 남긴 무학을 삼으로써. 피같은 땀 흘려 번 돈을 진상함으로써.

자신들을 수백 년간 먹여살렸던 소림이 언젠가 다시 화려하게 일어설 것이라고. 막연한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림은 봉문하고야 말았다.

"죄송합니다. 고인께 말이 과격했네요."

"아니다. 내가 너에게 배우는게 많구나."

무진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썩은 구정물만이 모여 있던 옥 안에서 살다 보니, 제 시야도 검게 물든 듯하다. 그래선 안됐다.

답답하고 각막한 세상으로 보였으나,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별빛과도 같은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밤하늘처럼.

보석같이 빛나는 성광이 없었다면 그 누가 야천(夜天) 을 아름답다 평하겠는가. 다만 무저갱같은 어둠만이 무한히 펼쳐진 망망대해와 다를 바가 없음이랴.

그 사이를 표류하는 것은 실로 절망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보라.

별빛은 아직도 저리 빛나지 않는가.

"내가, 편협했어."

그 순간, 무진의 안에서 기가 광풍과도 같이 몰아쳤다. 깨달음이다. 다만 그것은 아직 불완전해서 하나의 경지를 이룩하기엔 조금 부족하다 느껴졌다.

무진은 자연스레 해답을 찾았다.

바로 옆에 있는 소년의 눈빛에서다.

"자네, 소림에서 구한 책을 가지고 있나?"

"예… 그런데요."

"그걸 펼쳐 보게."

"그걸 보시려는 겁니까…?"

"그래."

무진은 벅차오르는 깨달음의 쾌감에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뒤이어 덧붙였다.

"내가 자네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지."

소년은 본능적으로 무진의 말에 담긴 무게를 느꼈는지, 제 짐 보따리에서 낡은 서책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무진은 그걸 수 다경에 걸쳐 찬찬히 훑어보고는 그에게 단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 든 내용은 모조리 익혔나?"

"예…."

"그렇군."

소년의 확답을 들은 무진은, 그 자리에서 지체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끝에서 피어오른 삼매진화가 낡은 서책의 끝에 가 닿자, 종이가 흔적도 없이 불타 사라졌다.

남은 잿가루만이 열기를 타고 올라가 허공에서 흩날고 있을 뿐.

"어…?"

"따라오게. 내 직접 전수해 주지."

소년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상황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본능은 이것이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알아챘다.

성장의 단초가 될 기연이란 소리였다.

무진은 깊은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모닥불의 희미한 빛조차 닿지 않는 먼 곳.

자그만 계곡 바로 옆에 나 있는 커다란 바위의 위였다. 소년은 발 끝으로 바위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어지간한 충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듯한 강도.

무예를 갈고닦기엔 안성맞춤인 곳이 아닌가.

"이런 곳을 미리 알고 계셨나요?"

"아니. 직감이 따르는 대로 찾아왔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진이 몸을 돌려 소년을 쳐다보았다.

달빛 아래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가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그간은 전혀 몰랐는데.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무진의 모습을 보니 말로만 듣던 고수의 위압감이 피부에 와닿는다.

소년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어제, 딱 이 시간대였지. 그때는 비가 많이 왔지만 지금은 아니군."

"어제 이 시간대요? 비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때, 그 창잡이. 기억나나?"

"안 날 리가요. 이제 겨우 하루 지난 일 아닙니까."

"그래…."

소년이 자꾸만 뜸을 들이는 무진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왠지 모를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여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움직임도 기억하겠군. 내공을 사용한 움직임이었지. 그건 전해 들었겠지?"

"…예. 상대의 반칙으로 이기게 됐다는 말은 들었는데, 팔이 부러져서 다음 비무는 참가도 못 해봤습니다."

착 가라앉는 소년의 눈빛.

무진이 그에 따져물었다.

"억울하지 않나?"

"억울… 하다니요?"

"초식의 완성도. 육참골단을 각오한 수 교환. 내가 보기엔 모두 네가 앞서 있더구나. 순간순간 상대가 꺼내든 내공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

"너는 소림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잘못된 무공을 팔아치운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라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었겠지. 뻔한 이야기다.

무진이 야공(夜空)에 섞여버릴 듯한 칠흑색 기를 두른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마지막, 창 끝을 막아냈던 너의 일 초를 기억하느냐."

붉은 쌍안이 소년의 눈을 지긋이 응시했다. 소년은 어딘가 모르게 그 눈빛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상대가 고수라서 그렇겠지. 일생에 한두번 찾아올까 한다는 기연이 아닌가.

"예...."

무진이 씩 웃었다.

"가까이 오라."

낮게 읊조려진 무진의 목소리는 마치 마라 파피야스가 속삭이는 듯해서. 이곳으로 오라고. 원하는 것이 내 손 안에 있노라고.

점차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해서.

소년은 미끼를 덥썩 잡아채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번아웃 비슷한게 와서 작성이 계속 늦어졌습니다.

현생하고 관련이 깊어서... 해결 방법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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