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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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소현과 그녀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며 신발을 신었다. 학생은 순조로웠고 학부모는 닦달 없이 잘 기다려주니, 선생으로서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그때였다. 2층에서 걸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두 모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갔다.
“어? 안녕?”
소향은 배를 긁적이며 내려오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반대 손으로 그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두 모녀가 놀란 눈으로 소향과 수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 밥 아직이지?”
소향이 거실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응... 배고프니?”
안주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기다릴게.”
소향은 말을 마치고는 하품을 하며 거실로 사라졌다.
“무, 무슨?”
소현이 수현에게 해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을 했다.
“얼마 전에 요 앞에서 만났는데, 그 때 오해를 좀 풀었어요. 제가 과외 교사라고 하니까 이해하더라고요.”
수현이 적당히 말했다. 두 모녀는 그다지 신뢰하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잘가!”
거실에서 소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쉬세요.”
수현이 딱히 할 말이 없어 대답을 하고는 문을 나섰다. 수현은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연희의 첫 출근이었다. 5시에 퇴근이라고 했으니, 그 때까지 운동과 토토 산책을 시키고, 내일 과외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수현은 집에 도착해 조금 생각을 바꿔 토토와 긴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날이 조금 포근하게 풀리기도 했고, 민형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더 능력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긴 했으나, 광장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귀엽고 얌전한 강아지와 훈훈한 남자가 느긋하게 앉아있다면 시선을 한 번쯤은 받을만하다. 말을 걸어보고 싶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옆의 남자들은 경계하고 싶을 가능성이 높고. 수현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조금 더 데이터를 쌓았다.
‘단순히 첫인상을 좋게 해주는 효과가 아니었어...’
수현은 그런 몇 가지의 내용을 얻은 것에 만족하며 토토에게 가지고 나온 간식을 주었다. 토토는 당당히 받아먹었다. 마치, 자신의 하루 일당이 뭔지 아는 듯한 태도였다. 조금 더 걷다가 토토는 자리에 멈춰섰다. 수현은 자연스럽게 나이든 강아지를 안아들었다. 외모야 여전히 귀엽지만, 노견은 노견이라 쉽게 지쳤다. 이제 네가 나를 들고 가라는 표시가 확실했다. 토토는 안긴 채로 나무들의 냄새를 맡곤 했다. 수현은 팔 운동을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불만 없이 강아지가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
수현은 영화관 앞에서 연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사람이 스쳐지나가고 얼마 후, 연희가 동기로 보이는 사람들과 웃으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수현은 피식 웃으며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수현이 몇 발자국 움직이자, 연희도 그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더 환해졌다.
“수현아!”
연희가 주변 동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수현이 뿌듯한 얼굴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둘의 키차이는 10센치가 조금 넘는 정도로 아주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수현은 워커를 신었고, 연희는 간단한 운동화를 신었으므로 그럭저럭 매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수현이 다가온 동기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자 2명과 남자1명이었는데, 남자아이의 표정이 약간 떨떠름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두었던 것 같았다. 하긴 꽃에 나비도 벌도 온갖 벌레가 다 꼬이는 법이다.
“아, 남자친구 분이시구나!”
여자 둘이 약간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남자는 적당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네. 저희 연희 잘 부탁드릴게요.”
수현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웃어보였다.
“근데, 저희도 며칠 안 된 거라...”
그들은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럼,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현이 적당한 시점에서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했다.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연희 안녕!”
연희의 동기들이 얼른 반응했다.
“안녕! 내일 봐!”
연희가 수현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반대 손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으, 좋다.”
연희가 수현의 코트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리며 깍지를 끼더니, 고양이가 주인에게 몸을 부비듯이 바짝 붙어왔다.
“오늘 어땠어?”
수현이 신호등에 멈춰 서서 연희의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주며 물었다.
“음, 사실 잘 모르겠어. 이것 저것 배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일도 뭐 배우고 일한다는데, 기억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연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아. 금방 배울 거야. 수능 보다 어럽겠어?”
수현이 약간 주눅든 연희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호등이 바뀌고 둘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매표소 하는데, 실수해서 막 줄 길어지면 어떻게 하지?”
연희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마. 넌 예쁘니까 웃어주면 해결 될 거야.”
수현이 전혀 문제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야아!”
연희가 얼굴을 붉히고 그를 툭 밀었다.
“어? 여기 신호등이야...”
수현이 웃으며 말했다.
“치, 뭔가 내가 영화관 다닐 때는, 할인권 뭐 있음 좋겠다 이랬는데, 알바 되고 나니까 할인 없었으면 좋겠단 생각부터 들더라. 너무 많은 것 같아.”
연희가 사람 참 간사하다는 듯이 말했다. 수현이 큭큭거렸다.
“첫날부터 너무 힘들었나... 누가 그렇게 괴롭힌 거야.”
수현이 연희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번엔 연희가 큭큭거렸다.
“혼내줄 거야?”
연희가 말했다.
“후, 또 내가 힘 하면 자신 있지.”
수현이 연희쪽 팔 근육을 일부러 튕겼다. 연희가 빵터져 웃었다.
“이거 엄청 웃겨. 나도 할 수 있나?”
연희가 자신도 해보려고 낑낑댔다.
“음, 난 잘 안된다...”
“봤지?”
수현이 뿌듯한 미소를 보였다. 연희가 깔깔댔다.
둘은 저녁을 먹고 나서 카페에 들렀다. 그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닌 커피 먹어보기에 은근히 맛이 들려 있었다. 3일 밖에 되진 않았지만, 룰도 생겼다. 하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는 다른 걸 시켜서 같이 맛보기.
“라떼도 약간 화이트러시안 과 아닌가?”
수현이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응? 아, 그런가?”
연희는 약간 갸우뚱하며 말했다.
“응. 이건 더 그럴듯해. 위에 그림도 그려주잖아. 예쁘게. 그러곤 의외로 쓰고.”
수현이 처음 라떼를 먹었을 때를 생각하며 말했다. 라떼는 대학와서 썸녀와 처음 먹어봤다. 그때, 이거 주문 잘 못 들어간 것 아니냐고 물어본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
“나 처음 먹었을 때는 이거 뭐 덜 넣고 나온 줄 알았어. 써서.”
수현이 말하자, 연희가 작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벌써 2월이다.”
연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게. 2월도 금방 가려나...”
수현이 동의하며 말했다.
“내 생각엔 2월에도 뭐가 많아서 막 후다닥 지나갈 것 같아.”
연희가 약간 장담하는 말투로 말했다.
“하긴, 학교 행사도 슬슬 있지.”
수현이 오티에 새터에 이어질 것들을 떠올렸다.
“응. 수강신청도 곧 있고. 우리 잘 맞출 수 있을까?”
둘은 일요일에 만나 수강신청을 공유했다. 아직 완전히 딱 맞춘 것은 아니지만.
“학교 홈페이지를 해킹해버릴까?”
수현이 말했다. 연희가 킬킬댔다.
“아, 우리 시간표 다시 맞춰보자. 나 네가 말한 교양 빼기로 했어. 찾아보니까, 네 말대로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연희가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수현이 노트북을 꺼내자, 둘은 머리를 맞대고 다시 시간표에 대해 조율하기 시작했다. 수현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연희에게 조언했다.
“음, 이렇게 하자. 근데 우리 너무 2학년 수업 들어버리는 거 아닌가?”
연희가 약간 불안한 듯 말했다. 하지만 수현은 자신의 두뇌가 가장 풀 컨디션일 때, 회계사 관련 과목들을 들어두고 싶었다. 어차피 들어야 한다면 연희도 자신이 제일 잘 도울 수 있을 때 들었으면 했고.
“괜찮을 거야. 어차피 2학년들도 처음인데 뭐.”
수현이 말했다.
“으, 내일은 일찍 출근해야 돼.”
연희가 기지개를 켜며 아쉬워했다.
“오늘보다?”
“응. 뭐 준비하는 거 배운다고.”
연희가 말했다.
“그럼 이만 일어나자.”
수현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표 때문에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다.
“응... 오늘은 안 데려다 줘도 돼.”
연희가 정말 괜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수현이 잠깐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하고 싶어서 그걸 하러 온 건데. 그걸 하지 말라고 하시면...”
수현이 대장금을 따라했다. 연희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안 힘들겠어? 너, 이거 맨날 해줄 생각 아니면 하지 마? 나 기대한다?”
연희가 경고하듯 말했다.
“나 과외 있거나 중요한 약속 있을 때 빼곤 항상 할게. 기대해.”
수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걸 억지로 몇 년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흐음.”
연희가 콧소리를 냈다.
“가자. 데려다 줄게.”
수현이 노트북을 먼저 정리 하며 말했다. 연희가 트레이를 들고 일어났다. 둘은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추위로 둘은 바짝 몸을 붙이고 걸었다. 지하철에선 자리가 좁아 바짝 몸을 붙였다.
“밤공기 좋다.”
연희가 조용한 오르막길을 오르며 말했다. 하늘이 맑긴 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다가 옆으로 불었다. 연희가 팔짱을 껴왔다.
“사실, 원래 좀 이 시간이면 무섭거든? 근데 너랑 오면 오히려 운치 있는 느낌이다?”
연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데려다주지 말라고?”
수현이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냥, 너 피곤하잖아. 사실,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고.”
연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됐거든. 지하철 좀 타는 게 뭐 피곤해. 너랑 걷는 것도 좋고.”
수현이 연희의 머리를 괜히 휘저으며 말했다.
“아씨...”
연희가 머리를 정리하며 수현을 째려보았다.
둘은 연희의 자취방이 있는 건물을 조금 지나쳐 어둑한 담벼락으로 향했다.
“이러려고 왔지.”
어제보다 조금 더 길어진 입맞춤이 끝나고 연희가 괜히 민망한 얼굴을 감추며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구나.”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치, 역시. 꿍꿍이가 있었어.”
연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수현을 안았다.
“원래 공짜가 없어요. 택시를 탔으면 요금을 내야지.”
수현이 연희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큼, 그럼 팁도 줄게.”
연희는 냉큼 살짝 떨어지더니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조금 길어진 입맞춤 후에 떨어진 입술이 다시 짧게 맞닿고 떨어졌다.
쪽-.
하는 가볍고 애정 어린 소리가 작게 퍼졌다.
“그럼... 가볼게. 들어가. 빨리 자야지.”
“응...”
둘은 그러고도 얼마간을 더 껴안고 있었다.
“진짜 가야겠다. 이러다가 내일 너 지각하겠어.”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보다도 자신이 버티기 힘들었다.
“...응...”
연희가 아쉬움을 담아 대답했다.
“갈게. 잘 자고. 내일 봐.”
“응. 조심히 가. 도착하면 연락해.”
“응.”
둘은 서로에게 아쉬운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둘 모두 몸도 마음도 어딘가 아쉬움이 진득히 남았다.