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화
청도(靑島)로 가는 길
"다음! 비무대 위로 올라오시오!"
공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가 무인들을 호명한다. 오른쪽에 서 있던 앳된 소년이 비무대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무진의 시선도 똑같이 한 발짝만큼 움직였다.
굳은살이 가득한 투박해 보이는 주먹. 단련되었음에도 나이를 숨기지 못하는 어린 체형. 골목 사이에서 보았던 그 소년이 맞다.
분명 등봉현에서 지내는 듯했는데 어찌하여 여기서 장사치들의 호객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진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소림이 봉문한 탓이군.'
등봉현은 소림이라는 문파 하나에 기대어 살아가는 도시. 무진이 소림에 난리를 치고 떠나간 이후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결국 자신의 탓이라는 뜻이 아닌가.
무진은 소년에게 희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분명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격이지만, 모르던 사실을 알고 나서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음…"
죄책감이란 참으로 무거운 감정이다.
특히 상대가 모르는 일에 대해 느끼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은원에 얽매여 살아간다는 것.
죄책감은 은원과 같다. 갚아야 할 빚이라는 얘기다. 대상이 저토록 어리다면 더더욱.
소년이 비무대 위에서 자세를 잡았다. 상대로 올라온 이는 창술가. 어깨 뒤에 매달고 있던 기다란 창을 쥐어 들고 소년을 향해 겨눈다.
물론 창 촉은 베이지 않도록 날을 뭉툭하게 갈아둔 채였다.
반면에 소년은 붕대를 칭칭 감은 두 주먹만을 호기롭게 들어 올릴 뿐. 한눈에 보기에도 길이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난듯싶었다.
주먹으로 검과 창을 상대한다는 것은 절세고수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 삼류 정도의 수준에서 꿈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무진도 악가주를 상대할 때 꽤 고생하지 않았던가.
후웅ㅡ. 후우웅ㅡ.
상대로 나선 이가 창대를 날렵하게 휘두른다.
막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들려왔다. 소년이 그것을 힘겹게 피해내고, 곧장 보법을 밟아 반격하려던 순간.
창술가가 창대의 반대편 끝으로 소년을 가격했다.
툭…
뭉툭한 막대 끝이 소년의 돌진을 막아냈다. 그에게 있어선 사실상 유일한 공격 기회가 날아간 셈. 끝이다.
소년은 창이 넓은 사거리에 밀려 뒤로 밀려나기만을 반복했다.
"잘한다!"
"너한테 오늘치 일당 전부 걸었다고!"
처마 아래서 상단(商團)의 인감이 찍힌 종이를 들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무인들의 비무판이 자그마한 현에서는 얼마 안 되는 도박의 장인 셈.
그렇다 보니 소년을 응원하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의 시선은 자신의 하루 일당을 불려 줄 창술가에게 쏠려 있는 형국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넓게 휘둘러진 창은 소년의 오른쪽 옆구리를 세게 가격했다. 고통에 벌려진 입 구멍 사이로 마른 날숨이 빠져나왔다.
"끄허…"
소년이 배를 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앞으로 승리를 선언하듯 허공을 휘적이는 창대의 모습이 보인다. 실로 자신만만한 모습.
"그래! 이거지!"
관중들의 호응을 끌어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무대에 서 본 경험이 많은 것일까. 소년이 확실히 좋지 않은 상대를 만났다.
무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소년이 일어서는 모습을 본 직후였다. 관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으니 충분한 돈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가 무릎을 겨우 짚고서 일어난다. 숨이 차는지 제멋대로 들썩대는 어깨는 덤이었다. 제 상대를 눈에 담으려 다시 올라가는 고개.
소년이 보여준 의지에 관중들이 또다시 환호했다.
"지지 마라!"
무진의 의문은 소년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해소되었다. 저건 천성이 싸움꾼이다. 무예를 즐기며 결투를 피하지 않는다.
흡사 짐승과도 같다. 다르게 말하면 가장 이상적인 무인의 눈빛.
'…대단하군.'
그가 자세를 잡았다. 곧바로 창대가 올려진 팔을 향해 쏘아졌다. 정면으로 부딪혀 꺾어 놓겠다는 심산일까.
짜악ㅡ!
소년의 전완과 나무 창대가 충돌하고. 살갗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터졌다. 어찌나 세게 울렸는지 그 고통이 고막을 타고 넘어오는 듯하다.
역시나, 일 초를 막아낸 소년의 표정이 고통에 차 있다. 시뻘겋게 퉁퉁 부어오른 왼쪽 팔뚝. 부러진 모양이다.
'저 팔은 못 쓰겠군.'
상대편의 한 수에 소년의 좌반신이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생사결이라면 다음 한 수로 목숨이 날아갔겠지. 하나 지금은 장터 한복판의 공연이다.
창잡이는 소년의 오른팔을 공략하려 한다. 상대를 더욱 비참한 몰꼴로 만들수록 관객의 호응 또한 증가할 것이기에.
소년의 우반신마저 방어 불능으로 만들기 위한 공격이 쏟아진다. 투사의 본능일까. 소년의 동작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팔꿈치의 각도를 틀어 힘을 허공으로 빗겨내는 움직임. 몸짓이 실로 기민했다.
'재능은 있어. 허나 부족하다.'
이를테면, 내력.
그는 분명 소림에서 팔아치운 잘못된 심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내공의 운기 경로는 물론이요 기를 받아들이는 호흡부터 잘못되었단 뜻이다.
그렇게 되면 기혈이 망가지고 자시고 이전에, 단전에는 티끌만큼의 내공조차 쌓이지 않는다. 내공이 없는 무인. 그 자체만으로 결격 사유였다.
그 차이는 곧바로 나타났다.
진화에 가까운 발전을 거듭하는 소년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창잡이가 전신에 미세한 내력을 끌어올렸다.
본래 이런 저잣거리 대회에서는 내공의 사용이 금기시될 터.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무진을 제외하고는.
견식 하는 이들과 심판을 보는 이들 모두 수준이 낮은 탓이다.
쩌어억ㅡ!
휘둘러진 창대가 소년의 몸을 한 차례 후려팼다. 소년의 두 눈이 충혈될듯 커진다. 이전과는 격이 다른 고통일 테지.
"끄아아ㅡ!"
애처로운 비명이 소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창잡이가 가소로운듯 조소하며 말했다.
"그만 항복해라 이놈아. 그러다 반대 팔도 부러질라?"
"……"
소년은 말없이 상대를 노려보기만 한다. 이빨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상대는 그에 질린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내뱉었다.
"에이, 쯧. 또라이 새끼한테 걸렸구먼. 그럼 더 처맞고서 가라. 돈이나 더 벌게."
그가 소년을 향해 창을 내지른다. 오른팔을 향해 매섭게 쏘아지는 촉 끝. 뭉툭하게 갈렸다고 한들 위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엔 내력을 제법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흘려내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부러질 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무심한 듯 팔을 뻗어 응수한다. 탁 풀린 동공으로. 고통으로 이지를 상실한 것일까.
"끝내라!"
"때려 눕혀버려!"
장 내의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럴수록 관중들은 과격함을 원한다. 본능적으로 좀 더 큰 자극을 갈구한다.
자신은 그 바람을 이뤄줄 뿐. 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소리가 모두 돈이다. 팔을 부러뜨리자. 그리 생각했다.
'봐 줄 생각은 없다. 이놈아!‘
허공 사이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일 초. 똬리를 풀고 튀어나가는 뱀처럼 신속했다. 부러지는 소년의 손목 뼛소리가 벌써부터 생생하다.
창대가 빗방울을 뚫고 쏘아졌다. 촤아악ㅡ!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르며 허공을 유려하게 날아. 묵직한 강철 날은 소년의 손바닥에 당도한다.
분명 우두둑, 하고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터업ㅡ.
내력 한 줌 들어있지 않은 소년의 손이 초식을 가로막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무진은 그 수법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닫고는 경악했다.
'철포삼(鐵布衫)…!'
소림의 무학이 어찌.
분명 자신이 슬쩍 보았던 견본은 곳곳에 하자가 나 있는 물건이었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칠십이절예다.
불가능한 일이다.
창잡이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뭘…'
놈의 눈빛이 실로 무저갱 같다. 온몸 털끝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잡아먹힌다. 창잡이는 순간 자신이 쌓아온 내력을 죄다 끌어올려,
휘둘렀다.
뻐억ㅡ!
일격을 정통으로 맞은 소년이 기절한 채 허공에 붕 떴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털썩ㅡ.
창잡이는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는다.
귀신에 홀린 듯하다. 놈의 동공이 그랬다. 마치 이승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부질없다. 결국 변명에 불과할 뿐.
"이런…."
씨발.
창잡이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새어 나온다.
심판이 외친다.
"사람의 힘이 아니다. 내공을 사용했어! 실격패!"
무진은 충격에 빠진 채 소년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대놓고 반칙을 사용한 창잡이를 욕하는 이들. 그리고 땀 흘려 번 돈을 따여버린 도박꾼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혼잡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어수선한 장 내의 분위기가 상인들에 의해 중재 되고.
사람이 전부 빠져 돌아갈 때까지도 무진은 소년이 쓰러진 방향을 멍하니 응시하기만 했다.
"…주님. 문주님!"
"음?"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는 겁니까요? 정리도 다 끝난듯한데, 저희도 돌아갑죠. 몸도 성치 않으시잖습니까."
"그래. 그래야지."
마지막, 손바닥으로 내력 실린 창끝을 막아내던 소년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그날 무진은 잠을 설쳤다.
무언가 단초를 잡아낸 듯해서다.
* * *
비가 그친 아침. 운무가 짙다.
일행은 짐을 모조리 챙겨 객잔을 나온 상태였다.
"나리. 어찌 한숨도 안 주무셨습니까요?"
"잠시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그러면 뭐 별 할 말은 없겠습니다마는. 그래도 내상을 입으신 상태가 아닙니까요. 몸은 챙기심이…"
"맞습니다. 나이가 사십 줄이라고 하시던데, 늙어서 몸 함부로 굴리면 후회합니다. 온갖 골병에 들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허어."
무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설화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자신의 나이가 그녀의 곱절이라 한들, 무공 수위를 생각하면 한참은 더 건강할진대.
그녀에게 한마다 따끔한 훈계를 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못 고치고 입만 아플 뿐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고수의 직감은 실로 예지와 같다.
그녀의 경우에는 답이 없다는 소리와 마찬가지.
무진은 속으로 그녀에 대한 판정을 끝마치고는, 일전의 발언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허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짐꾼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요. 짐 덩이가 참…"
허유는 그러곤 설화를 곁눈질로 한번 흘겨보았다.
그에 무진이 답했다.
"그래도 저것은 제 발로 걸어 다니니, 그나마 나은 처지가 아닌가."
"문주님 말씀이 정확합니다요."
"아니 지금…"
무진이 설화의 말을 뚝 자르고는 명령했다.
"조용히 해라. 두고 가는 수가 있으니."
"……"
"쓸만한 짐꾼을 찾으러 가자."
"예입."
일행은 어제 지났던 거리를 되돌아가 부두 쪽을 향했다.
대부분의 물류가 부두에 집하되는 탓에, 대부분의 마차와 짐꾼들 또한 그곳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허유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쓸만한 짐꾼이 있는지 한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모두 거절. 길게 이어진 호수인 마산호의 뱃길은 이른 새벽부터 사람이 몰린다.
무진과 같이 거센 비바람의 풍량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면, 보통 미약한 바람과 노에 의지해 나아간다.
때문에 이곳에는 힘쓰는 사람이 귀했다.
"큰일이군. 한시가 바쁘거늘."
"그러게 말입니다요."
일행이 모두 놀고 있는 짐꾼이 없나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죄다 오늘치 일당이 잡힌 듯 짐을 들어 옮기고 있는 상황.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찰나, 무진의 뒤에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ㅡ!!"
곧바로 뒤를 돌아보는 일행.
그러자 어제 무투회에서 보았던 소년이 헐떡대며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이나 호흡을 몰아쉰 소년이 말했다.
"혹시 짐꾼 구하십니까?"
"그런데."
"혹시 저를 써주실 수는 없나요? 이래 봐도 무공을 익혀서 힘은 좀 쌥니다!"
소년은 그러며 근육 잡힌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물론 부목을 덧댄 왼팔은 등 뒤로 슬쩍 감추면서다.
"…문주님. 이놈 써도 되는겁니까요?"
"일단 쓰지. 다른 짐꾼이 없으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게 본선을 가는군요... 처음 써보는 글에다가 성적도 안좋아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참 감사할 다름입니다.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 * *
내일은 최신화 대신, 예고했던 추가 에피소드를 올릴 예정입니다.
곤륜의 제자로 등장했던 천유월의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지 못한 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첫작이라 그런지 인물을 다루는 법이 아직 익숙치가 않네요. 그래도 차차 늘려가겠습니다.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