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94
수현은 작은 외할아버지의 사업 참여 이후로 어머니의 불편한 시선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그 외에도 혼자 다닐 때는 어린애 취급을 하고, 무시하기도 하던 부동산 사람들이 깍듯하게 대하는 것도마음에 들었다.
물론 단순히 나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벤츠 s클래스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사람에게 함부로 할 사람은 없으니까.
“흠, 여기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작은 외할아버지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수현이 대답하자 작은 외할아버지는 옆에 있던 부동산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
“아, 그럼 날짜를 잡아볼까요?”
“그렇게 해주시오. 날짜는 빠를수록 좋으니 최대한 빨리 해주시고.”
“예, 그럼요. 금방 연락 해보겠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얼른 핸드폰을 들고 약간 거리를 두고 사라졌다.
“흠, 확실히 저 혼자 다닐 때에 비하면 쉽네요.”
“어리다고 이리저리 치이지?”
작은 외할아버지가 작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네... 솔직히 좀 힘들더라구요. 대충 보여주는 사람들은 양반이고... 사업 하기는 할 거냐고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수현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외국이라고 안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은 이 나이도 상당히 중요하다. 법적으로만 어려운 게 아니야.”
작은 외할아버지가 그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네... 생각보다 더 그렇더라구요...”
수현의 말에 작은 외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어쨌든 건물 계약은 이제 끝났고... 인테리어랑 기계 마련을 해야겠구나.”
“네. 방학 기간 안에 끝내야 하니까... 빨리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협상할 때는 조급하게 굴면 안 된다. 네가 지는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잔소리는 이쯤하고 저녁이나 먹자.”
작은 외할아버지는 갓길에 주차해둔 벤츠로 향하며 말했다.
“네! 어디로 가실래요?”
“어디긴... 너 만난다니까, 우리 집 대장이 집으로 꼭 데려오라고 하더라. 우리 집으로 가자. 시간 괜찮지?”
“그럼요.”
할아버지의 물음에 수현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에 올랐다.
“그리고 네가 직접 사업하기 시작하면... 되는대로 좋은 차랑 옷 마련해라. 사람이란게 참 간사해서 돈 많은 사람한테는 얼마든지 고개를 숙인다.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 어쨌든 그러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지. 투자 쪽은 잘 되고 있니?”
할아버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네. 쭉 오르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크게 벌 기회도 있을 것 같고...”
수현이 자신감 있게 웃으며 말했다.
“허, 그게 다 보이니?”
할아버지는 대단하다는 감정을 내보이며 물었다.
“그냥 대략적으로요...”
수현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뿌듯하다는 웃음을지어보였다.
“네가 이렇게 커줘서 참 고맙다. 널 보면 형님 생각이 많이 나. 우리 형제 중에 제일 똑똑하신 분이었다. 내가 세상 잘난 사람들 많이 만나봤지만, 우리 형님보다 잘난 사람은 별로 못 봤어.”
할아버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 꼭 성공하겠습니다!”
수현이 다짐하듯 외쳤다. 할아버지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벤츠는 방배동의 조용한 고급빌라촌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반갑게 맞이해주는 작은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밥 두 공기를 먹어야만 했다.
*
수현은 연희가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버스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비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날이었지만, 밖은 여전히 특유의 끈적한 느낌이 있었다.
-응... 비 때문에 앞에 사고가 있나봐... 좀 늦을 것 같아...
버스가 도착시간에 한참 늦어져서 불안해질 때 쯤, 연희의 전화가 왔다.
“응. 괜찮아. 어차피 안에서 기다리는데 뭐...”
-배고프면 점심 먼저 먹고 있어!
“누구 없이는 배가 안 고파서... 같이 먹자. 근처 맛있는 라멘집 알아뒀어.”
-치... 알았어. 좀만 기다려?
“당연하지. 편안하게 와. 내 걱정 말고.”
수현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정말 곧 차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비오는 날에 자동차로 데리러 왔으면 좋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수현이 슬슬 허리가 아파올 무렵 연희를 태운 버스가 도착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현은 얼른 꽃다발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기야!”
연희의 반가운 웃음은 언제 봐도 질리지를 않았다. 둘은 서로를 가볍게 껴안았다.
“오늘은 백합이네?”
연희가 향을 깊게 맡으며 말했다.
“응.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래.”
수현이 가벼운 웃음으로 말했다.
“음, 만족스럽다!”
연희의 맑은 웃음이 백합과 어울려 환하게 빛났다.
“잘 어울린다. 가볼까?”
수현이 그 모습을 뿌듯하게 보며 말했다.
“응! 가자!”
연희가 즐겁게외쳤다. 둘은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커다란 우산에 몸을 딱 붙이고 걸었다. 워낙 크게 쏟아지는 비라서 조금씩 안으로 들이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와-. 오늘 진짜 장난 아니다!”
연희가 수현의 품에 더 파고들며 킬킬거렸다.
“근데 어째 좋아 보인다?”
수현이 우산을 바짝 들고 물었다.
“그냥... 자기 늑대의 유혹 알지?”
연희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그 강동원 나오는 거잖아.”
수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응! 그거! 거기에 우산 씬이 하나 있거든. 우리가 잠시 그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했지.”
연희가 말을 마치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이악조건에도 그 상상이 드니?”
수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자기 비주얼도 딱 맞네!”
연희가 수현의 턱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하자, 수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 여주인공은 확실히 지금이 더 예쁘긴 하네...”
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하자, 연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크게 흘렸다.
“으휴, 빨리 가기나 하자. 이러다 진짜 다 젖겠다.”
수현은 잠시 늦춰졌던 발걸음을 빠르게 하며 말했다. 연희도 얼른 동의했다.
둘은 음식점까지 즐겁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둘은 브레이크 타임을 간신히 피해서 자리에 앉았다. 라멘을 시키고 둘은 서로의 옷을 보며 웃었다. 어쩔수 없이 젖은 부분들이 짠해보였다.
“우리 자기... 어깨 넓어서 다 젖었네...”
연희는 수현의 약간 젖은 어깨 쪽을 톡톡 두들겨주며 말했다.
“흠, 좀 섹시한가?”
수현이 작게 속삭이자 연희가 빵 터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 좀 채우고... 잡아먹고 싶을 만큼?”
연희가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엔 수현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 원래는 먹고 카페 가려고 했는데... 너무 젖어서 힘들겠다... 그치?”
수현이 작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카페에서 빗소리들으면서 커피 마시면 좋을 텐데...”
연희가 약간 튕기듯 말했다.
“근데 너무 젖지 않았어? 난 좀 찝찝한데...”
수현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연희가 큭큭거렸다.
“연희야?”
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협박하듯 말했다.
“알았어! 나도 찬성!”
연희가 더 작게 큭큭거리며 말했다.
“확실하지?”
“응! 뭐든 좋아!”
연희가 수현의 허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둘의 얼굴에 맑은 웃음이 흘렀다. 그때 쯤, 라멘이 나왔다.
“음! 냄새는 합격!”
연희가 즐거운 얼굴로 평가를 하고는 국물을 떠서 먹었다.
“맛은?”
“이것도 합격!”
연희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럼, 먹자!”
둘은 맛있게 라멘을 먹기 시작했다. 축축한 옷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맛이 좋아서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한 정도였다.
“근데 자기, 이렇게 시간 널널하게 써도 괜찮은거야?”
연희가 약간 걱정스럽게말했다.
“괜찮아. 준비도 착실히 되고 있고... 우리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도와주고 계시거든...”
“아, 진짜?”
연희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외쳤다.
“응. 대기업 임원 출신이시라, 믿고 맡길 만한 분이시지. 난 그래서 생각보다 여유로워.”
수현이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래도 너무 나한테 맞춰서 시간 낼 필요는 없어.”
“걱정 마세요. 시간 관리 잘 하고 있으니까.”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와 여전히 멈출 줄 모르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와... 그래도 좀멈출만한데...”
연희가 약간 질린 듯 말했다.
“아예 여기서 쇼핑 좀 하고... 호텔가서 갈아입을까?”
수현이 연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 변태.”
“내가 뭘 생각한 줄 알고?”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연희가 작게 눈을 흘겼다.
“가자. 꼬까옷 사줄게.”
수현이 씩 웃으며 말하자, 연희가 어쩔 수 없이 가준다는 듯 따랐다. 우산 하나에 꼭 붙은 둘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연희가 약간 개구진 표정을 짓다가 일부러 물웅덩이를 크게 밟았다.
“으악!”
수현이 불시의 공격에 소리를 지르자, 연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
수현이 연희를 더 꽉 껴안자 연희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어차피 갈아입을 거잖아!”
“으... 너 두고 봐.”
수현이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연희가 얼마든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현은 샌들에 원피스를 입은 연희보다 긴 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참기로 하며 걸음을 옮겼다. 연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