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
수차례 고기가 익어 사라지고, 술병들이 옆 쪽 야외 복도를 절반쯤 녹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수현과 민형은 강민과 병훈에게 집게를 돌려받아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도 취기로 제법 벌겋게 되어 있었다.
“야.”
민형이 살짝 머뭇거리며 수현을 불렀다.
“왜? 아, 잠만. 이거 좀 주고. 야, 강민!”
수현이 집게를 들고 강민을 불렀다. 강민이 벌건 얼굴로 크게 웃으며 원샷을 하곤 일어났다.
“왜, 뭔데.”
수현이 민형에게 다시 대답했다.
“막 티를 안 내고는 못 견디겠고 그러냐?”
“뭐야, 시비냐?”
“아니, 진짜 존나 신기해서 그래. 그렇게 존나 좋냐?”
민형이머리를 긁적였다. 강민이 비틀거리며 소주병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으흐흐흐. 니들도 한잔씩 더 받아! 자!”
“미친 새끼... 잔도 안 가져오고 먹으랜다...”
“어? 맞다. 흐흐흐흐. 병샷?”
“고기나 가져가고, 너나 병신샷 처 먹어, 새꺄!”
강민이 허허 웃으며 잘 익은 고기를 건네받고는 잔을 가지고 다시 오겠다는 듯한 제스쳐를 하고는 비틀비틀 돌아갔다.
“저거, 한두 잔 안에 가겠네...”
민형이 중얼거렸다.
“흠, 뭐 나도 이런 적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좋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수현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민형의 물음에 대답했다. 진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전의 여친들과는 달랐다. 단순히 얼굴이 예뻐서만은 아니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병신 같은 소문 돌고 그래도?”
“그런 소문은어차피 뭘 해도 돌 걸? 감수하는 거지. 왜, 네가 소문 내냐?”
수현이 피식 웃으면서 집게로 민형을 가리켰다. 민형도 집게를 들어 수현의 집게를 툭 쳐 냈다. 가볍게 챙 소리가 났다.
“아니, 시발... 그냥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지...”
민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고맙다? 근데 뭐 이러나저러나 나는 소문이면 남들 배 아픈 소문이 낫지. 안 그러냐?”
수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새끼... 존나 긍정적이네.”
“나야 그렇고... 넌 여친 안 사귀냐? 미팅은 매번 나가잖아. 소개팅도 나가고.”
“몰라... 클럽도 가보고 하는데... 막 존나 좋아죽겠다는 느낌이 없던데...”
민형이 애매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 갈 때 마음가짐 차이일 수도 있지. 미팅이나 클럽이나 사실 좀 가볍게 나가잖아. 아님 뭐, 사귀면서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르잖아. 넌 무슨 내가 기준이냐? 그리고 우리도 처음이랑 달라진 거 많아.”
수현이 민형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조금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냥 큰 느낌 없다가 일단 사귀고 엄청 좋아지기도 하나?”
민형이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물었다.
“뭐, 그렇기도 하다던데? 그래도 연락하는 애는 있나보네.”
“뭐...”
민형은 말끝을 흐렸다.
“요즘엔 술 마시고 지랄은 안 하냐?”
“응, 뭐 그 이후로는 적어도 아직?”
민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이 아니라 이제 안 한다고 해야지, 새끼야...”
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뭐 확실한 거 아니니까... 헐, 미친. 저새끼 봐.”
나름대로 진지하던 대화가 멈췄다.
강민이 ‘아, 맞다!’를 외치며 종이 소주컵과 소주병을 들고 일어나다 바닥에 철푸덕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무슨 개그 영화 같았다. 소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주변 아이들이 놀라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가 후딱 끝내고 들어가자. 불도 약해지고....이젠 춥다.”
“병신... 난 과잠 있거든?”
이미 인원의 절반은 시체가 되어 술자리에서 하차했고, 남은인원 중에도 버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인원이 절반쯤은 되었다.
수현과 민형은 마지막 고기를 다 올려 굽고 대충 뒷정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오늘의 자원봉사자들에게 술로 애정을 표현하며 맞이했다.
연희는 원샷 후 잔을 내리는 수현의 입에 고기를 쏙 넣어주었다. 사람들은 약간 야유를 보내기는 했지만, 나쁘게 보는 눈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줄어든 인원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약간 소강상태에 있었다.
우억!
그들은 종종 방금처럼 입을 막고 토해낼 곳을 찾아 방황하는 좀비들을 인도하기도 하며 잠시 쉬거나 가볍게 술을 마시며 있었다.
수현은 살짝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하려는 여자 동기를 따라 나간 연희는 동기만을 방에 들여보냈다.
“저기요. 옆에 앉아도 돼요?”
수현이 건물 옆쪽으로 돌아 벤치에 앉아있는 여자의 뒤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흠,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녀가 그를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네, 저 되게 착한 사람인데?”
“크흡! 착한 사람은 보통 자기 착하다고 안 하던데요?”
“흐흐흐. 한 번만 믿어 봐요.”
수현이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흠, 뭐 좋아요.”
여자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고개를 도도하게 끄덕였다. 달빛에 그녀의 옆선이 교태롭게 빛났다.
“되게 도도하시네요. 옆에 앉기도 힘드네.”
수현이 입가에 선선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친구가 그랬거든요. 제가너무 예뻐서... 다가오는 남자는 다 조심해야한다고.”
“남친이 좀 걱정이 많은 타입인가 봐요? 귀찮겠다.”
수현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자상한 타입인 거죠. 완전 좋은데요?”
여자가 수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크흐흐흐.”
수현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연희를 끌어안았다.
“앗! 이러시면 안돼요!”
“가만히 있어. 좀만 이러고 있자.”
말만 하는 저항에 수현이 그녀를 더 꽉 안으며 말했다.
“뭐야아. 맨날 이렇게 금방 끝나!”
연희는 조금 더 상황극을 이어가고 싶었는지 약하게 그를타박했다.
“네가 너무 예뻐서 내가 못 참으니까. 내 잘못은 아냐.”
수현이 당당하게 말했다.
“치... 말은 잘해.”
연희는 그러면서도 수현의 몸에 팔을 두르고 토닥였다.
“그나저나, 자기 고기냄새 엄청 난다.”
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 미안!”
수현이 깜빡했다는 듯이 팔을 풀었다. 연희가 재빨리 팔에 힘을 주고 그를 끌어당겼다.
“뭐야. 누가 도망가래?”
“냄새난다며.”
연희가 끌어당겼음에도 수현은 최대한 연희에게 몸을 떨어뜨리려 했다.
“가지마. 나 누구 딸인지 잊었어? 빨리 다시 안아줘.”
연희가 더 바짝 붙어오자 수현이 엉거주춤 그녀에게 팔을 둘렀다.
“자기 안 추워? 내내 이거 내가 입고 있었잖아.”
연희가 더 몸을 붙이고 그를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수현에게는 달콤하게 들렸다.
“네가 안아주잖아. 따듯한데.”
“내가 좀 따듯한 여자긴 하지.”
둘은 동시에 피식 웃고는 조금 더 끌어안으며 서로를 토닥였다.
“히히. 자기야, 저기 봐. 달 되게 밝지.”
연희가 수현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틀고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네...”
“별도 많이 보이고.”
“그러게...확실히 도시랑 다르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나중에... 자기랑 우리집 뒷산 가서 밤하늘 보고 싶다. 여기보다도 훨씬 잘 보이거든...”
연희가 수현을 토닥이며 말했다.
“지금 나 꼬시는거야?”
“서울촌놈한테 별 보여주면 바로 넘어오겠지?”
연희가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벌써 넘어갔는데, 어떻게 또 넘어가?”
수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야, 넘어왔는데 왜 아직도 진한뽀뽀가 없지? 응?”
둘은 눈을 맞추며 웃고는 천천히 눈을 감고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아주 가볍던 키스의 농도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제법 달콤하고 끈적한 소리가 밤공기를 작게 울렸다.
탕-!
우웨엑!
갑자기 문이 훽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어명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근처 풀숲에 토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과 연희의 어깨가 움찔하며 떨어졌다.
“우리... 조금 걷다가 올까?”
수현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연희에게 말했다. 달빛을 살짝 등진 그의 얼굴에서 눈만이 맑게 빛났다.
“...응...좋아.”
연희가 잠시 고민하다가 속삭였다. 둘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뒷길로 걸어 나갔다. 방금 나온 듯한 두 남녀가 수풀 옆에 쪼그려 있었다. 여자아이 등을 남자가 두드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펜션입구를 나온 두 남녀가 좁은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올 때는 몰랐던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다. 둘은 하늘의 달을 보며 손을 잡고 걸었다.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자기야.”
“응?”
“이쯤에서 좀 앉을까?”
연희가 약간 낮은 돌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수현이 동의하며 담벼락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았다. 연희는 앉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수현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연희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수현도 지그시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을 느꼈다.
“흐음-. 예뻐라.”
연희가 키스를 마치고 수현의 입술을 엄지로 쓸어주며 말했다.
“예쁘다 말고 멋있다.”
수현이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한 척을 해보이며, 옆으로 비켜 앉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툭툭 쓸어 연희를 앉게 했다.
“이런 예쁜 짓만 골라하니까 예쁘다고 하는 거지! 그리고, 이제 이거 자기가 입어.”
연희가 기분 좋게 웃고는 과잠을 벗으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정말... 우리 아빠도 그렇고... 왜 남자들은 이걸로 막 허세를 부리는지 모르겠네!”
연희가 냉큼 수현의 양손을 잡고는 말했다. 산은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수현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크흠. 뭐....근데 너 춥잖아. 몰래 네 꺼 다시 가지고 나올 수도 없고.”
“다 방법이 있지.”
수현이 들킨 게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연희가 가볍게 그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뭔데?”
“이렇게!”
연희가 수현의 어깨에 과잠을 걸치고는 수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그의 가슴팍에 등을기댔다.
“팔!”
연희의 말에 수현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에게 단단히 붙였다.
“어때? 완전 따듯하지?”
연희가 만족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응. 제일 따듯하네.”
수현이 연희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말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그렇게 있었다.
“자기야. 그거 알아?”
“뭐?”
“이게 내가 중학교 때 연애 버킷리스트 만들면서 처음에 넣은 거다?”
연희가 만족스런, 그러면서도 약간은 부끄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뭐? 연애 버킷리스트?”
수현이 작게 웃으며 되물었다.
“응.”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현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근데 백허그면 전에도 한 적 있지 않나?”
수현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백허그긴 백허그인데, 이런 백허그. 우리 엄마랑 아빠가 겨울에 별 보러 뒷산 가면 자주 이러고 있었거든. 어릴 때부터그게 그냥 되게 좋아보였어.”
수현은 낭만적인 부부의 세계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 까지도 집안은 언제든 흉흉해질 수 있는 예리함을 갖추고 있었다.
“해보니까 어때?”
“생각보다더 좋다. 우리 자기 탄탄한 몸매 덕인가?”
연희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현은 별 말 없이 피식 웃기만 했다.
“그때... 엄마 표정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엄청 소녀 같았거든.”
연희는 살짝 꿈꾸듯이 말했다.
“너도 그래.”
연희가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수현과 연희는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분명 이정도면 어느 정도 정신이 있는 아이들은 그들이 사라진 걸 알아챘을 테지만, 커플은 거기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자기야...”
연희가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수현을 불렀다.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마.”
수현이 조금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그냥... 건강해서 좋다구.”
연희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흥.”
“알았어요. 삐치지마아.”
연희는 가볍게 웃으며 수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수현이 그게 전부냐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연희가 꺄르르 웃고는 냉큼 입을 맞춰왔다.
잠시 서로의 입술을 맛보던 그들은 불편한 자세를 바꿔 서로를 껴안고 진한 키스를 이어 나갔다. 어둡고 고요한 산길에 물기어린 소리가 작게 울렸다.
쪽.
입술이 떨어졌다가 다시 짧게 부딪히고 떨어졌다.
“흐음, 이제 가자. 너무 오래있던 것 같아.”
“하, 좀 힘드네. 으쌰. 가자.”
수현이 바지를 고치며 말했다. 둘은 내일을 기약하는 눈빛을 주고받고는 펜션을 향해 왔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들이 로맨스를 즐기는 동안 펜션 앞 계단에서도 또 다른 로맨스가 시작 중이었기 때문이다.
“헐. 자기...”
“쉿!”
수현과 연희는 흥미진진하면서도 함부로 봐도 괜찮나 싶은 그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민형과 소영이 펜션 입구에서 서툴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 연희야. 여기 길 있다. 이리로 올라가자.”
수현이 수풀 옆쪽으로 길이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돌아가 무리에 살포시 섞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형과 소영도 들어왔다.
그렇게 커플들의 밤이 끝나고, 엠티도 마무리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