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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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과 연희는 오랜만에 일산으로 데이트를 나갔다. 연희가 오랜만에 토토를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수현 또한 싫을 이유가 없었기에 둘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즐겼다. 오랜만의 만남에도 토토는 연희를 알아보는 듯이 친근하게 굴었고, 연희는 그걸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호수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산책을 즐긴 그들은 막판에 퍼져버린 강아지를 안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수현이 벤치에 앉은 연희에게 말했다.
“응. 천천히 갔다 와.”
연희가 선선히 손을 흔들고 토토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수현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집에 토토를 데려다주고 저녁을 챙겨주었다. 과외 책을 챙겨 가방에 넣은 그는 빠뜨린 것이 없는지 집안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수현이 연희가 있는 벤치 쪽으로 다가갈 때쯤, 그는 멀리 그녀 앞에 남자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현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그는 거의 달리듯이 연희를 향해 다가갔다.
수현이 벤치 근처에 거의 도달했을 때 쯤, 남자는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수현이 조금 맥빠진 얼굴이 되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빨라진 호흡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뛰었어?”
연희가 수현을 보고는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안 뛰게 생겼니?”
수현이 호흡을 정리하며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수현이 귀여워서 연희가 작게 웃었다.
“이거 주더라. 요즘에도 이런 게 많나 봐.”
연희가 명함 하나를 수현에게 내밀며 말했다.
“00엔터테이먼트?”
수현이 눈을 찌푸리며 읽었다. 그가 아는 곳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수현의 생각처럼 헌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는 곳인데, 뭐 누구누구 있다고 알려주더라. 여기 앞에 촬영하러왔다가 봤다면서 주더라구.”
연희의 말에 수현은 입맛을 다셨다.
일산이 꽤 길거리 촬영이 많긴 하지만, 그것도 매니저한테 걸릴 줄이야. 확실히 그들 눈에도 띄는 외모긴 한 것 같았다.
하긴, 둘이 서울에서 데이트할 때도 받은 기억이 있었다.
“진짜... 혼자 두면 겁이 난다. 응?”
수현이 한숨을 쉬고 명함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냥 자기가 버려줘.”
연희가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이 얼른 명함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가자. 우리 애기 삐진 것 같은데, 누나가 저녁 사줄까요?”
연희가 키득거리며 수현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은근히 연희는 수현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언제 삐졌어... 혹시 나쁜 놈일까봐 뛴 거지.”
수현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연희가 그런 걸로 하자는 듯이 말없이 수현에게 팔짱을 꼈다.
“크흠. 내가 살게. 어디 못 날아가게 빚을 지워둬야지.”
수현이 말하며 걸음을 옮기자 연희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수현은 연희를 배웅하고 과외를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밤공기는 차가워서 그는 몸을 움츠렸다.
“쌤!”
이제는 꽤나 시간을 잘 맞추는 소향이그를 불렀다. 수현도 이제는익숙해진 그 목소리에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여기.”
그녀는 자연스럽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그에게 건넸다.
“오늘은 따뜻한 거네요.”
수현이 군말 없이 받아들며 말했다.
“오늘은 좀 쌀쌀해서.”
소향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도 따뜻한 컵이 들려있었다.
“참 정성입니다.”
수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이었다. 금방 지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수현에게 꽤 오래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이제 두 번 뿐인데 뭐. 이거 나한테 너무불리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소향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요.”
수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주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아 씨, 쌤 나도 과외 해줄래? 이번에 소현이 고거 점수 많이 올랐다고엄마 엄청 좋아하던데... 나도 한다고 하면 과외비도 엄청 올리고 가능할 걸?”
소향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뇨. 지금도 부족하진 않아서요. 제가 하기 싫습니다.”
수현이 단박에 거절했다.
“난 문제아니까 두배도 가능할걸?”
소향이 생각이나 좀 해보라는 듯이 말했다.
“됐습니다. 두 배나 힘들 거라는 소리같이 들리네요.”
수현이 대답했다.
“아...머리 좋은 게 이럴 때는 안 좋네.”
소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들은 잠시 그런 쓸데 없는 만담을 주고받으며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소향은 문에 들어서자 2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다른 이 집 사람들도 그러려니 할 만큼.
“아, 엄마!”
소향이 갑자기 배시시 웃으며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응?”
안주인이 대답하고, 모든 시선이 소향에게 쏠렸다.
“나도 공부나 할까?”
소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안주인이 놀라 물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소향이 달려 올라갔고,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현과 그녀의 어머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연희는 수현과 아쉽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혼자 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왜 노래도 있지 않은가 사랑은 향기를 남긴다고. 이 기분은 그 향기를 그립게 만든 사람 탓이었다.
연희는 지하철에서 내려 어둑하지만, 인기척이 많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허전한 기분을 느꼈다. 길 곳곳에 벌써 둘의 추억이 꽤나 많이 쌓여 있었다.
연희는 벌써 3월의 끝에 다가와 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여러 일들이 후다닥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
“어, 오랜만이네?”
연희가 대문을 열기 위해 멈춰섰을 때,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오던 현아가 연희를 보며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희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현아는 이제 출근을 하는 모양새였다.
“남자친구는?”
현아가 짓궂게 물었다.
“오늘은 제가 데려다주고 왔어요.”
연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쁘네. 둘 다. 부럽다.”
현아는 진심으로 그렇다는 공허한 미소를 내보였다. 연희는 어색하게 마주웃었다.
“언니는 출근해야 해서. 아, 택배 와 있던 거 내가 받았다가 좀 전에 문 앞에 뒀어.”
현아가 문을 빠져나가다가 빙글 돌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연희가 고개를 숙였다.
“응. 그럼 간다!”
현아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연희는 고개를 숙였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대하기가 영 어려웠다.
“음, 엄마가 보냈네?”
연희는 현관문 앞에 놓인 묵직한 택배를 들어보고는 아리송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문을 열고 택배를 집안으로 넣고문을 닫았다.
연희는 외투를 벗어두고 시간을 확인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우리 딸!-
신호음이 짧게 이어지고 그녀의 어머니가 발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무슨 택배가 와있어서! 이게 뭐야?”
연희가 책상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아! 딱 맞춰서 도착했네! 그거 이모네랑 너랑 주려고 만든 건데, 너희 아빠가 무겁다고 택배로 먼저 보내놓으라고 해서 보내 놓은 거야! 엄마 내일 서울 간다!-
연희는 엄마의 서프라이즈에 소리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내, 내일? 갑자기?”
연희가 침대 옆에 떡하니 있는 콘돔 상자를 보며 벌떡 일어나 물었다.
-응! 이모랑 금요일 저녁부터 놀러가기로 했는데, 하루 먼저 가서 너 얼굴이나 잠깐 보려고! 혹시 약속 있니?-
“어? 아니. 그냥 학교 수업만 있지. 내일 언제 도착해?”
연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 점심 먹고 가려고. 수업은 언제 끝나?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을까?-
“그, 그럼. 언제 도착하는데?”
-나올 필요 없어. 학교 끝나고 자취방으로 와. 엄마가 가서 밥해줄게. 그 때 밥 먹자.-
“응... 알았어. 나 그럼 한 6시까지 올게. 그럼 내일 봐!”
연희가 화장실을 열어보며 말했다.
-그래! 내일보자! 우리 딸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연희는 전화를 끊고 예정에 없던 대청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두었던 콘돔은 아예 상자 째로 버리고, 수현의 옷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칫솔이랑... 면도기랑...”
연희가 중얼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 베개!”
연희는얼른 밖으로 나와 수현이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잘 때는 항상 수현 대용으로 껴안고 자는 베개였다. 오늘도 그럴 용도였고.
“아... 아쉽다.”
연희는 잠시 갈등하다가 수현 특유의 체취가 남아있는 베개 커버를 과감히 벗겨냈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아예 이불도 세탁기에 넣고 새 이불을 꺼냈다. 다년간의 요식업 종사자인 엄마의 코가 흔적을 잡아낼지도 몰랐다.
연희는 전체적인 청소를 마치고 쓰레기를 밖에 버리고 돌아와 침대에 털썩 걸터 앉았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집안을 채웠다.
“아... 깜짝 놀랐네.”
연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수현이 곧 전화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샤워를 조금 미루고 전화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진정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