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
*
수현은 지하철 개찰구를 바라보며 연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둘 모두 알바도 있고 해서 제대로 동아리 박람회를 볼 기회가 없었기에, 금요일에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수현은 어제의 상쾌한 기분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벽에서 등을 뗐다. 곧 사람들이 몰려 올라오고, 딱 한 명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보였다.
“자기야!”
연희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나왔다. 수현이 연희를 가볍게 품에 안았다. 둘은 눈을 마주하고 가볍게 웃었다.
“흠,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이네?”
연희가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음? 왜?”
수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는 뭔가 되게 초조한? 그런 느낌이 좀 있었거든. 평소랑 다르게 좀 날카롭다고 해야하나... 무슨 일 있나 좀 걱정됐거든...”
연희가 약간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티 났구나...”
수현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너랑 달라붙어 있었는데! 말... 해 줄 수 있어?”
연희는 걱정이 풀렸는지 괜히 수현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고... 음, 있다가 동아리 박람회 보고 말해줄게.”
수현이 약간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음, 좋아. 일단, 동아리부터 보고?”
연희가 더 캐묻지는 않고 말했다. 수현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가볍게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거리를 걸었다.
“근데, 자기는 어느 쪽에 관심 있어? 경제 쪽? 아니면 운동 쪽?”
연희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수현의 시간표와 하루 일정을 떠올리며 물은 것이다.
“음, 동아리는 그냥 좀 활동적인 걸로 하고 싶어서, 일단은 운동. 공부는 수업에서만 하면 될 것 같아... 연희 넌 어때?”
“난 좀 둘러보고 싶어! 근데, 나도 요즘 자기 탄탄해지는 거 보니까 운동 좀 하고 싶어졌어. 웃기지? 옛날에 아빠가 유도 시킬 때는 되게 싫었는데... 완전 불효녀야.”
연희가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날 좋아해주는 것 같아서 난 좋은데... 나도 좋은 사위는 아닌가보다.”
수현이 말하자 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크흠, 그럼 운동 쪽부터 가 볼까?”
연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음, 아냐. 아직 오전이니까 천천히 들어가면서 보자. 의외로 관심 생기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수현이 연희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동아리들을 확인해 가며 관심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끔 이벤트를 해주는 곳도 있어서, 사진부에서는 그들의 사진을 찍어 폴라로이드 사진을 주기도 했다. 둘은 사진부에도 혹 하긴 했다. 하지만, 둘을 피사체로 많이 쓸 것 같다는 의견에 둘은 사진부를 보류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목적에 맞지 않게 가입하긴 싫었다.
“어? 자기야. 저기 봐.”
연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응? 아...”
수현은 간판을 목에 건 사람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꽤나 도발적인 간판.
-너 잽도 안 돼?-
선수에게 도전하세요! 도전 비용: 1천원!
1번! 30초 동안 피하는 선수 얼굴 맞추기: 상금 1만 원(여성: 2만 원!)
2번! 3분 동안 바디만 치는 선수한테 버티거나 선수 다운시키기: 상품 아이팟!
(신입생 이벤트: 아이폰을 드립니다! 운동부 제외.)
(커플 이벤트: 2천원 내면 아이팟 or 아이폰이 2개!)
----------------------------------------------
목에 간판을 건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복싱부... 새롭게 중앙동아리에 올라오면서 크게 이벤트를 하는 것이었다. 수현도 나중에 들어가서 이런 이벤트를 했다는 것을 선배한테 듣고 알았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복싱을 했다고 해도 일반인이 선수를? 게다가 신입생이면 대부분이 공부만 하던 애들이다. 안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현이 오늘 온 이유 중에 하나는 저것이었다. 능력에 대한 확인이기도 했고, 잘만 되면 상품까지 탈 수 있는 그런 것.
“자기도 복싱했다고 하지 않았어?”
연희가 약간의 기대를 섞어 웃으며 말했다.
“응. 취미정도로만.”
수현이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도전?”
연희가 약간은 도발하는 말투로 말했다.
“여자친구가 또 이렇게 기대를 해주는데, 남자가 뺄 수 없지. 2번으로 도전! 아이폰 가져올게.”
수현이 당당하게 말했다.
“어? 진짜? 1번 아니고?”
연희가 약간 놀람과 걱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흥. 어디 올림픽 메달리스트 집안 딸 앞에서 그래가지고 체면을 세우겠어?”
수현이 간단히 말하고는 손으로 머리를 눌러 목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진짜 괜찮겠어?”
연희가 다시 물었다.
“믿어봐. 핸드폰 바꿔줄게.”
수현이 씩 웃으며 윙크를 했다. 연희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도 선수와 일반인 차이는 대충 알았다. 직접 보진 못했어도, 중1이던 자신의 동생이 누나에 대한 음담패설을 한 중3 일진을 던져서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이벤트라 저쪽도 세게는 안 할 거야.”
수현이 연희를 이끌며 말했다. 그 말에 연희도 살짝 안심을 했다. 하긴, 여기서 심하게 해봐야 저쪽에서도 좋을 건 없었다.
그들이 중앙의 링으로 다가가자 이미 이벤트 하나가 진행 중이었다. 얼굴맞추기 중이었는지 선수는 휙휙 잘도 풋워크를 밟으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사회자는 열심히 중계를 하고 있었고, 은근히 관중들이 둘러싸고 보고 있었다.
“서울시 선수네...”
수현이 등의 마크를 보고 말했다.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다. 아무래도 복싱부가 단단히 준비한 것 같았다.
수현은 안내를 받아 인적사항을 작성하고,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받았다. 머리를 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것이었다.
“아프면 바로 내려와? 난 허세 부리는 남자가 젤 싫어.”
연희가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알았어요. 허세 안 부릴게.”
수현이 둘 만 있는 대기실에서 연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2분 뒤에 나가실게요!”
밖에서 말이 들려왔다. 연희는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다시 고정해주었다.
“이제 나가실게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며 말했다. 수현이 연희에게 윙크를 하고는 일어났다. 둘은 함께 걸음을 옮겨 나갔다.
사회자는 그들을 보고 신나서 소개를 시작했다.
“자, 드디어 대단한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무려 커플 아이폰을 노린 신입생 루키! 그것도 선남선녀의 커플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그들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몇 명은 그들을 알아보는 듯 했다.
“네, 그는 예쁜 여자친구를 위해서 과연 아이폰을 선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니 곧 화이트데이네요! 전 솔로라 줄 사람이 없지만, 화이트데이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겠네요!”
사회자가 올라오는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잠시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성함이?”
사회자가 물었다.
“경영학과 10학번 황수현입니다.”
작게 환호가 나왔다.
“네! 새내기의 패기! 에프엠을 시켜보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여자친구 분은?”
사회자가 말하자 아래 있던 스텝이 연희에게 마이크를 내주었다.
“경영학과 10학번 김연희라고 합니다...”
연희가 약간 부끄럽게 말했다. 더 큰 환호가 터졌다.
“네!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우십니다! 저희가 이번 연고전은 이기고 시작한다고 생각이 되네요. 열심히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는 기분좋게 말했다.
“음, 2번을 도전하신 게 맞죠? 왜 하신 건가요?”
사회자는 뒤의 선수 쪽과 눈길을 잠깐 주고받고는 질문을 했다.
“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화이트데이 선물 주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수현이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환호가 나왔다.
“와, 멋지네요. 뭔가 운동을 해본 적은 있나요?”
사회자가 물었다.
“중학교 때, 너무 뚱뚱해서 잠깐 어머니가 복싱 보낸 적이 있습니다.”
수현이 약간 어리숙하게 말했다.
“아, 역시 해본 적은 있으시군요! 오! 우리 선수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전 내려가고 1분 뒤에 시작하는 걸로 하죠!”
사회자가 뒤를 보고 말했다. 사회자가 내려가고 양 사이드로 수현과 선수가 빠지자 1분 공이 울렸다. 수현은 일부러 더 긴장한 척을 하며 상대에게 얕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애송이로 보여야 했다.
선수는 수현의 긴장하고 어색한 자세, 눈빛에 귀여움을 느꼈다. 그는 가볍게 긴장을 풀었다. 예쁜 여친 앞에서 뭐라도 좀 해보이고 싶은 어린 아이의 치기가 보였다. 그는 적당히 상대하며 자존심은 좀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의 20살을 생각하면, 딱 그러고 싶을 나이였다. 아래 예쁜 여자아이도 걱정 어린 눈을 하고 있고. 그는 느긋하게 1분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